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1987년까지 역대 정부의 3·1절 기념의례와 3·1운동 표상화의 역사적·정치사회적 의의를 살펴본다. 이승만 정부는 1949년 대한민국이 유엔의 승인을 받아 독립국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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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Korean
KCI등재
학술저널
431-485(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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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1987년까지 역대 정부의 3·1절 기념의례와 3·1운동 표상화의 역사적·정치사회적 의의를 살펴본다. 이승만 정부는 1949년 대한민국이 유엔의 승인을 받아 독립국가가 �...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1987년까지 역대 정부의 3·1절 기념의례와 3·1운동 표상화의 역사적·정치사회적 의의를 살펴본다.
이승만 정부는 1949년 대한민국이 유엔의 승인을 받아 독립국가가 되고 처음 3·1절을 맞았다고 선언했다. 정부는 초기부터 3·1절 기념식을 지휘하며 국가 독점의 기억을 강요했다. 이때의 3·1절 기념의례의 방식은 권위국가하에서 거의 그대로 재현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3·1정신을 ‘자유민주주의’와 ‘반공통일’의 표상으로 轉用·專有했다.
박정희 군사정부가 들어서고 3·1절 기념식은 축소되었다. 정부의 3·1절 기념식이 계속 서울시 주최로 개최되고, 기념식 장소가 실내로 이동하여 간소화되는 등 이 정부는 3·1절 기념행사와는 거리 두기 방침을 취했다. 박정희 정권은 3·1정신을 ‘민족단결’의 표상으로 재구축했고, 이는 경제적 성장을 우선시하는 ‘조국 근대화’의 표상과 결합되었다. 또한 북한에 대항하는 ‘(반공)평화통일’의 표상을 통해 정통성을 인정받으려 했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국경일 기념식을 다시 정부 주최로 격상하여 거행하며, 3·1절 기념의례를 정권 유지 차원에서 적극 활용했다. 이 시기에는 3·1정신의 ‘국민화합’과 ‘민족통일’의 표상이 부상했다. 냉전체제가 지속되면서 반공의 ‘민족혼’의 표상이 되살아나기도 했다. 전두환 정부의 3·1운동 인식은 박정희 정부 시기 ‘민족단결’과 ‘(반공)평화통일’의 표상과도 일맥상통했다. 권위주의 정부는 독재정권 연장을 위한 왜곡된 민족주의, 민주주의, 통일상만을 강요했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South Korean Government until 1987, the memorial ceremony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Day(March 1) of the governments, the historical, political and social significance of its representations of the March 1 Independence...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South Korean Government until 1987, the memorial ceremony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Day(March 1) of the governments, the historical, political and social significance of its representations of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will be examined.
In 1949, the Rhee Syng-man government declared that it was the first Independence Movement Day after the Republic of Korea was approved by the UN and became an independent nation. From the beginning, the government commanded the celebration of the March 1, and imposed the state monopoly of memory. The memorial ceremony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Day at this time was reproduced almost exactly under the authoritarian state. The Rhee Syng-man government converted and monopolized the March 1 Spirit as representations of the ‘liberal democracy’ and ‘anti-communist unification’.
However, since the Park Chung-hee"s military government was established, the celebration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Day tended to be reduced. The government celebration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Day was hosted by the government of Seoul. The ceremony began to be held indoor and it was sharply simplified. The Park Chung-hee government adopted the policy of having a distance from the event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Day. The Park Chung-hee regime rebuilt the March 1 Spirit as a representation of the ‘national unity’, and combined it with the representation of the ‘modernization of the fatherland’ which prioritizes economic growth. He tried to create self-legitimacy through by representing ‘(anti-communist) peaceful unification’ against North Korea.
The Chun Doo-hwan"s military regime upgraded the celebration of the national days hosted by the government again, and actively utilized the ceremony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Day to maintain his regime. During the era, the representation of the ‘national fusion’ and ‘national unification’ of the March 1 Spirit emerged. As the Cold War system continued, the representation of the anti-communist ‘national spirit’ revived. The Chun Doo-hwan government’s perception of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has a thread of connection to the representation of the ‘national unity’ and ‘(anti-communist) peaceful unification’ during the Park Chung-hee government. The authoritarianism government, only emphasized the distorted nationalism, democracy, and unification to extend the dictatorial regime.
목차 (Table of Contents)
참고문헌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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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평민 同姓마을의 형성과 특징- 大丘府 解北村 廣里의 丹陽 禹氏 사례
1960년대 대자본의 일본 외자도입 개시와 조직적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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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1.11 | 1.11 | 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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