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는 교학적으로 일심(一心)사상을 중심으로 화쟁(和諍)을 이끌었고, 삶에서는 무애행을 실천했다. 원효가 막힘이 없다는 무애가를 부른 것은 불교의 내용을 일반 서민들에게 알리기 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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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Abstract)
원효는 교학적으로 일심(一心)사상을 중심으로 화쟁(和諍)을 이끌었고, 삶에서는 무애행을 실천했다. 원효가 막힘이 없다는 무애가를 부른 것은 불교의 내용을 일반 서민들에게 알리기 위함...
원효는 교학적으로 일심(一心)사상을 중심으로 화쟁(和諍)을 이끌었고, 삶에서는 무애행을 실천했다. 원효가 막힘이 없다는 무애가를 부른 것은 불교의 내용을 일반 서민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기에, 가사는 서민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향가로 지었을 것이고, 장단에 맞춰 가사를 읊느라 호로를 들고 춤을 추었던 것이다. 이후 무애가는 가사보다 춤으로 연출되면서 ‘무애무’ ‘무애희’라 불렀다.
한문도 모르고 시간 여유도 없는 서민들에게 노는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불러 극락세계에 왕생하라는 정토신앙을 권했다. 무애가는 승속을 막론하고 조선조에까지 널리 계승되었으며, 궁중에서는 기녀와무동이 무애가를 부르며 무애춤을 추었다. 원효의 서민교화를 이은 고승은 고려말 나옹이었다. 나옹은 우리말로 서왕가와 승원가를 지어 부지런히 염불하여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할 것을 권장했다. 오늘날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청산은 나를 보고~’라는 시는 출처는 없지만 나옹의 시라 전해지는 것은 나옹이 서민 속에 얼마나 친숙하게 다가와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고려 대각국사 의천은 원효의 화쟁사상과 무애행으로 원효를 보살이라 불렀으며, 고려말 승속들은 나옹의 교화력과입적시 나타난 이적으로 나옹을 부처로 추앙했다.
조선조 전쟁으로 소실된 사찰을 재건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사찰을운영하기 위해 서민들의 지원이 절실했던 시기에 서민들의 인기를 얻던 원효와 나옹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찰의 창건설화에서 원효와 나옹의 이름을 빌려와 사찰에 신성(神性)을 더했다.
원효와 나옹에 대한 승속의 예경은 조선후기 만들어진 각종 의례집에서 선문조사를 예경할 때도 원효와 나옹을 예경하고 화엄조사를 예경할 때도 원효와 함께 나옹을 예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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