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조선 회화사에 큰 업적을 남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남긴 화첩(畫帖) 중 《칠탄정십육경도(七灘亭十六景圖)》에 대해 파악하고, 이를 통해 강세황의 화가로서의 면모와 그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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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조선 회화사에 큰 업적을 남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남긴 화첩(畫帖) 중 《칠탄정십육경도(七灘亭十六景圖)》에 대해 파악하고, 이를 통해 강세황의 화가로서의 면모와 그의 ...
이 연구는 조선 회화사에 큰 업적을 남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남긴 화첩(畫帖) 중 《칠탄정십육경도(七灘亭十六景圖)》에 대해 파악하고, 이를 통해 강세황의 화가로서의 면모와 그의 회화 사상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먼저 강세황의 일생을 18세기 당시 정치·사회·문화상황을 통해 살펴봄으로써 강세황의 회화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강세황의 《칠탄정십육경도(七灘亭十六景圖)》를 살펴보고, 여기에서 드러나는 강세황의 화풍과 그의 회화세계, 그리고 《칠탄정십육경도(七灘亭十六景圖)》의 의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강세황의 생애는 사회적 지위의 변화에 따라 크게 안산 거주 시기(1744-1773)와 한양 거주 시기(1773-1791)로 나눌 수 있다. 소북계 남인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난 강세황은 선조들의 뒤를 이어 조정에 나아가 자신의 포부를 펼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형 강세윤(姜世胤, 1684-1741)이 1728년 무신란에 연루되면서 출사(出仕)의 길이 막혔고, 이로 인해 받은 심리적 타격을 회화를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의 회화세계는 아직 방작(倣作)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였지만, 이 시기를 통해 자신만의 특성을 개발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안산 시기는 강세황이 화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정치적 복권의 기초를 닦은 단계에 해당한다. 1744년 강세황은 가문의 복권이 지연되면서 가세가 기울자 처가가 있는 안산으로 이주하였다. 강세황이 낙향지로 안산을 고른 이유는 안산이 처가인 진주 유씨의 세거지(世居地)로 서울에서 가까운 지역이라는 장점 때문이었다. 안산 시절 강세황은 겉으로는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은둔한 은일자(隱逸者)를 자처하였으나, 정치적인 측면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사회적 관계망 형성을 위해 활발한 회화 활동을 펼쳤다. 안산 초기의 회화는 처남인 유경종(柳慶種, 1714-1784)을 비롯한 진주 유씨 일가 및 이익(李瀷, 1681-1763)을 중심으로 한 여주 이씨 일가 등 안산권의 문인들을 위해 제작되었다. 그러나 후기에는 점차 원거리의 남인 문인 및 소론 관료에 이르는 회화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시서화 삼절로서 명성을 얻고 인적관계를 넓혀 갔다.
가문이 복권된 1763년에서 1781년까지는 강세황의 절필기에 해당한다. 강세황이 화가로서의 명성으로 인해 논란에 휘말릴 일을 염려했던 영조의 교시에 의해 강세황은 절필을 단행했으며 문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러나 절필의 기간에도 개인적인 회화 활동만은 지속하며 작화를 향한 애착을 버리지 않았다. 1781년 강세황은 어진 제작의 감동(監董)을 맡으면서 절필을 마치고, 공적이나 사적인 측면 모두에서 적극적으로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이를 통해 관료인 동시에 시서화의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양립하고자 하였다. 말년의 다채로운 회화 활동은 서화를 겸비한 문인으로서의 사회적 명성과 평판을 획득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강세황의 《칠탄정십육경도(七灘亭十六景圖)》는 그가 안산에 거주하던 시절 손사익의 요청으로 제작한 그림이다. 이 그림을 통해 강세황이 안산권의 문인들 뿐 아니라 먼 지역의 남인 문인 및 소론 신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문인들의 주문을 받아 그림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강세황은 이렇게 적극적으로 회화 요구에 대응하며 시서화 삼절로서 명성을 얻고 인적관계를 넓혀 갔다.
《칠탄정십육경도(七灘亭十六景圖)》의 구성을 살펴보면 강세황이 실경의 정확한 묘사보다는 자신이 칠탄정을 그린 그림을 시문으로 표현하는 데 좀 더 치중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강세황이 실경을 보고 그린 그림이 아닌 것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손기양(孫起陽, 1559-1617)의 업적을 담아야 하는 그림의 성격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칠탄정십육경도(七灘亭十六景圖)》의 화풍은 강세황 특유의 화풍이 잘 드러나 있으며, 이 시기에 이미 표암의 화풍이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그가 그림과 함께 쓴 시문에서도 그의 학식과 인품이 잘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논의에서 살펴본 것처럼 야인 시절 강세황은 불우한 때를 만나 숨어 사는 은일자를 자처하였으며, 출사 이후에는 화가로서의 명성과 관료로서의 사회적 명망을 얻었다. 강세황이 안산 시기에 제작한 《칠탄정십육경도(七灘亭十六景圖)》에서 그가 가문의 복권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한 과정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가문의 복권 이전에 이미 강세황과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널리 퍼져있었으며, 그의 화풍이 기반을 잡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강세황의 생애와 그의 작품 활동을 볼 때, 강세황에게는 인생의 시련을 묵묵히 견디며 문인의 높은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던 문인화가의 이미지만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그린 작품에서 그가 문인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던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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