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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60년대 농촌위생연구소의 활동과 한국 농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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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이 연구의 내용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농촌위생연구소가 설립되기까지 배경이고, 다른 하나는 농촌위생연구소의 구체적인 활동이며, 나머지 하나는 농촌위생연구소 약화의 이유이다. 설립 배경에 대한 고찰이 주로 1940년대 식민지 조선 농촌의 위생상황과 그 타개방안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한다면, 활동에 대한 고찰은 주로 1940-50년대 농촌 위생문제와 그 해결책에 대한 모색을 중심으로 할 것이며, 약화에 대한 고찰은 공업화라는, 1960년대 한국사회의 경제적 기반 변동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할 것이다.
    첫째, 농촌위생연구소의 설립 배경을 밝히기 위해 소장인 이영춘이 전라북도의 대농장이었던 구마모토농장에 전속 의사로 파견되어 활동하던 1940년대 식민지 조선 농촌의 위생상황과 그 타개방안을 살펴볼 것이다. 1929년 대공황 이후 식민지 경제가 불안정해지면서 일제는 농촌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한 제도적 방안들을 고안하고 실시하였다. 농촌위생과 관련하여 일련의 조사연구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사회주의 세력의 경우 토지문제의 해결을 궁극적인 과제로 제시하며 투쟁하였다. 하지만 위의 조사연구나 투쟁들은 실질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거나 구체성을 결여하였다는 점에서 실현가능성이 부족하였다.
    이에 비해 이영춘은 자신의 진료경험 그리고 외국의 사례를 참고하면서 농민 건강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질적인 방안들을 구상하였다. 농촌 위생문제의 조사와 연구, 진료기관의 체계적 구성 등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완결적인 지역 의료체계의 수립이었다. 그의 구상은 ‘민족의 건강 확보’를 직간접적으로 표방하였다는 점에서 일제의 농촌안정책과 달랐고, 경제문제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였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세력의 농촌안정책과 달랐다. 개항 이후 인구의 양적, 질적 확대를 추구해왔던 민족주의가 의료 혹은 위생의 측면에서 발현된 방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예 중 하나는 小作人醫療共濟組合의 조직을 통한 소작인병원의 설립 구상이었다. 국가나 지주의 일방적인 시혜에서 벗어나 조합 형태로 공동의 이익을 도모해나가는 조직을 구상한 것이었다.
    둘째, 해방 후 농촌위생연구소 설립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시기부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농촌위생문제를 체계적으로 타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는 시기까지를 살펴볼 것이다. 1947년 설립된 농촌위생연구소는 크게 연구부, 진료부, 교육부로 나뉘어졌다. 연구부의 활동을 통해 당시 위생적 견지에서 분석한 농촌문제들이 조사⋅연구되었고, 연구원들의 논문과 󰡔農村衛生󰡕 등을 통해 그 내용 및 해결방안이 소개되었다. 특히 한국전쟁 발발 후 피난을 위해 전라도 지역에 온 의사들이 농촌위생연구소에 참가하면서 연구능력은 강화되었고, 전 시기 중에서 가장 활발한 조사연구활동이 이루어졌다.
    농촌위생연구소 설립의 주요 목적은 농촌위생문제의 조사 및 연구였지만, 그에 못지않은 비중을 지닌 활동은 부속기관인 진료부를 통해 이루어졌던 농민 진료였다. 하지만 농촌위생연구소의 특징은 직접적인 진료보다는 보건사업에 있었다. 1951년 설립된 開井高等衛生技術員養成所는 보건사업 추진을 위한 실질적인 토대였다. 진료의 보조인력이 아닌 위생사업 전반을 지도할 위생원은 한국사회에서 당시까지도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지 않는 독특한 성격의 의료인력이었다.
    셋째, 한국전쟁 기간까지 활발하게 활동을 하며 한국 농촌의 위생문제 해결을 위한 하나의 모범을 만들어나갔던 농촌위생연구소가 점차 약화되어 나가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농장 소작인들의 요청과 미군정의 지원으로 설립된 농촌위생연구소는 농지개혁이 이루어지고, 정부의 재정 지원이 축소되면서 활동성을 잃어갔다. 해방 전 일본인 대지주의 지원 아래 농촌위생연구소를 설립하려 했던 이영춘의 구상에서 알 수 있듯이 안정적인 재정기반은 그 구상이 현실화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였다. 하지만, 1940-50년대 한국사회는 그의 구상과는 엇갈린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1960년대 접어들어 박정희 정권에 의해 공업화가 추진된 것은 농촌위생연구소의 존재 의미를 축소시키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한국사회의 목표는 수출공업화로 집약되었고, 농촌은 그 목표 달성을 위해 복무해야할 이차적 존재로 전락했다. 농촌의 의료문제에 대한 관심 역시 농민의 건강보다는 인구 제한이라는 가족계획사업에 두어졌다. 이런 일련의 상황은 농촌위생문제를 전문으로 한 기관의 존재 의의에 부정적 평가를 낳았고, 결국 정부 보조금이 중지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즉, 한국사회의 주요 기반이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개인이 설립한 그리고 농촌사회에 기반을 둔 농촌위생연구소는 그 존재 의미를 부정당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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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연구의 내용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농촌위생연구소가 설립되기까지 배경이고, 다른 하나는 농촌위생연구소의 구체적인 활동이며, 나머지 하나는 농촌위생연구소 약화...

    이 연구의 내용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농촌위생연구소가 설립되기까지 배경이고, 다른 하나는 농촌위생연구소의 구체적인 활동이며, 나머지 하나는 농촌위생연구소 약화의 이유이다. 설립 배경에 대한 고찰이 주로 1940년대 식민지 조선 농촌의 위생상황과 그 타개방안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한다면, 활동에 대한 고찰은 주로 1940-50년대 농촌 위생문제와 그 해결책에 대한 모색을 중심으로 할 것이며, 약화에 대한 고찰은 공업화라는, 1960년대 한국사회의 경제적 기반 변동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할 것이다.
    첫째, 농촌위생연구소의 설립 배경을 밝히기 위해 소장인 이영춘이 전라북도의 대농장이었던 구마모토농장에 전속 의사로 파견되어 활동하던 1940년대 식민지 조선 농촌의 위생상황과 그 타개방안을 살펴볼 것이다. 1929년 대공황 이후 식민지 경제가 불안정해지면서 일제는 농촌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한 제도적 방안들을 고안하고 실시하였다. 농촌위생과 관련하여 일련의 조사연구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사회주의 세력의 경우 토지문제의 해결을 궁극적인 과제로 제시하며 투쟁하였다. 하지만 위의 조사연구나 투쟁들은 실질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거나 구체성을 결여하였다는 점에서 실현가능성이 부족하였다.
    이에 비해 이영춘은 자신의 진료경험 그리고 외국의 사례를 참고하면서 농민 건강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질적인 방안들을 구상하였다. 농촌 위생문제의 조사와 연구, 진료기관의 체계적 구성 등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완결적인 지역 의료체계의 수립이었다. 그의 구상은 ‘민족의 건강 확보’를 직간접적으로 표방하였다는 점에서 일제의 농촌안정책과 달랐고, 경제문제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였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세력의 농촌안정책과 달랐다. 개항 이후 인구의 양적, 질적 확대를 추구해왔던 민족주의가 의료 혹은 위생의 측면에서 발현된 방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예 중 하나는 小作人醫療共濟組合의 조직을 통한 소작인병원의 설립 구상이었다. 국가나 지주의 일방적인 시혜에서 벗어나 조합 형태로 공동의 이익을 도모해나가는 조직을 구상한 것이었다.
    둘째, 해방 후 농촌위생연구소 설립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시기부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농촌위생문제를 체계적으로 타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는 시기까지를 살펴볼 것이다. 1947년 설립된 농촌위생연구소는 크게 연구부, 진료부, 교육부로 나뉘어졌다. 연구부의 활동을 통해 당시 위생적 견지에서 분석한 농촌문제들이 조사⋅연구되었고, 연구원들의 논문과 󰡔農村衛生󰡕 등을 통해 그 내용 및 해결방안이 소개되었다. 특히 한국전쟁 발발 후 피난을 위해 전라도 지역에 온 의사들이 농촌위생연구소에 참가하면서 연구능력은 강화되었고, 전 시기 중에서 가장 활발한 조사연구활동이 이루어졌다.
    농촌위생연구소 설립의 주요 목적은 농촌위생문제의 조사 및 연구였지만, 그에 못지않은 비중을 지닌 활동은 부속기관인 진료부를 통해 이루어졌던 농민 진료였다. 하지만 농촌위생연구소의 특징은 직접적인 진료보다는 보건사업에 있었다. 1951년 설립된 開井高等衛生技術員養成所는 보건사업 추진을 위한 실질적인 토대였다. 진료의 보조인력이 아닌 위생사업 전반을 지도할 위생원은 한국사회에서 당시까지도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지 않는 독특한 성격의 의료인력이었다.
    셋째, 한국전쟁 기간까지 활발하게 활동을 하며 한국 농촌의 위생문제 해결을 위한 하나의 모범을 만들어나갔던 농촌위생연구소가 점차 약화되어 나가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농장 소작인들의 요청과 미군정의 지원으로 설립된 농촌위생연구소는 농지개혁이 이루어지고, 정부의 재정 지원이 축소되면서 활동성을 잃어갔다. 해방 전 일본인 대지주의 지원 아래 농촌위생연구소를 설립하려 했던 이영춘의 구상에서 알 수 있듯이 안정적인 재정기반은 그 구상이 현실화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였다. 하지만, 1940-50년대 한국사회는 그의 구상과는 엇갈린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1960년대 접어들어 박정희 정권에 의해 공업화가 추진된 것은 농촌위생연구소의 존재 의미를 축소시키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한국사회의 목표는 수출공업화로 집약되었고, 농촌은 그 목표 달성을 위해 복무해야할 이차적 존재로 전락했다. 농촌의 의료문제에 대한 관심 역시 농민의 건강보다는 인구 제한이라는 가족계획사업에 두어졌다. 이런 일련의 상황은 농촌위생문제를 전문으로 한 기관의 존재 의의에 부정적 평가를 낳았고, 결국 정부 보조금이 중지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즉, 한국사회의 주요 기반이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개인이 설립한 그리고 농촌사회에 기반을 둔 농촌위생연구소는 그 존재 의미를 부정당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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