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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公武體制’의 構造와 變容-일본 중·근세국가체제의 새로운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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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공가의 무가화’, ‘무가의 공가화’라는 현상을 핵심요소로 하여 형성된 무로마치 시기의 정치체제(‘공무체제’)는 오다·도요토미 정권의 출현으로 변화한다. 본 연구는 무로마치 국가체제의 핵심을 ‘공무체제’라는 새로운 개념을 규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중세 권문체제나 근세 막번체제와 같은 일본인들이 구축해 온 선행 연구의 분석틀이 아니라 외국사를 전공하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일본 중·근세 국가상을 재구축하려는데 있다. 물론 이러한 연구는 연구의 특성상 어느 일개인이 단기간에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연구 목표를 명확히 설정하여 중요한 기초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 개요는 다음과 같다.
      원정시기 주요 권문으로 구성된 정치체제는 가마쿠라 시기에 이르러 막부라는 무가정권이 실권을 장악함으로써 사실상 동(가마쿠라)‧서(교토)의 이원화된 정권으로 분화한다. 동국은 가마쿠라를 중심으로 무사가, 서국은 교토를 중심으로 공가와 사사가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처럼 이원화되어 있던 가마쿠라 시기의 ‘공무이원(公武二元)’의 정치 구조는 무로마치 시기 교토로 수도를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공무융합(公武融合)’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무로마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건립한 금각사(金閣寺)는 바로 이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금각사는 1층은 귀족풍 신젠쓰쿠리(寢殿造) 양식으로, 2층은 무가풍 쇼인쓰쿠리(書院造)로, 3층은 중국식 선종풍으로 만들어졌다. 중국을 비롯한 외국 문화에 자극을 받으면서, 교토와 가마쿠라로 나누어졌던 공가와 무가 세력은 이제 무로마치라는 ‘공간’에서 하나로 융합하기 시작되었다. 공가 사회는 점차 무가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무가도 공가 문화의 영향을 받아 서로 융합하게 되었다. 즉 무로마치라는 공간에서 무가와 공가가 하나로 융합함으로써 ‘공무융합’체제가 출현(당시 용어로는 公武一統)하였다.
      이러한 공무융합은 ‘무가의 공가화’ ‘공가의 무가화’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무가는 공가의 습속을 지향하고 공가는 무가의 양태를 본받아 이를 자신의 문화로 흡수해 나갔다. 특히 가마쿠라 후기이후 무로마치 초기 시기는 이러한 공무융합의 문화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남북조 시기 고다이고 천황을 비롯하여 공가가 직접 군사행동에 나서고 있는 것은 ‘공가의 무가화’ 현상이다. 고다이고 천황의 연호 겐무(建武)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천황(공가)도 무력을 중시했다.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서면 히노 가문(日野家)과 같이 귀족이면서도 유사시에 쇼군을 호위하고 경호하는 공가도 나타났다. 이들 공가는 무로마치 쇼군과 혼인관계를 맺기도 하는 등 이른바 무로마치 닐근중(昵近衆)의 신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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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가의 무가화’, ‘무가의 공가화’라는 현상을 핵심요소로 하여 형성된 무로마치 시기의 정치체제(‘공무체제’)는 오다·도요토미 정권의 출현으로 변화한다. 본 연구는 무로마치 국...

      ‘공가의 무가화’, ‘무가의 공가화’라는 현상을 핵심요소로 하여 형성된 무로마치 시기의 정치체제(‘공무체제’)는 오다·도요토미 정권의 출현으로 변화한다. 본 연구는 무로마치 국가체제의 핵심을 ‘공무체제’라는 새로운 개념을 규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중세 권문체제나 근세 막번체제와 같은 일본인들이 구축해 온 선행 연구의 분석틀이 아니라 외국사를 전공하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일본 중·근세 국가상을 재구축하려는데 있다. 물론 이러한 연구는 연구의 특성상 어느 일개인이 단기간에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연구 목표를 명확히 설정하여 중요한 기초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 개요는 다음과 같다.
      원정시기 주요 권문으로 구성된 정치체제는 가마쿠라 시기에 이르러 막부라는 무가정권이 실권을 장악함으로써 사실상 동(가마쿠라)‧서(교토)의 이원화된 정권으로 분화한다. 동국은 가마쿠라를 중심으로 무사가, 서국은 교토를 중심으로 공가와 사사가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처럼 이원화되어 있던 가마쿠라 시기의 ‘공무이원(公武二元)’의 정치 구조는 무로마치 시기 교토로 수도를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공무융합(公武融合)’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무로마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건립한 금각사(金閣寺)는 바로 이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금각사는 1층은 귀족풍 신젠쓰쿠리(寢殿造) 양식으로, 2층은 무가풍 쇼인쓰쿠리(書院造)로, 3층은 중국식 선종풍으로 만들어졌다. 중국을 비롯한 외국 문화에 자극을 받으면서, 교토와 가마쿠라로 나누어졌던 공가와 무가 세력은 이제 무로마치라는 ‘공간’에서 하나로 융합하기 시작되었다. 공가 사회는 점차 무가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무가도 공가 문화의 영향을 받아 서로 융합하게 되었다. 즉 무로마치라는 공간에서 무가와 공가가 하나로 융합함으로써 ‘공무융합’체제가 출현(당시 용어로는 公武一統)하였다.
      이러한 공무융합은 ‘무가의 공가화’ ‘공가의 무가화’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무가는 공가의 습속을 지향하고 공가는 무가의 양태를 본받아 이를 자신의 문화로 흡수해 나갔다. 특히 가마쿠라 후기이후 무로마치 초기 시기는 이러한 공무융합의 문화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남북조 시기 고다이고 천황을 비롯하여 공가가 직접 군사행동에 나서고 있는 것은 ‘공가의 무가화’ 현상이다. 고다이고 천황의 연호 겐무(建武)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천황(공가)도 무력을 중시했다.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서면 히노 가문(日野家)과 같이 귀족이면서도 유사시에 쇼군을 호위하고 경호하는 공가도 나타났다. 이들 공가는 무로마치 쇼군과 혼인관계를 맺기도 하는 등 이른바 무로마치 닐근중(昵近衆)의 신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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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ransformation and Structure of Noble-Warrior Synthesis-Reinterpretation of Japanese State-System in the Middle Ages and Early Modern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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