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KCI등재

      원간섭기 忠宣王妃 薊國大長公主의 위상 정립과 의미 = The Meaning and Definition of Status of Princess Gaegookdaejang, King Chungseon Wife, in Won Invasion Period

      한글로보기

      https://www.riss.kr/link?id=A104862099

      • 0

        상세조회
      • 0

        다운로드
      서지정보 열기
      • 내보내기
      • 내책장담기
      • 공유하기
      • 오류접수

      부가정보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rough the life of Princess Gaegookdaejnag, the status and meaning were found in the relationship between Won and Goryeo.
      The relationship between Won and Goryeo was consisted basically in the marriage bonding. Therefore the marriage bonding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relationship between Won and Goryeo.
      With these background of marriage bonding, the wife of King Chungsun, Princess Gaegookdaejnag came in Goryeo. But the country, Goryeo, was divided into the two powers in charge of having double succeeding the throne King CHungrul and Chungsun. That was suggested that the status of Princess Gaegookdaejnag was very recommended.
      The princess realized the importance of Won and Goryeo marriage bonding and showed the status of herself. Thus, the wife of King in Won dynasty could point the king in the meeting of Kuriltai and moreover, in the home the many wives in the polygamy stricltly ordered the hierarchy and displayed the status of herself. The princess Gaegookdaejnag systemized the shadow cabinets who was Chobi of the object. Because the Jobi’s farther was closed to Sejo and famous for the homan networks. Moreover, Jo In Kyu followed by Jagookdaejang showed the one of close relationship to King Chunsun.
      The mechanization of the princess Gaegookdaejnag intentionally weakened to the power of King Chunsun which was against of the false reflection of King Chunsun that he didn’t realized precisely the situation related to the princess Gaegookdaejnag. In order to remain of status, the marriage bonding strategy got strong. Therefore, King Chunsun actively reflected on the relationship between Won and Goryeo formed into the intermarriage in the restoration of himself.
      The accident of Jobi innocent resulted in the abdication of King Chungsun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wo of them was completely separated. After the accident, the couple was back to the Won dynasty. The King Chungrul used the couple’s relationship and this was attempt to the re-marriage of princess Gaegookdaejnag.
      The re-marriage was tried to three times in total. The princess attended actively, which she realized the importance of status in marriage bonding between Won and Goryeo and reflected on her will. Conversly, the re-marrigement was failed by the interruption of Won dynasty and Mujong of Won dynasty supported by King Chungsun.
      After the restoration of King Chungsun, the princess was well treated. This was showed that when the princess visited in Goryeo, she was well treated never happened before. However, she continuously tried to end the relationship to the King Chungsun. That wasn’t an apparent incident. On the way back to Won dynasty, She met Simyanggo and next year he got married with her nephew, a princess Naeryun. By this marriage the status of Simyanggo was highly addressed. The princess was dead at the same year. And the following year King Chungsun turned over the throne to Yanggo.
      번역하기

      Through the life of Princess Gaegookdaejnag, the status and meaning were found in the relationship between Won and Goryeo. The relationship between Won and Goryeo was consisted basically in the marriage bonding. Therefore the marriage bonding played ...

      Through the life of Princess Gaegookdaejnag, the status and meaning were found in the relationship between Won and Goryeo.
      The relationship between Won and Goryeo was consisted basically in the marriage bonding. Therefore the marriage bonding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relationship between Won and Goryeo.
      With these background of marriage bonding, the wife of King Chungsun, Princess Gaegookdaejnag came in Goryeo. But the country, Goryeo, was divided into the two powers in charge of having double succeeding the throne King CHungrul and Chungsun. That was suggested that the status of Princess Gaegookdaejnag was very recommended.
      The princess realized the importance of Won and Goryeo marriage bonding and showed the status of herself. Thus, the wife of King in Won dynasty could point the king in the meeting of Kuriltai and moreover, in the home the many wives in the polygamy stricltly ordered the hierarchy and displayed the status of herself. The princess Gaegookdaejnag systemized the shadow cabinets who was Chobi of the object. Because the Jobi’s farther was closed to Sejo and famous for the homan networks. Moreover, Jo In Kyu followed by Jagookdaejang showed the one of close relationship to King Chunsun.
      The mechanization of the princess Gaegookdaejnag intentionally weakened to the power of King Chunsun which was against of the false reflection of King Chunsun that he didn’t realized precisely the situation related to the princess Gaegookdaejnag. In order to remain of status, the marriage bonding strategy got strong. Therefore, King Chunsun actively reflected on the relationship between Won and Goryeo formed into the intermarriage in the restoration of himself.
      The accident of Jobi innocent resulted in the abdication of King Chungsun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wo of them was completely separated. After the accident, the couple was back to the Won dynasty. The King Chungrul used the couple’s relationship and this was attempt to the re-marriage of princess Gaegookdaejnag.
      The re-marriage was tried to three times in total. The princess attended actively, which she realized the importance of status in marriage bonding between Won and Goryeo and reflected on her will. Conversly, the re-marrigement was failed by the interruption of Won dynasty and Mujong of Won dynasty supported by King Chungsun.
      After the restoration of King Chungsun, the princess was well treated. This was showed that when the princess visited in Goryeo, she was well treated never happened before. However, she continuously tried to end the relationship to the King Chungsun. That wasn’t an apparent incident. On the way back to Won dynasty, She met Simyanggo and next year he got married with her nephew, a princess Naeryun. By this marriage the status of Simyanggo was highly addressed. The princess was dead at the same year. And the following year King Chungsun turned over the throne to Yanggo.

      더보기

      국문 초록 (Abstract)

      여원관계는 기본적으로 혼인동맹으로 이루어졌다. 쿠빌라이는 부마가 된 고려국왕이 동방3왕가를 견제하고, 이로써 원의 중앙집권체제에 일조를 하리라 생각하였다. 충선왕비 계국대장공주가 고려에 들어왔을 때, 고려는 충렬왕과 충선왕이라는 두 개의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점은 혼인동맹하에 있었던 계국대장공주의 위상이 매우 중요해졌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계국대장공주는 여원간의 혼인동맹의 중요성을 인지하여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충선왕은 자신도 원 쿠빌라이의 외손자로서 몽골적 자부심도 가지고 있는 인물이므로 계국대장공주를 혼인동맹으로 맺어진 대상으로 인지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혼인 초부터 부부관계는 매우 좋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계국대장공주는 자신의 입지에 위해가 될 후비군을 정리하였다. 원의 황후는 쿠릴타이 회의에서 황제를 지목할 수 있으며, 가정 내에서는 일부다처제로 이루어진 황후들을 엄격하게 서열화하여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여러 후비군 가운데 그 대상으로 조비가 되었다.
      공주의 조비무고사건은 충선왕의 세력을 의도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인데, 이는 혼인동맹에서 공주의 위상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충선왕에 대한 일정한 반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충선왕은 공주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국왕으로서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원공주를 통한 혼인관계를 적극적으로 유지ㆍ활용해야 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주의 이러한 도모는 충선왕의 퇴위까지 이르게 되면서 두 부부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았다. 이러한 부부관계를 충렬왕 세력이 적극적으로 이용하였고, 이것이 계국대장공주의 개가시도로 나타난 것이다.
      공주의 개가 시도는 총 3차례에 이루어진다. 공주는 이 개가시도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그것은 여원관계의 혼인동맹에서 자신의 위상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러한 의지가 적극적으로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각각의 개가시도는 주로 원의 상황에 의하여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리고 충선왕이 지지한 원의 무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공주의 바람은 실패로 끝났다.
      계국대장공주는 충숙왕 2년 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세자 왕고를 만났으며, 그 해 원에서 사망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자신의 조카 내륜공주와 왕고의 혼인이 이루어졌다. 이 혼인으로 왕고의 위상은 높아졌다. 그리고 그 해에 충선왕은 심왕 위를 왕고에게 물려주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볼 때 고려와 원의 통혼이 가지는 의미가 어떠한 것이며, 그 중심에 있었던 원 공주의 위상과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번역하기

      여원관계는 기본적으로 혼인동맹으로 이루어졌다. 쿠빌라이는 부마가 된 고려국왕이 동방3왕가를 견제하고, 이로써 원의 중앙집권체제에 일조를 하리라 생각하였다. 충선왕비 계국대장공...

      여원관계는 기본적으로 혼인동맹으로 이루어졌다. 쿠빌라이는 부마가 된 고려국왕이 동방3왕가를 견제하고, 이로써 원의 중앙집권체제에 일조를 하리라 생각하였다. 충선왕비 계국대장공주가 고려에 들어왔을 때, 고려는 충렬왕과 충선왕이라는 두 개의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점은 혼인동맹하에 있었던 계국대장공주의 위상이 매우 중요해졌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계국대장공주는 여원간의 혼인동맹의 중요성을 인지하여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충선왕은 자신도 원 쿠빌라이의 외손자로서 몽골적 자부심도 가지고 있는 인물이므로 계국대장공주를 혼인동맹으로 맺어진 대상으로 인지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혼인 초부터 부부관계는 매우 좋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계국대장공주는 자신의 입지에 위해가 될 후비군을 정리하였다. 원의 황후는 쿠릴타이 회의에서 황제를 지목할 수 있으며, 가정 내에서는 일부다처제로 이루어진 황후들을 엄격하게 서열화하여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여러 후비군 가운데 그 대상으로 조비가 되었다.
      공주의 조비무고사건은 충선왕의 세력을 의도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인데, 이는 혼인동맹에서 공주의 위상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충선왕에 대한 일정한 반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충선왕은 공주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국왕으로서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원공주를 통한 혼인관계를 적극적으로 유지ㆍ활용해야 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주의 이러한 도모는 충선왕의 퇴위까지 이르게 되면서 두 부부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았다. 이러한 부부관계를 충렬왕 세력이 적극적으로 이용하였고, 이것이 계국대장공주의 개가시도로 나타난 것이다.
      공주의 개가 시도는 총 3차례에 이루어진다. 공주는 이 개가시도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그것은 여원관계의 혼인동맹에서 자신의 위상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러한 의지가 적극적으로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각각의 개가시도는 주로 원의 상황에 의하여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리고 충선왕이 지지한 원의 무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공주의 바람은 실패로 끝났다.
      계국대장공주는 충숙왕 2년 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세자 왕고를 만났으며, 그 해 원에서 사망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자신의 조카 내륜공주와 왕고의 혼인이 이루어졌다. 이 혼인으로 왕고의 위상은 높아졌다. 그리고 그 해에 충선왕은 심왕 위를 왕고에게 물려주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볼 때 고려와 원의 통혼이 가지는 의미가 어떠한 것이며, 그 중심에 있었던 원 공주의 위상과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더보기

      참고문헌 (Reference)

      1 金惠苑, "麗元王室通婚의 成立과 特徵-元公主出身王妃의 家系를 중심으로" 24 : 1989

      2 金成俊, "한국여성문화논총" 이대출판부 1958

      3 尹銀淑, "쿠빌라이칸의 중앙집권화에 대한 東道諸王들의 대응―‘나얀 반란’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학회 8 : 2-52, 2003

      4 잭 웨더포드, "칭기스칸의 딸들, 제국을 경영하다" 책과 함께 2012

      5 고명수, "충렬왕대 怯憐口(怯怜口) 출신 관원 - 몽골-고려 통혼관계의 한 단면 -" 한국사학회 (118) : 233-270, 2015

      6 권순형, "원 공주 출신 왕비의 정치권력 연구-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를 중심으로-" 한국사학회 (77) : 33-63, 2005

      7 윤은숙, "몽골제국의 만주지배사-옷치긴 왕가의 만주 경영과 이성계의 조선 건국-" 소나무 2010

      8 이명미, "몽골 복속기 고려국왕 위상의 한 측면 -忠烈~忠宣王代 重祚를 중심으로-" 동국역사문화연구소 (54) : 125-171, 2013

      9 정용숙, "고려시대의 后妃" 민음사 1992

      10 이정란, "고려시대 后妃府에 대한 기초적 검토" 한국중세사학회 (20) : 55-94, 2006

      1 金惠苑, "麗元王室通婚의 成立과 特徵-元公主出身王妃의 家系를 중심으로" 24 : 1989

      2 金成俊, "한국여성문화논총" 이대출판부 1958

      3 尹銀淑, "쿠빌라이칸의 중앙집권화에 대한 東道諸王들의 대응―‘나얀 반란’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학회 8 : 2-52, 2003

      4 잭 웨더포드, "칭기스칸의 딸들, 제국을 경영하다" 책과 함께 2012

      5 고명수, "충렬왕대 怯憐口(怯怜口) 출신 관원 - 몽골-고려 통혼관계의 한 단면 -" 한국사학회 (118) : 233-270, 2015

      6 권순형, "원 공주 출신 왕비의 정치권력 연구-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를 중심으로-" 한국사학회 (77) : 33-63, 2005

      7 윤은숙, "몽골제국의 만주지배사-옷치긴 왕가의 만주 경영과 이성계의 조선 건국-" 소나무 2010

      8 이명미, "몽골 복속기 고려국왕 위상의 한 측면 -忠烈~忠宣王代 重祚를 중심으로-" 동국역사문화연구소 (54) : 125-171, 2013

      9 정용숙, "고려시대의 后妃" 민음사 1992

      10 이정란, "고려시대 后妃府에 대한 기초적 검토" 한국중세사학회 (20) : 55-94, 2006

      11 이개석, "고려-대원 관계 연구" 지식산업사 2013

      12 森平雅彦, "高麗王家とモンゴル皇族の通婚關係に關する覺書" 67 (67): 2008

      13 "高麗史節要"

      14 "高麗史"

      15 李益柱, "高麗ㆍ元 관계의 構造와 高麗後期 政治體制" 서울대학교 1996

      16 李命美, "高麗ㆍ元 王室通婚의 政治的 의미" 49 : 2003

      17 森平雅彦, "駙馬高麗國王の成立-元朝における高麗王の地位について豫備的考察" 79 (79): 1998

      18 閔賢九, "韓國史 8" 국사편찬위원회 1974

      19 閔賢九, "趙仁規와 그의 家門(中)" 43 : 1977

      20 閔賢九, "趙仁規와 그의 家門(上)" 42 : 1976

      21 周志鋒, "試論蒙元時期皇后的政治活動及其影響" 72 : 2003

      22 王鵬, "蒙元后妃生活考" 西南大學 2008

      23 堀江雅明, "東方學論集 : 小野勝年博士頌寿記念" 龍谷大學東洋史學硏究會 1982

      24 이정란, "忠烈王妃 齊國大長公主의 冊封과 그 의미" (사)한국인물사연구회 (18) : 117-154, 2012

      25 이정란, "忠烈王代 薊國大長公主의 改嫁運動" (사)한국인물사연구회 (9) : 103-143, 2008

      26 이정신, "忠宣王의 요동회복 의지와 高麗王·瀋王의 분리 임명" (사)한국인물사연구회 (21) : 291-322, 2014

      27 靑木富太郞, "古代蒙古の婦人の家庭內における地位ㆍ權力" 國書刊行會 1 : 1964

      28 "元史"

      29 野口周一, "中國史における亂の構圖" 雄山閣出版 1986

      30 森平雅彦, "モンゴル覇權下の高麗" 名古屋大學出版會 2013

      31 岩村忍, "モンゴル社會經濟史の硏究" 京都大學人文科學硏究所 1968

      32 김현라, "【연구논문】 고려 충렬왕비 齊國大長公主의 위상과 역할" 부경역사연구소 (23) : 71-100, 2008

      33 李玠奭, "14世紀 初 元朝支配體制의 再編과 그 背景" 서울대학교 1998

      더보기

      분석정보

      View

      상세정보조회

      0

      Usage

      원문다운로드

      0

      대출신청

      0

      복사신청

      0

      EDDS신청

      0

      동일 주제 내 활용도 TOP

      더보기

      주제

      연도별 연구동향

      연도별 활용동향

      연관논문

      연구자 네트워크맵

      공동연구자 (7)

      유사연구자 (20) 활용도상위20명

      인용정보 인용지수 설명보기

      학술지 이력

      학술지 이력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6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12-02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지역과역사 -> 지역과 역사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2008-01-01 평가 신청제한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7-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2차) KCI등재후보
      2006-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5-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3-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더보기

      학술지 인용정보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1 1 0.75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81 0.74 1.558 0.2
      더보기

      이 자료와 함께 이용한 RISS 자료

      나만을 위한 추천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