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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淸末(1825~1911) 安徽省의 豐備義倉 설립과 救濟食糧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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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청대 자연재해 등의 요인에 의한 수확량 감소에 대비하기 위한 진제창은 상평창, 사창, 의창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런데 18세기 이후 각 창저의 형해화와 기능의 쇠퇴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었는데, 도광3년(1825) 안휘순무 도주가 제안한 풍비의창은 기존 창저의 결점을 보완 내지는 대체하기 위한 대책의 일환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기존 창곡시스템의 적폐 중 가장 심각한 것은 관의 개입문제였으며, 풍비의창은 관의 개입을 최소화(내지는 차단)시켜 민간 자율적 운영을 강조한 것이었다. 또한 기존 의창이 주로 시진에 1개소가 설치된 것에 비해, 풍비의창은 그 설립위치가 더욱 세밀화되어 거주민의 편의성과 지역적 편의성을 고려한 것이었다. 특히 엄격한 규칙 제정을 통해 창곡의 출납에 지방관의 개입을 원천적으로 불허함으로써, 기존 창곡 관리상의 문제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더욱이 봄에 대여하고 가을에 1할의 이자를 받아 회수하지 않고, 오로지 식량부족 시에만 방출하게 함으로써 창곡 본래의 기능을 담보했다. 그런데 도광연간 이후인 함풍연간 태평천국의 전란을 거치면서, 안휘성 뿐만 아니라 여타 성의 창곡시스템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따라서 내란 평정 이후, 붕괴된 창곡을 재건하는 일은 국가의 중차대한 과제였는데, 광서초년 화북지역에서 발생한 대한발(‘정무기황’)을 계기로 창곡 재건은 본격화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관치적 성격의 상평창에 대한 복구 논의는 거의 보이지 않는 반면에, 대부분 의창․사창 위주의 재건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그중 도광연간 안휘순무 도주의 풍비의창이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었다. 결국 상평창 보다 의․사창의 복구를 강조한 것은, 가경 이후 각성에서 나타나는 의창 설립의 증가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국가 주도의 구제식량 확보보다 민간 자치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광서연간 이후 안휘성 각지에서 설립된 풍비의창을 보면, 민간 자율적(자치적) 운영과는 상이한 현상이 발견된다. 주로 관의 주도로 풍비의창이 설치된 지역이 많았고, 이후 설치지역 엘리트층과의 협력관계 구축으로 변화한 곳도 있었다.
      그런데 광서연간 이후 재건된 의창을 기존 의창과 비교해보면, 기존 의창이 시진(혹은 향촌)에 1개소가 설치된 것과 달리 풍비의창처럼 보다 세밀하게 설치되고 있었고, 창곡의 확보에서 운영․구제대상과 방법에서 기존 의창보다 풍비의창에 근접한 것이 많았다. 기존 연구는 풍비의창 설치 이후(혹은 재건 이후), 실제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풍비의창곡이 어느 정도의 구제효과를 발휘했는지에 대한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기존 연구의 공백과 한계를 보완하고, 청말 국가에 의한 구제식량 확보 정책의 일환으로써 재건된 풍비의창에 관해서, 시기적으로는 도광연간~광서․선통연간을 통시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풍비의창의 전체적인 흐름과 변화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고, 아울러 앞서 언급했듯이 왜 풍비의창이 대안으로 제시되었고, 이것이 구제식량 확보에 어느 정도 기능을 수행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민간 역량 동원의 강화라는 본래의 취지와 달리, 관 주도성이 현저하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지 그리고 재건 과정 중 현지 엘리트층과 관의 역학관계는 어떻게 형성․변화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한편 광서연간 풍비의창과 함께 복구된 의창을 보면, 풍비의창에 가까운 성격의 의창이 다수 존재하는 것 같다. 따라서 기존 의창, 재건된 의창, 그리고 풍비의창-풍비의창도 도광연간의 풍비의창과 광서연간 재건된 풍비의창을 비교-을 비교․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재건된 의창을 풍비의창으로 볼 수 있다면, 청말 창곡정책의 뚜렷한 변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구제의 실제적인 효과를 살펴보기 위해, 풍비의창에 비축된 곡식을 각 주현의 인구수와 대비시켜 보고, 청대 각 창고의 1인당 평균 비축량과 비교해봄으로써 그 실질적 구제 기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실제 재해발생 시, 풍비의창곡 방출을 통한 사례를 확인해봄으로써, 그 구제기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건륭 후반기부터 이미 창곡의 현금비축 경향이 나타났으며, 가경․도광연간 및 광서연간에도 현금비축 경향에 대한 비판 여론이 확산되고 있었는데, 과연 광서연간 풍비의창 재건 시, 그러한 문제점이 어느 정도 개선되었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청말 창곡시스템의 결점을 보완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제시된 풍비의창을 살펴봄으로써, 국가의 비상식량 수급정책의 변화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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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대 자연재해 등의 요인에 의한 수확량 감소에 대비하기 위한 진제창은 상평창, 사창, 의창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런데 18세기 이후 각 창저의 형해화와 기능의 쇠퇴 현상이 뚜렷해지고...

      청대 자연재해 등의 요인에 의한 수확량 감소에 대비하기 위한 진제창은 상평창, 사창, 의창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런데 18세기 이후 각 창저의 형해화와 기능의 쇠퇴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었는데, 도광3년(1825) 안휘순무 도주가 제안한 풍비의창은 기존 창저의 결점을 보완 내지는 대체하기 위한 대책의 일환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기존 창곡시스템의 적폐 중 가장 심각한 것은 관의 개입문제였으며, 풍비의창은 관의 개입을 최소화(내지는 차단)시켜 민간 자율적 운영을 강조한 것이었다. 또한 기존 의창이 주로 시진에 1개소가 설치된 것에 비해, 풍비의창은 그 설립위치가 더욱 세밀화되어 거주민의 편의성과 지역적 편의성을 고려한 것이었다. 특히 엄격한 규칙 제정을 통해 창곡의 출납에 지방관의 개입을 원천적으로 불허함으로써, 기존 창곡 관리상의 문제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더욱이 봄에 대여하고 가을에 1할의 이자를 받아 회수하지 않고, 오로지 식량부족 시에만 방출하게 함으로써 창곡 본래의 기능을 담보했다. 그런데 도광연간 이후인 함풍연간 태평천국의 전란을 거치면서, 안휘성 뿐만 아니라 여타 성의 창곡시스템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따라서 내란 평정 이후, 붕괴된 창곡을 재건하는 일은 국가의 중차대한 과제였는데, 광서초년 화북지역에서 발생한 대한발(‘정무기황’)을 계기로 창곡 재건은 본격화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관치적 성격의 상평창에 대한 복구 논의는 거의 보이지 않는 반면에, 대부분 의창․사창 위주의 재건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그중 도광연간 안휘순무 도주의 풍비의창이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었다. 결국 상평창 보다 의․사창의 복구를 강조한 것은, 가경 이후 각성에서 나타나는 의창 설립의 증가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국가 주도의 구제식량 확보보다 민간 자치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광서연간 이후 안휘성 각지에서 설립된 풍비의창을 보면, 민간 자율적(자치적) 운영과는 상이한 현상이 발견된다. 주로 관의 주도로 풍비의창이 설치된 지역이 많았고, 이후 설치지역 엘리트층과의 협력관계 구축으로 변화한 곳도 있었다.
      그런데 광서연간 이후 재건된 의창을 기존 의창과 비교해보면, 기존 의창이 시진(혹은 향촌)에 1개소가 설치된 것과 달리 풍비의창처럼 보다 세밀하게 설치되고 있었고, 창곡의 확보에서 운영․구제대상과 방법에서 기존 의창보다 풍비의창에 근접한 것이 많았다. 기존 연구는 풍비의창 설치 이후(혹은 재건 이후), 실제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풍비의창곡이 어느 정도의 구제효과를 발휘했는지에 대한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기존 연구의 공백과 한계를 보완하고, 청말 국가에 의한 구제식량 확보 정책의 일환으로써 재건된 풍비의창에 관해서, 시기적으로는 도광연간~광서․선통연간을 통시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풍비의창의 전체적인 흐름과 변화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고, 아울러 앞서 언급했듯이 왜 풍비의창이 대안으로 제시되었고, 이것이 구제식량 확보에 어느 정도 기능을 수행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민간 역량 동원의 강화라는 본래의 취지와 달리, 관 주도성이 현저하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지 그리고 재건 과정 중 현지 엘리트층과 관의 역학관계는 어떻게 형성․변화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한편 광서연간 풍비의창과 함께 복구된 의창을 보면, 풍비의창에 가까운 성격의 의창이 다수 존재하는 것 같다. 따라서 기존 의창, 재건된 의창, 그리고 풍비의창-풍비의창도 도광연간의 풍비의창과 광서연간 재건된 풍비의창을 비교-을 비교․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재건된 의창을 풍비의창으로 볼 수 있다면, 청말 창곡정책의 뚜렷한 변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구제의 실제적인 효과를 살펴보기 위해, 풍비의창에 비축된 곡식을 각 주현의 인구수와 대비시켜 보고, 청대 각 창고의 1인당 평균 비축량과 비교해봄으로써 그 실질적 구제 기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실제 재해발생 시, 풍비의창곡 방출을 통한 사례를 확인해봄으로써, 그 구제기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건륭 후반기부터 이미 창곡의 현금비축 경향이 나타났으며, 가경․도광연간 및 광서연간에도 현금비축 경향에 대한 비판 여론이 확산되고 있었는데, 과연 광서연간 풍비의창 재건 시, 그러한 문제점이 어느 정도 개선되었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청말 창곡시스템의 결점을 보완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제시된 풍비의창을 살펴봄으로써, 국가의 비상식량 수급정책의 변화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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