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근대계몽기 지식인 창강 김택영(1850-1927)의 송도(개성) 복원 작업의 의미를 그려본 스케치이다. 한말 4대 문장가 가운데 하나인 김택영은 송도 출신의 사람이다. 그는 전생애에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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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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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근대계몽기 지식인 창강 김택영(1850-1927)의 송도(개성) 복원 작업의 의미를 그려본 스케치이다. 한말 4대 문장가 가운데 하나인 김택영은 송도 출신의 사람이다. 그는 전생애에 걸쳐 송도에 대하여 다양하게 조망하면서, 송도를 역사와 문화의 공간으로 복원시키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찾기 위하여 그의 디아스포라적 처지, 즉 외적으로 국경을 넘어 고향을 이탈하고, 내적(국내, 정신적)으로도 정착처를 찾지 못한 채 주변부를 떠돌았던 유민(流民)의 상황을 주목하고자 한다. ‘유민’이란 실제모습이면서도 하나의 메타포어이다. 즉 본고는 ‘유민’ 혹은 ‘디아스포라’를 주변적 존재로서 중심을 바라보면서, 새롭게 역사와 현실을 바라보는 상황 혹은 기회, 시각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디아스포라’를 해외로 이산(離散)한 것으로만 보지 않는다.
김택영은 자신의 디아스포라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송도’에 주목하였다. 그는 <숭양기구전(崧陽耆舊傳)>과 <숭양기구시집(崧陽耆舊詩集)>을 통하여 조선의 송도출신 지식인들의 상식화된 송도에 대한 생각이 ‘편견’에 지나지 않았음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송도를 기억하며 노래하는 조선 지식인(비송도인)들은 송도를 망국을 회고하는 공간과 상인의 고장으로 기억하고 재현했다. 서거정의 <송도회고>시나 신흠의 <송도>를 보면 번화했던 송도가 풀만 무성하고, 인걸은 온데간데 없는 쓸쓸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송도인 차천로의 <만월대>나 한재렴의 <중경회고>시를 보면, 수심어린 화면이 생명이 약동하는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즉 송도지식인들에 의해 그려진 송도는 비록 옛왕조의 고도라는 한계 속에서도 나름의 생명력을 갖고 있는 삶의 공간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흔히 ‘송상’으로 기억되는 송도인의 사회생활은 조선이 건국되면서부터 특별관리되며 정치적, 사회적으로 억압받았던 데서 유래한 피치못할 생존방법이었다. 그들의 ‘자랑찬 역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이것은 송도인들이 구한말의 묘지명에조차 쓰기를 꺼려할 정도로 꺼리는 것이었다. 신정(申晸)의 <송도고객가(松都賈客歌)>에서 보듯, 조선의 지식인들은 악착같이 멀리까지 가서 돈을 벌어오는 모습에 집착할 뿐이다. 하지만 김택영은 <최순성전>을 통하여 남을 위해 산재(散財)할 수 있는 인격의 소유자상을 드러내며, 장사치에 가려진 송도인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송도인은 인격과 감정을 갖춘 사람으로 복원된 것이다.
다시 말해 김택영은 <崧陽耆舊傳>을 통해 이웃을 배려하며 다양한 재능을 가진 따스한 송도의 사람을 복원하고, <崧陽耆舊詩集>을 통해 송도인의 감성을 하나하나 재생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앙상하고 각박한 송도를 역사와 문화, 사람의 공간으로 재현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창강에게 송도는 ‘목적’ 자체가 아니라 하나의 ‘방법(시각)’이었다. 무엇보다 정신을 재생하는 데에, 특히 다른 모든 수단이 힘을 잃었을 경우 개인의 존엄성과 신념을 긍정해주는 힘이었다. 즉 이를 통하여 창강은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지나온 역사를 되짚어보며, 지금의 현실을 새롭게 읽을 수 있었다. 공간차원에서 지역의 눈으로 중심(중앙)을 바라볼 수 있었고, 권력차원에서 신분적 소수자의 눈으로 문벌세도가의 실상을 읽을 수 있었으며, 역사차원에서 고려의 입장에서 조선을 새롭게 조망할 수 있었다. 중국 남통(南通)으로 건너간 뒤에도 끊임없이 송도에 대한 담론과 정서를 환기시켰던 이유도, 송도가 지닌 특징들, 즉 역사적으로 고려의 왕도로서 현실적으로 소외된 주변부라는 것 때문이었다. 실제 창강은 1905년 이후, 56세 망명자가 수행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책을 간행해내고 있다.(부록 참조) 그는 송도에 살면서도 잊혀졌던(상실되었던) 송도를 되찾기 위해 송도의 인물과 시들을 정성껏 모았고, 중국 남통에 살면서 상실한(실질적으로) 조국 한(韓,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부여잡기 위해 노력했다. 창강에게 ‘디아스포라(고향상실)’는 새로운 시야를 가능하게 한 고마운 선물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