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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월회」 연극의 근대성과 전근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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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1) 평준화 지향과 서구 근대극의 세계로 편입
      「토월회」의 시작은 도쿄 유학생들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유학 청년들은 급속도로 진행되어 가는 일본의 근대화를 직접 경험하였고, 그 결과 서구적 근대화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강했다. 스스로를 타자화한 「토월회」의 주축들은 서구 근대극의 세계로 편입만이 식민지 조선의 연극을 발전시키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다. 1923년 「토월회」의 첫 공연에 버나드 쇼(Bernard Shaw), 체홉(A. Chekhov), 톨스토이(Tolstoy), 유진 피롯(Eugene Pilot) 등 서구 근대극 거장들의 작품을 선택한 이유도 그들의 평준화 지향 때문이다. 그러나 「토월회」의 주축들은 서구 근대극을 공연하는 것이 서구적 근대극의 세계로 편입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사실 그들은 서구적 근대화에 의해 강제되고 있었던 것이다. 「토월회」의 주축들은 서양을 전범으로 하는 장치(apparatus)와 제도(system)를 구성함으로써, 서양적 개화를 따르지 않는 세력을 비정상적 주체로 억압하여 격리하는 강제력을 행사하였다. 그 결과 「토월회」의 연극과 관객의 정서 사이에 거리가 생겨나게 되었다.
      2) 동류화 지향과 일본 근대극의 자기화
      1920년대 연극인 중에서 근대극의 정의를 가장 선명하게 내린 이는 바로 김우진이다. 그는 「소위 근대극에 대하여」(1921)에서 “근대극은, 결국은 인류의 영혼의 해방 구제를 사명으로 하야, 교련(敎鍊) 있고 수완 있는 예술적 지배자의 극적 표현을 중심으로 하야, 또 사회적 민중의 교화와 오락을 목적으로 하야 인류의 공동생활에 공헌하는 데 그 의미의 전적(全的)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78쪽)고 했다. 김우진의 주장은 선명하긴 하지만, 그가 이것을 식민지 조선에서 관철시키려면 지난한 길을 걸어야 했을 것이다. 김우진이 극 창작만 했을 뿐 실제 공연활동에 발을 딛지 않았던 이유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토월회」의 주축들은 평준화 지향에서 동류화 지향으로 방향을 선회함으로써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연극 공연은 근대의 유명 작가의 작품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극장에서부터 관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도적 변화를 수반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토월회」의 주축들은 일본의 근대극운동을 모방함으로써 일본의 경험을 자기화하려 한 것이다. <카츄샤>(1924.2)와 <카르맨>(1924.5) 뿐만 아니라, 에이레의 극작가 던세니(Dunsany)의 <산신>을 일본의 쿠메 마사오(久米正雄)가 번안하여 공연한 작품을 다시 번안한 <지장교의 유래>(1924.6)같은 작품이 그 예가 된다. 그러나 일본의 근대극을 자기화 함으로써 식민지 조선의 근대극을 정착 시켜보려는 시도는 ‘위장된 평준화’에 빠져드는 결과를 낳았다.
      3) 고유화 지향과 식민지 조선의 근대극 시도
      「토월회」 주축 연극인들의 고유화 지향은 서구적 근대극 자체를 부정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서구적 근대극으로는 식민지 조선의 연극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자각에 기초하고 있는데, 식민지 조선의 정치사회적 특성과 문화적 특성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토월회」 공연 작품 중에서 관객은 많이 모았으나 당대 평단으로부터는 혹평을 얻었던 작품들이 대체로 여기에 속한다. 예를 들어 박승희의 <이 대감 망할 대감>(1928.10), <아리랑>(1929.11) 등이다. 임화는 <이 대감 망할 대감>에 대해 춘원 이광수 류의 작품이라 비판하면서 “작가겸 연출자인 박승희군의 두개골을 열고 지금은 1928년의 조선이란 일구(一句)를 새겨 넣어 주고 싶다”(「토월회 제57회 공연을 보고」, 83쪽)고 했다. 「토월회」의 연극과 관객의 거리는 아주 가까워졌지만, 반대로 비평가들과의 거리는 멀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일본에 종속된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과정에서 고유화 지향은 언제나 위태롭다. 평준화 지향, 동류화 지향과 함께 헤게모니 투쟁을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1932년 「토월회」가 해산할 때까지 많은 작품들은 고유화 지향의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때로는 근대성을 반영하기도 했으나 때로는 전근대성에 매몰된 작품도 많이 나왔다. 관객은 물론이고 임검 순경까지도 울었다는 박진의 증언(󰡔한국연극사󰡕, 184쪽)이 있는 <아리랑>은 근대성과 전근대성이 착종된 좋은 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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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준화 지향과 서구 근대극의 세계로 편입 「토월회」의 시작은 도쿄 유학생들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유학 청년들은 급속도로 진행되어 가는 일본의 근대화를 직접 경험하였고, ...

      1) 평준화 지향과 서구 근대극의 세계로 편입
      「토월회」의 시작은 도쿄 유학생들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유학 청년들은 급속도로 진행되어 가는 일본의 근대화를 직접 경험하였고, 그 결과 서구적 근대화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강했다. 스스로를 타자화한 「토월회」의 주축들은 서구 근대극의 세계로 편입만이 식민지 조선의 연극을 발전시키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다. 1923년 「토월회」의 첫 공연에 버나드 쇼(Bernard Shaw), 체홉(A. Chekhov), 톨스토이(Tolstoy), 유진 피롯(Eugene Pilot) 등 서구 근대극 거장들의 작품을 선택한 이유도 그들의 평준화 지향 때문이다. 그러나 「토월회」의 주축들은 서구 근대극을 공연하는 것이 서구적 근대극의 세계로 편입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사실 그들은 서구적 근대화에 의해 강제되고 있었던 것이다. 「토월회」의 주축들은 서양을 전범으로 하는 장치(apparatus)와 제도(system)를 구성함으로써, 서양적 개화를 따르지 않는 세력을 비정상적 주체로 억압하여 격리하는 강제력을 행사하였다. 그 결과 「토월회」의 연극과 관객의 정서 사이에 거리가 생겨나게 되었다.
      2) 동류화 지향과 일본 근대극의 자기화
      1920년대 연극인 중에서 근대극의 정의를 가장 선명하게 내린 이는 바로 김우진이다. 그는 「소위 근대극에 대하여」(1921)에서 “근대극은, 결국은 인류의 영혼의 해방 구제를 사명으로 하야, 교련(敎鍊) 있고 수완 있는 예술적 지배자의 극적 표현을 중심으로 하야, 또 사회적 민중의 교화와 오락을 목적으로 하야 인류의 공동생활에 공헌하는 데 그 의미의 전적(全的)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78쪽)고 했다. 김우진의 주장은 선명하긴 하지만, 그가 이것을 식민지 조선에서 관철시키려면 지난한 길을 걸어야 했을 것이다. 김우진이 극 창작만 했을 뿐 실제 공연활동에 발을 딛지 않았던 이유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토월회」의 주축들은 평준화 지향에서 동류화 지향으로 방향을 선회함으로써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연극 공연은 근대의 유명 작가의 작품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극장에서부터 관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도적 변화를 수반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토월회」의 주축들은 일본의 근대극운동을 모방함으로써 일본의 경험을 자기화하려 한 것이다. <카츄샤>(1924.2)와 <카르맨>(1924.5) 뿐만 아니라, 에이레의 극작가 던세니(Dunsany)의 <산신>을 일본의 쿠메 마사오(久米正雄)가 번안하여 공연한 작품을 다시 번안한 <지장교의 유래>(1924.6)같은 작품이 그 예가 된다. 그러나 일본의 근대극을 자기화 함으로써 식민지 조선의 근대극을 정착 시켜보려는 시도는 ‘위장된 평준화’에 빠져드는 결과를 낳았다.
      3) 고유화 지향과 식민지 조선의 근대극 시도
      「토월회」 주축 연극인들의 고유화 지향은 서구적 근대극 자체를 부정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서구적 근대극으로는 식민지 조선의 연극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자각에 기초하고 있는데, 식민지 조선의 정치사회적 특성과 문화적 특성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토월회」 공연 작품 중에서 관객은 많이 모았으나 당대 평단으로부터는 혹평을 얻었던 작품들이 대체로 여기에 속한다. 예를 들어 박승희의 <이 대감 망할 대감>(1928.10), <아리랑>(1929.11) 등이다. 임화는 <이 대감 망할 대감>에 대해 춘원 이광수 류의 작품이라 비판하면서 “작가겸 연출자인 박승희군의 두개골을 열고 지금은 1928년의 조선이란 일구(一句)를 새겨 넣어 주고 싶다”(「토월회 제57회 공연을 보고」, 83쪽)고 했다. 「토월회」의 연극과 관객의 거리는 아주 가까워졌지만, 반대로 비평가들과의 거리는 멀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일본에 종속된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과정에서 고유화 지향은 언제나 위태롭다. 평준화 지향, 동류화 지향과 함께 헤게모니 투쟁을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1932년 「토월회」가 해산할 때까지 많은 작품들은 고유화 지향의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때로는 근대성을 반영하기도 했으나 때로는 전근대성에 매몰된 작품도 많이 나왔다. 관객은 물론이고 임검 순경까지도 울었다는 박진의 증언(󰡔한국연극사󰡕, 184쪽)이 있는 <아리랑>은 근대성과 전근대성이 착종된 좋은 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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