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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골제의 축조와 변화 = The Construction and the Changes of Byeokgol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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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6154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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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Discussion about Byeokgolje has recently been actively conducted. Thanks to that discussion should check the validity of the existing discussion, as well as saw revealed some new facts. First, I find new historical data in the 『Donggukyisanggukjip(東國李相國集)』 not been cited so far on byeokgolje . In this new historical data I found the article that Byeokgolji was built in 『Sillaki(新羅記)』 . 『Sillaki』 was the book that was compiled in Koryeo. 『Sillaki』 was the specialized publications about the history of Silla. The first record that Byeokgolji was built in Silla was written in 『Sillaki』. Those who compiled the 『Samguksagi』 was merely just quoted the record in 『Sillaki』.
      The first time when Byeokgolje was built seems to becoming increasingly established in 330, depending on the excavation progresses. Rather, the problem is the feeling that the subject has been changed to who was built the first time. I thought the Baekje central government entities in the construction so far, the new theory that Mahan forces were built. The debate is expected to be connected to when the central power of Baekje combined with Mahan, is develping to the future.
      I saw the look of Byeokgolje when the first time byeokgolje was built roughly drawn. The first Byeokgolje has been constructed with a length of byeokgolje existing at the time, and it is estimated to increase considerably low than now. King Wonseong wouldl built into the existing height at the time of enlargement, then the five floodgates were estimated to have been created. The drainage of the first Byeokgolje was estimated using the drainage hole.
      The first function of Byeokgolje was the embankment, was additionally identified the function of the reservoir. However, since the repair of the Taejong it has been seen primarily as a function of reservoir. After Taejong built a embankment in taegeukpo, the function of Byeokgolje had been changed as a reservoir. Tegeukpo prevent the reversal of the sea-water directly. West Coast is great difference between the tides. Therefore, many dikes built on the west coast has dual functions of the reservoir and the embank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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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scussion about Byeokgolje has recently been actively conducted. Thanks to that discussion should check the validity of the existing discussion, as well as saw revealed some new facts. First, I find new historical data in the 『Donggukyisanggukjip(...

      Discussion about Byeokgolje has recently been actively conducted. Thanks to that discussion should check the validity of the existing discussion, as well as saw revealed some new facts. First, I find new historical data in the 『Donggukyisanggukjip(東國李相國集)』 not been cited so far on byeokgolje . In this new historical data I found the article that Byeokgolji was built in 『Sillaki(新羅記)』 . 『Sillaki』 was the book that was compiled in Koryeo. 『Sillaki』 was the specialized publications about the history of Silla. The first record that Byeokgolji was built in Silla was written in 『Sillaki』. Those who compiled the 『Samguksagi』 was merely just quoted the record in 『Sillaki』.
      The first time when Byeokgolje was built seems to becoming increasingly established in 330, depending on the excavation progresses. Rather, the problem is the feeling that the subject has been changed to who was built the first time. I thought the Baekje central government entities in the construction so far, the new theory that Mahan forces were built. The debate is expected to be connected to when the central power of Baekje combined with Mahan, is develping to the future.
      I saw the look of Byeokgolje when the first time byeokgolje was built roughly drawn. The first Byeokgolje has been constructed with a length of byeokgolje existing at the time, and it is estimated to increase considerably low than now. King Wonseong wouldl built into the existing height at the time of enlargement, then the five floodgates were estimated to have been created. The drainage of the first Byeokgolje was estimated using the drainage hole.
      The first function of Byeokgolje was the embankment, was additionally identified the function of the reservoir. However, since the repair of the Taejong it has been seen primarily as a function of reservoir. After Taejong built a embankment in taegeukpo, the function of Byeokgolje had been changed as a reservoir. Tegeukpo prevent the reversal of the sea-water directly. West Coast is great difference between the tides. Therefore, many dikes built on the west coast has dual functions of the reservoir and the embank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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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벽골제에 대한 논의는 최근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 논의에 힘입어 기존 논의의 타당성을 확인해보고, 아울러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밝혀 보았다. 먼저 벽골제에 관한 지금까지 인용되지 않았던 새로운 史料인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자료를 찾아 인용하였다. 이 사료에서 『신라기』에 벽골지를 축조하였다는 기사를 찾았다. 『신라기』는 고려때 편찬된 신라에 관한 기록으로 독립된 서적으로 존재하였음을 밝혔다. 이 『신라기』에서부터 벽골지가 신라에 의해 축조되었다고 파악하고 있다. 『삼국사기』 찬자들이 벽골지 축조를 신라본기에 실은 것도 찬자들의 판단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신라기』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했었던 것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벽골제의 초축 시기는 발굴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330년으로 점차 확정되어가는 듯하다. 오히려 문제는 초축 주체가 누구였을까로 변화되고 있는 느낌이다. 지금까지는 백제 중앙정부를 축조 주체로 생각했었는데, 마한세력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 논쟁은 백제의 중앙권력이 마한을 언제 병합했을까라는 지난한 문제와 연결되어 앞으로 흥미진진한 논의가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벽골제의 초축 모습을 대략 그려보았다. 벽골제는 초축 당시에도 현존하는 벽골제의 길이로 축조되었을 것이나, 높이는 지금보다는 상당히 낮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성왕 증축 당시에 현존하는 높이로 쌓았을 것이며, 그때 5개의 수문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초축 당시의 배수는 배수구를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벽골제의 기능은 초축 당시에는 방조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부가적으로 저수지의 기능을 겸했다고 파악하였다. 그러나 조선 태종의 중수 이후에는 주로 저수지의 기능으로 전환되었다고 보았다. 그 근거로 조선 태종의 중수비에 보이는 대극포를 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벽골제 서북쪽에 보이는 태극포로 추정하면서, 태극포에 방조제를 쌓은 이후 벽골제의 기능이 전환되었을 것으로 제시하였다. 기존의 견해에서는 대극포를 수여거로 파악하여 벽골제 기능의 전환 시점을 명확하게 하지 못하였다. 아울러 서해안에 쌓아진 많은 제방은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안의 특성을 감안하여 방조제와 저수지의 기능을 겸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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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골제에 대한 논의는 최근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 논의에 힘입어 기존 논의의 타당성을 확인해보고, 아울러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밝혀 보았다. 먼저 벽골제에 관한 지금까지 인용되...

      벽골제에 대한 논의는 최근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 논의에 힘입어 기존 논의의 타당성을 확인해보고, 아울러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밝혀 보았다. 먼저 벽골제에 관한 지금까지 인용되지 않았던 새로운 史料인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자료를 찾아 인용하였다. 이 사료에서 『신라기』에 벽골지를 축조하였다는 기사를 찾았다. 『신라기』는 고려때 편찬된 신라에 관한 기록으로 독립된 서적으로 존재하였음을 밝혔다. 이 『신라기』에서부터 벽골지가 신라에 의해 축조되었다고 파악하고 있다. 『삼국사기』 찬자들이 벽골지 축조를 신라본기에 실은 것도 찬자들의 판단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신라기』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했었던 것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벽골제의 초축 시기는 발굴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330년으로 점차 확정되어가는 듯하다. 오히려 문제는 초축 주체가 누구였을까로 변화되고 있는 느낌이다. 지금까지는 백제 중앙정부를 축조 주체로 생각했었는데, 마한세력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 논쟁은 백제의 중앙권력이 마한을 언제 병합했을까라는 지난한 문제와 연결되어 앞으로 흥미진진한 논의가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벽골제의 초축 모습을 대략 그려보았다. 벽골제는 초축 당시에도 현존하는 벽골제의 길이로 축조되었을 것이나, 높이는 지금보다는 상당히 낮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성왕 증축 당시에 현존하는 높이로 쌓았을 것이며, 그때 5개의 수문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초축 당시의 배수는 배수구를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벽골제의 기능은 초축 당시에는 방조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부가적으로 저수지의 기능을 겸했다고 파악하였다. 그러나 조선 태종의 중수 이후에는 주로 저수지의 기능으로 전환되었다고 보았다. 그 근거로 조선 태종의 중수비에 보이는 대극포를 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벽골제 서북쪽에 보이는 태극포로 추정하면서, 태극포에 방조제를 쌓은 이후 벽골제의 기능이 전환되었을 것으로 제시하였다. 기존의 견해에서는 대극포를 수여거로 파악하여 벽골제 기능의 전환 시점을 명확하게 하지 못하였다. 아울러 서해안에 쌓아진 많은 제방은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안의 특성을 감안하여 방조제와 저수지의 기능을 겸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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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계명대학교출판부, "한중일의 고대 수리시설 비교연구" 2007

      2 노중국, "한국고대 수리시설의 역사성과 의미" 신라문화연구소 45 : 123-148, 2015

      3 염정섭, "조선 초기의 水利 정책과 김제 벽골제" 한국농업사학회 6 (6): 79-105, 2007

      4 양기석, "제천의림지의 역사성과 가치" 14 : 2010

      5 대한문화유산연구센터, "보성 조성리유적 초리국의 비밀, 冬老縣의 시작인가?"

      6 강봉룡, "벽골제의 축조 및 수축과 그 해양사적 의의"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2 : 2003

      7 박상현, "벽골제의 방조제 가능성에 관한 연구" (10-1) : 2003

      8 장호, "벽골제와 그 주변의 지형 및 지리적 변천에 관한 고찰"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20 (20): 47-55, 2008

      9 小山田宏一, "백제의 토목기술 고대 동아시아와 백제"

      10 노중국, "백제의 수리(水利)시설과 김제 벽골제" 백제학회 (4) : 27-41, 2010

      1 계명대학교출판부, "한중일의 고대 수리시설 비교연구" 2007

      2 노중국, "한국고대 수리시설의 역사성과 의미" 신라문화연구소 45 : 123-148, 2015

      3 염정섭, "조선 초기의 水利 정책과 김제 벽골제" 한국농업사학회 6 (6): 79-105, 2007

      4 양기석, "제천의림지의 역사성과 가치" 14 : 2010

      5 대한문화유산연구센터, "보성 조성리유적 초리국의 비밀, 冬老縣의 시작인가?"

      6 강봉룡, "벽골제의 축조 및 수축과 그 해양사적 의의"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2 : 2003

      7 박상현, "벽골제의 방조제 가능성에 관한 연구" (10-1) : 2003

      8 장호, "벽골제와 그 주변의 지형 및 지리적 변천에 관한 고찰"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20 (20): 47-55, 2008

      9 小山田宏一, "백제의 토목기술 고대 동아시아와 백제"

      10 노중국, "백제의 수리(水利)시설과 김제 벽골제" 백제학회 (4) : 27-41, 2010

      11 김제시, "동아시아 고대 농경수리와 김제 벽골제의 위상"

      12 최완규, "김제 벽골제와 백제 중방성" 호남고고학회 44 : 165-196, 2013

      13 小山田宏一, "고대 일본 수리시설과 벽골제 동아시아 고대 농경수리와 김제벽골제의 위상"

      14 (재)대한문화유산연구센터, "고대 동북아시아의 수리와 제사" 학연문화사 2011

      15 尹武炳, "金堤碧骨堤發掘報告"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7 : 1976

      16 공준원, "新增碧骨堤史" 우인북스 2015

      17 충남대학교, "唐津合德堤"

      18 洪思俊, "三國時代의 灌漑用池에 대하여-碧骨堤(金堤)와 碧骨池(唐津郡)- 秦弘燮博士華甲紀念論文集" 136·137 :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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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1.18 1.18 1.06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96 0.97 2.484 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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