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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居西干期 사로국의 지배세력과 박씨집단 = The ruling power of Saroguk(斯盧國) and Park(朴)'s Family in the Geoseogan(居西干)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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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Most of the Gan(干) class were originated from refugee from Old Choseon(朝鮮), but the power of Yokkegyong(歷谿卿) and refugee from Chin(秦) were also included here in Saro 6Chon(村)s. Gan, the representatives of Eupnak(邑落), formed a league in the Gyeongju basin. The various levels of Eupnak leagues coexisted outside of the Gyeongju Basin. Sobeolgong(蘇伐公), the Gan of Goheochon(古墟村), gained a comparative advantage over the other Eupnak Gans. Gan gained an advantage over the other families in the Eupnak, but the division of hierarchy did not progress.
      Park's family secured an initiative in conjunction with Sobeolgong's family in the Saro area. Then, They were allied with Aryoung(閼英)'s family and secured the position of Geoseogan with the cooperation of the Eupnak Gans. Park's family and Aryoung's formed the Gan class of Gugeup. Geoseogan and Eupnak Gans formed a vertical hierarchy. The spatial range dominated by Geoseogan was around the Gyeongju basin. The Gans were granted autonomy for Eeupnak by Geoseogan and cooperated with his ruling. Various levels of Eeupnak league were maintained outside of the Gyeongju basin.
      Hyokkeose(赫居世) period was the condensation of the multiful periods of Geoseogans in the story of founding the country. During this period, Geoseogan's family brought Hogong(瓠公)'s and Talhae(脫解)'s of Yangsanchon into the Gan class of Gugeup. Saroguk gained the control over outside of the Gyeongju basin, leading the Jinhan(辰韓) league. Geoseogan maintained the highest rank in the Gan class of Gugeup. Park's family and Seok(昔)'s became the main ruling power of Saroguk. Hogong family, etc., formed a lower part of the Gan class of Gugeup. The division of hierarchy made progress in the Gan class of Gukeup, and the superiority of Geoseogan strengthened. Chachaung(次次雄) was the title that showed that Geoseogan justified this position with the right of memorial cerem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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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st of the Gan(干) class were originated from refugee from Old Choseon(朝鮮), but the power of Yokkegyong(歷谿卿) and refugee from Chin(秦) were also included here in Saro 6Chon(村)s. Gan, the representatives of Eupnak(邑落), formed a leagu...

      Most of the Gan(干) class were originated from refugee from Old Choseon(朝鮮), but the power of Yokkegyong(歷谿卿) and refugee from Chin(秦) were also included here in Saro 6Chon(村)s. Gan, the representatives of Eupnak(邑落), formed a league in the Gyeongju basin. The various levels of Eupnak leagues coexisted outside of the Gyeongju Basin. Sobeolgong(蘇伐公), the Gan of Goheochon(古墟村), gained a comparative advantage over the other Eupnak Gans. Gan gained an advantage over the other families in the Eupnak, but the division of hierarchy did not progress.
      Park's family secured an initiative in conjunction with Sobeolgong's family in the Saro area. Then, They were allied with Aryoung(閼英)'s family and secured the position of Geoseogan with the cooperation of the Eupnak Gans. Park's family and Aryoung's formed the Gan class of Gugeup. Geoseogan and Eupnak Gans formed a vertical hierarchy. The spatial range dominated by Geoseogan was around the Gyeongju basin. The Gans were granted autonomy for Eeupnak by Geoseogan and cooperated with his ruling. Various levels of Eeupnak league were maintained outside of the Gyeongju basin.
      Hyokkeose(赫居世) period was the condensation of the multiful periods of Geoseogans in the story of founding the country. During this period, Geoseogan's family brought Hogong(瓠公)'s and Talhae(脫解)'s of Yangsanchon into the Gan class of Gugeup. Saroguk gained the control over outside of the Gyeongju basin, leading the Jinhan(辰韓) league. Geoseogan maintained the highest rank in the Gan class of Gugeup. Park's family and Seok(昔)'s became the main ruling power of Saroguk. Hogong family, etc., formed a lower part of the Gan class of Gugeup. The division of hierarchy made progress in the Gan class of Gukeup, and the superiority of Geoseogan strengthened. Chachaung(次次雄) was the title that showed that Geoseogan justified this position with the right of memorial cerem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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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사로 6촌의 干層은 대부분 조선유민에서 유래했지만 朝鮮相 역계경 계통과 秦 유이민 계통도 포함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조선유민’은 이들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각 읍락의 대표인 干들은 공동사안을 해결하기 위해 경주분지 일대에서 斯盧 읍락연맹을 결성했다. 읍락연맹은 경주분지 외곽의 소하천 유역에서도 다양한 수준으로 공존했다. 읍락 간은 대체로 상호 평등한 관계를 이루었다. 다만 고허촌의 干인 소벌공은 여타 읍락 간에 대해 상대적 우위를 확보했다. 干세력은 여타 가계집단에 대해 우위를 확보했으나, 위계의 분화는 미흡한 편이었다.
      박씨집단은 소벌공세력과 연합하여 사로지역에서 주도권을 확보했다. 그 뒤 알영집단과 연합하고 읍락 간들의 협조를 받아 居西干 位를 확보했고, 소벌공집단과의 연합은 약화되었다. 박씨집단과 알영세력은 고허촌의 지배세력 내에서 별도의 위계를 이루었다. 이들은 국읍 간층을 형성했고, 거서간과 읍락 간은 수직적 위계를 형성했다. 거서간세력은 국읍인 고허촌에서 별도의 거주공간을 확보했다. 거서간의 지배력이 행사되는 범위는 사로 6촌이 위치했던 경주분지 일대였다. 이 범위의 읍락 간은 자치권을 인정받고 거서간의 통치에 협조했다. 경주분지의 외곽에서는 다양한 수준의 읍락연맹체가 유지되었다. 조양동 38호의 주인공은 이러한 읍락연맹체를 주도한 대읍락 干의 사례로 볼 수 있다.
      건국기사에서 혁거세대는 복수의 居西干代를 응축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거서간세력은 양산촌의 간층인 호공세력을 끌어들여 국읍 간층으로 편입시켰고, 동해안에서 월성지역으로 진출한 탈해세력과도 연합을 이루었다. 사로국의 勢力圈은 경주분지 외곽으로 확장되었다. 사라리 130호 목관묘 집단과 조양동 목관묘 집단을 비롯한 대읍락 간층은 사로국의 통치에 협조함으로써 읍락연맹의 주도권을 바탕으로 자치권을 유지했다. 이 과정에서 거서간은 경주 외곽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고 진한연맹을 주도하게 되었다. 거서간은 국읍 간층 내에서 최고의 위계를 유지했고, 박씨세력과 석씨세력은 사로국 통치의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호공세력과 여타 유력세력은 국읍 간층의 하위를 형성했다. 국읍 간층 내에서 위계의 분화가 촉진되었고, 거서간세력의 우월성은 강화되었다. 차차웅은 이러한 위상을 제의권으로 정당화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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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로 6촌의 干層은 대부분 조선유민에서 유래했지만 朝鮮相 역계경 계통과 秦 유이민 계통도 포함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조선유민’은 이들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각 읍...

      사로 6촌의 干層은 대부분 조선유민에서 유래했지만 朝鮮相 역계경 계통과 秦 유이민 계통도 포함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조선유민’은 이들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각 읍락의 대표인 干들은 공동사안을 해결하기 위해 경주분지 일대에서 斯盧 읍락연맹을 결성했다. 읍락연맹은 경주분지 외곽의 소하천 유역에서도 다양한 수준으로 공존했다. 읍락 간은 대체로 상호 평등한 관계를 이루었다. 다만 고허촌의 干인 소벌공은 여타 읍락 간에 대해 상대적 우위를 확보했다. 干세력은 여타 가계집단에 대해 우위를 확보했으나, 위계의 분화는 미흡한 편이었다.
      박씨집단은 소벌공세력과 연합하여 사로지역에서 주도권을 확보했다. 그 뒤 알영집단과 연합하고 읍락 간들의 협조를 받아 居西干 位를 확보했고, 소벌공집단과의 연합은 약화되었다. 박씨집단과 알영세력은 고허촌의 지배세력 내에서 별도의 위계를 이루었다. 이들은 국읍 간층을 형성했고, 거서간과 읍락 간은 수직적 위계를 형성했다. 거서간세력은 국읍인 고허촌에서 별도의 거주공간을 확보했다. 거서간의 지배력이 행사되는 범위는 사로 6촌이 위치했던 경주분지 일대였다. 이 범위의 읍락 간은 자치권을 인정받고 거서간의 통치에 협조했다. 경주분지의 외곽에서는 다양한 수준의 읍락연맹체가 유지되었다. 조양동 38호의 주인공은 이러한 읍락연맹체를 주도한 대읍락 干의 사례로 볼 수 있다.
      건국기사에서 혁거세대는 복수의 居西干代를 응축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거서간세력은 양산촌의 간층인 호공세력을 끌어들여 국읍 간층으로 편입시켰고, 동해안에서 월성지역으로 진출한 탈해세력과도 연합을 이루었다. 사로국의 勢力圈은 경주분지 외곽으로 확장되었다. 사라리 130호 목관묘 집단과 조양동 목관묘 집단을 비롯한 대읍락 간층은 사로국의 통치에 협조함으로써 읍락연맹의 주도권을 바탕으로 자치권을 유지했다. 이 과정에서 거서간은 경주 외곽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고 진한연맹을 주도하게 되었다. 거서간은 국읍 간층 내에서 최고의 위계를 유지했고, 박씨세력과 석씨세력은 사로국 통치의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호공세력과 여타 유력세력은 국읍 간층의 하위를 형성했다. 국읍 간층 내에서 위계의 분화가 촉진되었고, 거서간세력의 우월성은 강화되었다. 차차웅은 이러한 위상을 제의권으로 정당화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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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이종욱, "한국 초기국가 형성과정의 소국" 27 : 1998

      2 이부오, "신라초기 기년문제에 대한 재고찰" 13 : 1999

      3 전덕재, "신라의 건국과정과 박・석・김씨집단의 동향" 숭덕전 2015

      4 이부오, "신라의 건국과 사로 6촌" 경인문화사 2012

      5 오영훈, "신라왕경에 대한 고찰-성립과 발전을 중심으로-" 11 : 1992

      6 이종욱, "신라상대의 왕경6부" 161 : 1999

      7 주보돈, "신라 형성기의 유적" 한국문화재 조사연구기관협회 2011

      8 박대재, "신라 초기의 國邑과 6村" 신라문화연구소 43 (43): 329-364, 2014

      9 강종원, "신라 왕경의 형성과정" 23 : 1992

      10 이문기, "신라 中古의 6부에 관한 일고찰-골품제와 관련하여-" 1 : 1980

      1 이종욱, "한국 초기국가 형성과정의 소국" 27 : 1998

      2 이부오, "신라초기 기년문제에 대한 재고찰" 13 : 1999

      3 전덕재, "신라의 건국과정과 박・석・김씨집단의 동향" 숭덕전 2015

      4 이부오, "신라의 건국과 사로 6촌" 경인문화사 2012

      5 오영훈, "신라왕경에 대한 고찰-성립과 발전을 중심으로-" 11 : 1992

      6 이종욱, "신라상대의 왕경6부" 161 : 1999

      7 주보돈, "신라 형성기의 유적" 한국문화재 조사연구기관협회 2011

      8 박대재, "신라 초기의 國邑과 6村" 신라문화연구소 43 (43): 329-364, 2014

      9 강종원, "신라 왕경의 형성과정" 23 :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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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선석열, "신라 6부제의 성립과정" 69 : 1996

      12 이근직, "신라 3성시조의 탄강지 연구" 16 : 1997

      13 전덕재, "상고기 신라6부의 성격에 대한 고찰" 12 : 1995

      14 이청규, "사로국의 형성에 대한 고고학적 검토" 26 :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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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국립경주박물관, "경주 황성동 고분군Ⅱ-513・514번지-"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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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이인철, "斯盧 6村의 형성과 발전" 진단학회 (93) : 1-28, 2002

      34 朴洪國, "斯盧 6村의 위치에 대한 試論" 신라문화연구소 (21) : 259-282, 2003

      35 이부오, "底本 수용의 맥락을 통해 본 ≪三國史記≫ 新羅本紀 초기 기사의 이해 방향" 신라사학회 (21) : 5-47,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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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盧泰敦, "三國時代의 ‘部’에 關한 硏究-成立과 構造를 中心으로-" 2 : 1975

      39 이부오, "1세기초 염사국의 대외교섭" 22 : 2001

      40 이성주, "1-3세기 가야 정치체의 성장" 4 :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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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8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2-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6-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KCI등재
      2014-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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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1.18 1.18 1.06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96 0.97 2.484 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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