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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南澗精舍에 대한 山水論的 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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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溪流 위에 세운 남간정사의 건축적 특징을 해명하기 위해서 이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들을 살펴볼 것이다.
      첫째, ‘조선조 사대부들 가운데 우암은 상당히 많은 집들을 여러 곳에 짓고 살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이 가운데 남간정사를 짓기 전에 이루어졌던 화양동의 암서재(巖棲齋)와 관련하여 우암은 “회덕(懷德)에서부터 이 골짜기를 들어오면, 심신이 상쾌하여 마치 선경(仙境)에 있는 것 같으니, 여기서 회덕을 돌아보면 회덕은 참으로 티끌 세상이다. 정사(精舍, 지금의 화양서원으로 당시에는 그냥 초당(草堂)으로 불렸다)에서부터 다시 북재(北齋 암서재를 말함)로 옮긴 뒤에는 북재가 더 좋은 선경이라서 정사가 도리어 티끌 세상처럼 보인다. 이곳은 충분히 맑고 신기하다 이를 만하니, 어찌 다시 무릉도원(武陵桃源) 가는 길을 찾을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말을 통해서 우암은 자신이 세운 여러 건축물들을 일이관지하고 있음을 분명히 엿볼 수 있다. 따라서 ‘회덕의 능인암-화양계곡의 정사-화양계곡의 암서재-남간정사’라는 축에서 남간정사를 놓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둘째, ‘암서재와 주변 경관과의 관계’이다. 암서재와 남간정사는 바위 위에 세웠다는 점에서 동일하고, 물을 가까이 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동일하다. 대개 암서재와 남간정사의 공통적 특징을 바위로 보고, 그 바위가 표상하고 있는 것은 직(直), 의리, 절의, 존왕의식(尊王意識) 등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좀더 본질적인 문제까지 천착해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의 淸濁으로 善惡을 설명하고 자신의 무한한 功能을 끊임없이 흐르는 물로 설명하는 전통적인 성리학의 물에 대한 관념을 분석함으로써 남간정사 밑으로 흐르는 물의 본질을 읽어낼 필요가 있다.
      셋째, 우암은 특히 물을 자신의 이념적 표상으로 삼고자 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특히나 암서재 생활에서 그가 가장 공 들여서 한 일은 바로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마라)’의 글씨를 바위에 새겨놓고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과 명나라에 대한 숭모의식을 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화양동 계곡은 세속과 단순히 떨어져 있는 선경이 아니라 청나라와 친해지려는 어떤 의식이나 집단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극도의 이념적 바리케이트와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이러한 의식의 단초를 신라 말엽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孤雲 崔致遠(857~?)의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이라는 시의 암각 글씨를 우암이 직접 썼다는 사실에서 찾아낼 수 있다. 이 시의 轉結句에서 고운은 “항상 시비하는 소리가 귀에 이를까 두려워서, 일부러 흐르는 물로 하여금 산을 폭 씌워놓고자 한다[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고 말함으로써 彼我의 공간을 물을 매개로 구별해내는 강한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시의 바위글씨를 쓴 주인공이 우암이고, 우암이 고운의 삶과 시의 내용을 몰랐을 리 없다면, 우암에게 있어서 물은 분명히 彼我를 구별하는 수단으로도 인식되었을 것이다.
      또한 남간정사의 마루 밑에 설치되어 있는 인공의 돌물길 역시 우암 때의 작품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현재 남간정사의 마루 밑으로 흐르는 물은 우암 때처럼 溪流가 아니라 건물 뒤쪽에 있는 샘물에서 흘러들어오는 물이다. 따라서 돌물길은 남간정사의 마루 밑으로 溪流 대신 샘물을 끌어들일 때 새롭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정한 크기와 높이로 만들어진 돌물길은 계절에 따라서 물의 양이 큰 차이가 나는 溪流가 아니라 물의 변화가 크지 않는 샘물을 예상하고 만들어놓은 구조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예상할 때 일정한 양으로 흐르는 샘물을 남간정사의 마루 밑으로 흐르게 하는 것이 도리어 집의 원형을 훼손시키지도 않으면서 간간히 발생하는 폭류 피해를 완전히 줄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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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溪流 위에 세운 남간정사의 건축적 특징을 해명하기 위해서 이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들을 살펴볼 것이다. 첫째, ‘조선조 사대부들 가운데 우암은 상당히 많은 집들을 여러 곳에 짓고 ...

      溪流 위에 세운 남간정사의 건축적 특징을 해명하기 위해서 이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들을 살펴볼 것이다.
      첫째, ‘조선조 사대부들 가운데 우암은 상당히 많은 집들을 여러 곳에 짓고 살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이 가운데 남간정사를 짓기 전에 이루어졌던 화양동의 암서재(巖棲齋)와 관련하여 우암은 “회덕(懷德)에서부터 이 골짜기를 들어오면, 심신이 상쾌하여 마치 선경(仙境)에 있는 것 같으니, 여기서 회덕을 돌아보면 회덕은 참으로 티끌 세상이다. 정사(精舍, 지금의 화양서원으로 당시에는 그냥 초당(草堂)으로 불렸다)에서부터 다시 북재(北齋 암서재를 말함)로 옮긴 뒤에는 북재가 더 좋은 선경이라서 정사가 도리어 티끌 세상처럼 보인다. 이곳은 충분히 맑고 신기하다 이를 만하니, 어찌 다시 무릉도원(武陵桃源) 가는 길을 찾을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말을 통해서 우암은 자신이 세운 여러 건축물들을 일이관지하고 있음을 분명히 엿볼 수 있다. 따라서 ‘회덕의 능인암-화양계곡의 정사-화양계곡의 암서재-남간정사’라는 축에서 남간정사를 놓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둘째, ‘암서재와 주변 경관과의 관계’이다. 암서재와 남간정사는 바위 위에 세웠다는 점에서 동일하고, 물을 가까이 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동일하다. 대개 암서재와 남간정사의 공통적 특징을 바위로 보고, 그 바위가 표상하고 있는 것은 직(直), 의리, 절의, 존왕의식(尊王意識) 등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좀더 본질적인 문제까지 천착해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의 淸濁으로 善惡을 설명하고 자신의 무한한 功能을 끊임없이 흐르는 물로 설명하는 전통적인 성리학의 물에 대한 관념을 분석함으로써 남간정사 밑으로 흐르는 물의 본질을 읽어낼 필요가 있다.
      셋째, 우암은 특히 물을 자신의 이념적 표상으로 삼고자 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특히나 암서재 생활에서 그가 가장 공 들여서 한 일은 바로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마라)’의 글씨를 바위에 새겨놓고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과 명나라에 대한 숭모의식을 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화양동 계곡은 세속과 단순히 떨어져 있는 선경이 아니라 청나라와 친해지려는 어떤 의식이나 집단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극도의 이념적 바리케이트와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이러한 의식의 단초를 신라 말엽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孤雲 崔致遠(857~?)의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이라는 시의 암각 글씨를 우암이 직접 썼다는 사실에서 찾아낼 수 있다. 이 시의 轉結句에서 고운은 “항상 시비하는 소리가 귀에 이를까 두려워서, 일부러 흐르는 물로 하여금 산을 폭 씌워놓고자 한다[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고 말함으로써 彼我의 공간을 물을 매개로 구별해내는 강한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시의 바위글씨를 쓴 주인공이 우암이고, 우암이 고운의 삶과 시의 내용을 몰랐을 리 없다면, 우암에게 있어서 물은 분명히 彼我를 구별하는 수단으로도 인식되었을 것이다.
      또한 남간정사의 마루 밑에 설치되어 있는 인공의 돌물길 역시 우암 때의 작품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현재 남간정사의 마루 밑으로 흐르는 물은 우암 때처럼 溪流가 아니라 건물 뒤쪽에 있는 샘물에서 흘러들어오는 물이다. 따라서 돌물길은 남간정사의 마루 밑으로 溪流 대신 샘물을 끌어들일 때 새롭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정한 크기와 높이로 만들어진 돌물길은 계절에 따라서 물의 양이 큰 차이가 나는 溪流가 아니라 물의 변화가 크지 않는 샘물을 예상하고 만들어놓은 구조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예상할 때 일정한 양으로 흐르는 샘물을 남간정사의 마루 밑으로 흐르게 하는 것이 도리어 집의 원형을 훼손시키지도 않으면서 간간히 발생하는 폭류 피해를 완전히 줄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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