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 신라사의 전개와 복식문화 동아시아 고대사회의 복식에는 그것을 착용한 인물과 그 시대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당시 사회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대개 높은 신분(身分)을 지녔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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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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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 신라사의 전개와 복식문화 동아시아 고대사회의 복식에는 그것을 착용한 인물과 그 시대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당시 사회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대개 높은 신분(身分)을 지녔고 그...
ㆍ 신라사의 전개와 복식문화
동아시아 고대사회의 복식에는 그것을 착용한 인물과 그 시대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당시 사회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대개 높은 신분(身分)을 지녔고 그들은 자신들의 배타적 지위를 가시적으로 드러내기 위하여 고급소재로 만든 화려한 복식을 착용하였다. 율령제도(律令制度) 하에서 국가는 사회신분의 존비(尊卑)를 복식의 재질이나 색깔 차이를 통해 구분하기도 했다.
마립간시기의 복식에 대한 사료 역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에 비해 복식 관련 고고학 자료는 매우 많다. 바로 거대 고분 속에서 다량으로 출토되는 황금장신구가 그것이다. 금속제 장신구가 부착된 복식은 지배층의 전유물이었다. 왕경의 왕족과 귀족, 지방의 유력자들만이 공유하였고 그 내에서는 재질이나 제작의 정조(精粗)에 따른 상하 구분이 있었다. 그리고 금동신발과 같은 장송의례용품을 공유한 점도 특징적이다. 중고기 이후의 복식에 대한 사료는 그 이전 시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많이 남아 있다. 주목되는 것은 율령 반포와 짝하여 신분과 관등의 고하에 따른 의관제가 정비된 점이다.
ㆍ 복식사여체제의 성립과 운용
마립간기 신라사회에는 황금문화가 존재했다. 황금문화의 중핵은 왕경인 경주의 왕릉묘역이었는데 그것은 일정 기간 동안 지방사회의 지배층 묘역으로도 확산된다. 당시의 황금장식은 지배층의 의복이나 신체에 부착하였던 복식품의 일부이며 위세품(威勢品)에 해당한다.
마립간기 신라의 복식품은 중앙의 왕족, 귀족묘역, 그리고 지방의 수장묘역에서 출토되는데 물품의 재질이나 수준, 수량에서 차이가 현격하다. 신라 왕족이나 귀족의 무덤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며, 5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시작되어 6세기 중엽 경 소멸되는 것 같다. 지방의 무덤에서 금속장식품이 보이는 것은 5세기 전반경이다.
신라의 지방에서 출토되는 복식품은 지역마다 고분군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 경산, 대구, 의성, 창녕, 양산지역에서는 관, 귀걸이, 허리띠, 금동신발 등의 주요 장신구와 장식대도가 다수 출토되고 있음에 비하여 성주, 안동, 강릉, 부산, 삼척, 상주, 청원은 이보다 종류가 적으며 양적으로도 열세이다. 이러한 차이는 신라 중앙에서 각 지역에 대한 관심도 즉, 역으로 각 지역이 지닌 중요도와 관련될 것 같다.
신라는 5세기 전반에 고구려와 신속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관계가 신라 성장에 장애가 되자 고구려와의 신속관계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나제동맹을 체결하였고 대내적으로는 변경을 중심으로 각 지방의 세력을 강하게 결속하고자 하였으며 고구려와의 접경지대를 중심으로 활발한 축성사업을 벌이고 지방민들을 동원하였다. 이 때 다양한 임무를 현지 수장에게 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지방 수장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에서 자신의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중앙의 인정과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처럼 양측의 입장이 잘 맞아 떨어지면서 이러한 복식사여체제는 1세기 이상 지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ㆍ 복식사여체제의 변화양상
6세기 전반에 접어들면서 신라의 고고학 자료에서 새로운 변화의 모습이 살펴진다. 즉, 단위지역마다 중심세력 이외의 새로운 세력에게도 복식이 사여되는 사례가 확인된다. 5세기처럼 주로 앞 시기의 소국(小國)적 기반을 가진 지역의 중심고분군에만 사여 또는 지원하던 체제에서 벗어나 그 지역의 주변고분군에도 관심을 가지는 방식으로 바뀌는 것 같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지방 세력들의 자율성을 규제하고 그들의 기반을 해체해야만 할 상황이 도래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 단계인 6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각지에서 기존 대형고분군의 축조가 종료되고 새로이 주변에서 비교적 균등한 규모의 많은 고분군이 축조되는 모습은 이 시기에는 중앙에 의한 지방사회의 재정비가 완료되어 감을 반영해준다. 6세기에 접어들면서 신라의 내적성장이 본격화하자 지방 지배층의 자치적 기반을 규제 내지는 박탈하고 새로이 지방관을 파견하여 그 역할을 대신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