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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응과 협력의 시대: 20세기 한국경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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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필자는 연구목표에서 이 책의 목표와 저술방법에 대해 서술했다. 이하에서는 위의 요소들을 살려 20세기 한국경제사를 묘사해 보자. 17세기 중반에 청이 건국한 이후 한국은 小中華를 자처...

      필자는 연구목표에서 이 책의 목표와 저술방법에 대해 서술했다. 이하에서는 위의 요소들을 살려 20세기 한국경제사를 묘사해 보자.

      17세기 중반에 청이 건국한 이후 한국은 小中華를 자처했고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17-18세기에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19세기에는 인구는 감소했고 경제는 후퇴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사회경제가 암흑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신분제는 약해졌고, 교육 받은 사람은 증가했으며, 경제의 상업화도 진전했다. 학습능력이 높아졌고, 사회구성원이 성장지향적으로 바뀌었다. 한국은 1890년대 후반부터 근대사회에 적응해 갔는데 그 시기에 형성된 학습능력과 성장지향성이 유용했을 것이다.

      1882-1905년에 한국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공업건설이었다. 민간부문에 학습능력과 성장지향성은 있었지만 자본은 부족했고, 한국정부의 개발지향성은 낮았다. 또 민간부문 내부의 협력도 정부와 민간의 협력도 부진했다. 19세기 후반에 한국이 성장하기는 했지만 일본의 집요한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1905년에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일본정부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조선총독부의 핵심적인 지위를 장악했고, 그들에 의해서 토지, 재정, 화폐, 금융제도가 개혁되었다. 부족했던 개발지향성과 자본이 보충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생산물 별로 산업단체를 결성하게 했고 그것을 지도하여 민간부문 내부의 협력 및 정부와 민간의 협력을 촉진했다. 부산상공회의소를 검토해 보면 일본인 이민들의 역량도 제법 높았다. 1905년 이전과 비교하면 그 이후에 근대사회에 대한 적응의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조선총독부의 개발지향성이 성과를 거두게 된 요인으로 정책에 대한 한국인의 협력을 들 수 있는데, 박섭은 농업을 검토하여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조선총독부가 보급한 농업기술을 한국농민이 큰 저항 없이 채택한 이유는 한국농민이 새로운 농업기술을 이해했던 것과 조선총독부가 농업단체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서 농업기술을 보급한 것이었다. 필자는 가족주의와 성장지향성을 그것들에 덧붙일 것이다.

      1948년에 한국이 독립했을 때 한국은 미국이 중심이 된 자본주의 체제에 포함되었다. 한국은 선진국의 자본을 도입하여 산업을 개발해야 했고, 생산한 상품을 선진국에 수출해야 했으며, 그수입으로 자본을 갚아야 했다. 이 일은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에 적응할 때 비로소 달성될 수 있었다.

      1945년에 조선총독부의 관리, 일본인 기업가, 일본인 기술자가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에 한국사회의 적응력이 어떻게 유지되었고 개발되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식민지기에 일본인이 사회의 中樞를 차지했다. 그런데 일본인 관리, 기업가, 기술자가 그들의 지식과 기술을 한국인에게 전수하지 않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것은 한국사회의 적응력을 떨어뜨렸다.

      한국은 식민지기에 이식된 일본적 사회경제체제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했고 그 위에서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에 적응해야 했다. 독립 직후의 한국은 위의 작업을 하기 어려웠다. 조선총독부의 교육정책 때문에 독립했을 때 중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 적었다. 독립 이후 한국정부는 중고등교육기관을 증설했고 이것은 학습능력을 높였다. 한국인의 잘 살고 싶어하는 욕망도 줄어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조선총독부만큼 개발지향적이지 않았고, 정부와 민간의 협력도 적극적으로 추구하지 않았다. 성과는 높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는 한국인의 성장지향성을 잘 이해했고 개발주의적으로 행동했다. 정부에 대한 민간의 협력을 중시했고, 민간에서 단체의 결성과 그 민간단체의 정부에 대한 협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980년대 후반의 대호황 속에서 대기업은 자본력을 키웠고, 6월항쟁을 거치면서 노동자는 단결력을 키웠다. 1990년대에 들어와 경제자유화가 한층 진행되었다. 그 속에서 한국 사회경제의 불균등성이 심화되었다. 1990년에 소련이 멸망하고, 1992년에 중국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표방한 이후 국제관계는 급변했다. 적응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이지만 정부가 그 과정을 리드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민간부문도 이 과제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큰 이유는 경로의존성이 생긴 것이다. 한국인의 성장지향성은 여전히 강하지만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다른 요소들이 갖추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에서 우리는 1980년대까지 적응력이 유지된 것을 중시해야 한다. 병합, 독립, 한국전쟁, 군사정변 등 거대한 사건들이 경로의존의 출현을 막았을 것이다.

      책의 마지막에서는 비교사적 검토를 하여 몇 가지의 발견을 이론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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