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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암(德巖) 나도규(羅燾圭)의 강학과 누정 활동 연구 = A Study On Education And Arbor Activities Of Na Do-Gyu(羅燾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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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Na Do-Gyu who lived intensely and died represents a rural intellectual of 19th century. He plied unusual education activity over concentrating in his studies, and kept to preparing for the state examination. In other words his varied activities includes the phases of the times of Honam area of 19th century. Although he was experiencing a mental conflict because of managing both studies and preparation for the state examination, he wasn’t able to give up easily the things like general Confucian scholars of the Chosun-era.
      He, after death of his teacher Nosa Gi Jeong-Jin, built the Namdeok arbor on the west side of Gwangju where he lived, but there seems to be no animated arbor activities in the common sense at this arbor. The fact that there almost no remains poetry and pose let us know that no one enjoyed a life at this arbor except the owner, furthermore he didn’t enjoy a long life at this arbor. Then again, because this arbor was an education place, it could not but lack an activity of reciting a poem in advance.
      His arbor activities, however, was found in many places. He managed the Yukyoung library and the Bongyang lecture hall before the Namdeok arbor, and took a turn in the Bulwon arbor after. But most of those buildings at which he enjoyed his life was not built by himself but by other people. His activities at those arbors was lecture activ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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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 Do-Gyu who lived intensely and died represents a rural intellectual of 19th century. He plied unusual education activity over concentrating in his studies, and kept to preparing for the state examination. In other words his varied activities includ...

      Na Do-Gyu who lived intensely and died represents a rural intellectual of 19th century. He plied unusual education activity over concentrating in his studies, and kept to preparing for the state examination. In other words his varied activities includes the phases of the times of Honam area of 19th century. Although he was experiencing a mental conflict because of managing both studies and preparation for the state examination, he wasn’t able to give up easily the things like general Confucian scholars of the Chosun-era.
      He, after death of his teacher Nosa Gi Jeong-Jin, built the Namdeok arbor on the west side of Gwangju where he lived, but there seems to be no animated arbor activities in the common sense at this arbor. The fact that there almost no remains poetry and pose let us know that no one enjoyed a life at this arbor except the owner, furthermore he didn’t enjoy a long life at this arbor. Then again, because this arbor was an education place, it could not but lack an activity of reciting a poem in advance.
      His arbor activities, however, was found in many places. He managed the Yukyoung library and the Bongyang lecture hall before the Namdeok arbor, and took a turn in the Bulwon arbor after. But most of those buildings at which he enjoyed his life was not built by himself but by other people. His activities at those arbors was lecture activ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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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평생을 치열하게 살다간 나도규는 19세기를 살아갔던 향촌의 지식인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학문에 힘쓰는 과정 속에서도 남다른 교육활동을 펼쳐갔으며, 또한 과거시험 공부도 계속해나갔다. 즉 그의 다양한 활동 속에는 19세기 호남의 시대상이 들어있는 것이다. 학문하는 한편으로 과거공부도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심리적 갈등도 겪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쉽게 접어버릴 수 없는 조선시대 유학자의 일상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스승인 노사 기정진의 사망 후에 그가 살고 있는 곳인 광주의 서쪽에 남덕정을 세웠는데, 이곳에서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누정활동은 크게 활발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즉 시문이 거의 남아있지 않으니, 그것은 주인 외엔 향유자가 없었고, 이곳에서 노닌 기간도 길지 못했다는 데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강학공간이기 때문에 시를 수창하는 활동은 결여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누정활동은 한군데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남덕정 이전에도 육영재와 봉양서실을 운영하였으며, 이후에는 불원정에서 소요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대부분이 다른 사람들의 힘에 의해 세워진 누정이다. 이곳에서의 누정활동의 특징은 강학활동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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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을 치열하게 살다간 나도규는 19세기를 살아갔던 향촌의 지식인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학문에 힘쓰는 과정 속에서도 남다른 교육활동을 펼쳐갔으며, 또한 과거시험 공부도 계...

      평생을 치열하게 살다간 나도규는 19세기를 살아갔던 향촌의 지식인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학문에 힘쓰는 과정 속에서도 남다른 교육활동을 펼쳐갔으며, 또한 과거시험 공부도 계속해나갔다. 즉 그의 다양한 활동 속에는 19세기 호남의 시대상이 들어있는 것이다. 학문하는 한편으로 과거공부도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심리적 갈등도 겪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쉽게 접어버릴 수 없는 조선시대 유학자의 일상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스승인 노사 기정진의 사망 후에 그가 살고 있는 곳인 광주의 서쪽에 남덕정을 세웠는데, 이곳에서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누정활동은 크게 활발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즉 시문이 거의 남아있지 않으니, 그것은 주인 외엔 향유자가 없었고, 이곳에서 노닌 기간도 길지 못했다는 데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강학공간이기 때문에 시를 수창하는 활동은 결여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누정활동은 한군데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남덕정 이전에도 육영재와 봉양서실을 운영하였으며, 이후에는 불원정에서 소요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대부분이 다른 사람들의 힘에 의해 세워진 누정이다. 이곳에서의 누정활동의 특징은 강학활동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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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광주직할시, "한시문1" 성문당 1992

      2 박현순, "조선후기 文科에 나타난 京鄕 간의 불균형 문제 검토" 규장각한국학연구원 (58) : 3-37, 2012

      3 장재천, "조선시대 과거제도와 시험문화의 고찰" 한국사상문화학회 (39) : 123-156, 2007

      4 김신중, "전남의 누정제영 연구-조선 후기의 연작제영을 중심으로"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 24 : 1996

      5 "안철환 후손가 소장 간찰첩"

      6 이성호, "사대부문학 형성기의 한시 연구" 성균관대 2000

      7 나도규, "덕암만록"

      8 성대경, "대원군정권의 과거운영 –문과를 중심으로"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19 : 1985

      9 권수용, "노사학파의 누정 건립활동 연구" 석당학술원 (49) : 207-238, 2011

      10 권수용, "광주・전남의 근대 누정 연구" 민족문화연구소 (45) : 217-250, 2010

      1 광주직할시, "한시문1" 성문당 1992

      2 박현순, "조선후기 文科에 나타난 京鄕 간의 불균형 문제 검토" 규장각한국학연구원 (58) : 3-37, 2012

      3 장재천, "조선시대 과거제도와 시험문화의 고찰" 한국사상문화학회 (39) : 123-156, 2007

      4 김신중, "전남의 누정제영 연구-조선 후기의 연작제영을 중심으로"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 24 : 1996

      5 "안철환 후손가 소장 간찰첩"

      6 이성호, "사대부문학 형성기의 한시 연구" 성균관대 2000

      7 나도규, "덕암만록"

      8 성대경, "대원군정권의 과거운영 –문과를 중심으로"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19 : 1985

      9 권수용, "노사학파의 누정 건립활동 연구" 석당학술원 (49) : 207-238, 2011

      10 권수용, "광주・전남의 근대 누정 연구" 민족문화연구소 (45) : 217-250, 2010

      11 권수용, "16세기 호남 무등산권 원림문화" 인문과학연구소 (55) : 357-398,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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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01 평가 등재후보로 하락 (계속평가) KCI등재후보
      201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12-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10-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2008-07-01 학회명변경 한글명 : 인문학연구소 -> 인문학연구원
      영문명 : Institute of Humanities -> Institute of Humanities, Chosun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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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54 0.54 0.44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45 0.42 0.978 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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