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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豊臣정권과 王權-觀念과 儀禮를 중심으로_중간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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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1. 2차년도 연구 주제 : ① 豊臣정권의 특질과 무가지배원리 ② 豊臣정권과 儀禮-聚樂第 行幸을 중심으로-
      2. 본 연구의 진행과정
      본 연구는 <豊臣정권과 王權-觀念과 儀禮를 중심으로->이란 연구테마 아래 2006년 7월부터 2008년 6월까지 총 2년에 걸쳐 수행되었다. 당초에는 ① <豊臣정권의 천황관-‘皇胤說’에서 ‘日輪의 子’로>, ② <豊臣정권기 천황의 종교적 권위 재검토>, ③ <豊臣정권의 특질과 무가지배원리>라는 세 가지 테마를 설정하고 3년간 수행할 것을 전제로 구성되었으나, 한국학술진흥재단측이 2년간에 연구를 수행하도록 수정·결정하여 연구기간이 2년으로 조정되었다. 이 중 제1차년도의 연구테마로 설정한 ① <豊臣정권의 천황관-‘皇胤說’에서 ‘日輪의 子’로>는 2008년 3월 「豊臣정권의 천황관과 ‘武威’」라는 제목으로 『歷史敎育』105집에 실렸고, 결과 보고도 종료된 상황이다. 다음으로 2차년도의 연구테마로 설정한 것은 ② <豊臣정권기 천황의 종교적 권위 재검토>이다. 그러나 <豊臣정권과 王權>의 관계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豊臣정권의 중요한 내적 원리에 먼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③ <豊臣정권의 특질과 무가지배원리>를 먼저 분석하였다. <豊臣정권의 특질과 무가지배원리>의 핵심 내용은 이른바 ‘功名’의 논리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2006년도에 「15·16세기 일본의 전국시대와 도요토미 정권」『전쟁과 동북아의 국제질서』(일조각)로 발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산견되는 공명의 개념은 당시 일본에 거주하였던 외국인들의 기록에 잘 드러나고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못했다. 이 점을 보완하여 당시 예수회 선교사로서 일본에 24년간 거주했던 루이스 프로이스를 중심으로 ‘功名’의 내용을 분석하였다. (참고자료 <‘가부키’와 ‘功名’으로 본 16세기 일본사회> 참조)
      3. 豊臣정권과 天皇 儀禮-聚樂第 行幸을 중심으로-
      전국시대에 들어오면, 천황의 옥체 안전과 國運長久를 기도하여 정월 8일에 행해지는 後七日御修法과 大元帥法 중에서 後七日御修法은 이미 중절되었고 大元帥法도 1471년부터는 護摩를 태우는 정도로 간략화된 방식이 실시되었다. 의례와 관련하여 천황위의 정통성을 나타내는 즉위례, 대상제와 같은 의례도 전국시대에는 실시되지 않았다.(이른바 ‘半帝’). 비용을 부담하는 막부가 피폐해졌기 때문이다. 1521년 21년 만에 겨우 즉위례를 올린 後柏原 천황은 그 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히데요시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1586년 11월 7일 즉위하여 동월 25일에 즉위례를 올린 後陽成 천황의 사례는 천황가가 기나 긴 ‘어둠의 터널’에서 벗어났음을 알리는 신호라 할 수 있다. 히데요시와 천황가의 의례관계는 관백 취임을 계기로 크게 변화하였다. 1588년 後陽成 천황의 聚樂第 방문은 이른바 豊臣秀吉과 천황의 관계가 돈독해졌음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기존 연구에서는 後陽成 천황의 聚樂第 방문을 秀吉의 천황권위 이용의 전형적인 사례로 지적되어 왔다. 朝尾直弘은 특히 大名통제에 주목하고 천황권위를 배경으로 秀吉에게 복종을 서약시킨 것으로 위치지운다. (同, 『天下統一』(大系日本の歷史)8, 小學館, 1988). 또 秀吉의 행렬에 주목한 연구도 있다. 中川和明는 행렬의 특징을 분석하여 “풍신정권이 설정한 취락제행행의 행렬 구성은 전통적인 국가질서를 중시한 것이며, 천황 및 조정에 대한 존중 포즈를 보인 것”으로 해석한다.(同, 「聚樂第行幸の行列について」, (弘前大學『國史硏究』90, 1991) 최근 池享도 秀吉의 행렬에 주목하면서 이를 秀吉이 전통에 의거하는 형태를 취하면서 새로운 지배의 정당성을 표현한 것으로 보았다. 특히 池享은 수길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즉 義滿·義敎의 경우 독자적인 무가 집단을 구성하고 있었지만 그 규모는 적었고 더욱이 천황의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황의 중심으로 하는 행렬에 포취되었다. 반면 秀吉의 경우는 행렬의 태반이 관백의 행렬로 그 위치가 갖는 독자적인 효과가 있었다. “천황과 수길이란 두 중심을 가진 이극적 구조를 갖고 있었”고 “‘전통’의 답습은 형식에 불과할 뿐이며 천황을 폄훼하고 秀吉이 사실상 국왕이란 입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關白 취임 직후에 수길이 “사실상 국왕이란 입장을 과시”한 것으로 보는 것에는 찬성할 수 없다. 이 시기는 황윤설을 바탕으로 천황 권력과 일체화를 도모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실제 행렬의 진행과 관련하여 秀吉은 전통적으로 關白이 행하고 있던 천황의 옷자락을 잡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秀吉이 천황 권위를 벗어나 독자성을 확보하려 한 것은 ‘태양의 아들(日輪의 子)’론의 등장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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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차년도 연구 주제 : ① 豊臣정권의 특질과 무가지배원리 ② 豊臣정권과 儀禮-聚樂第 行幸을 중심으로- 2. 본 연구의 진행과정 본 연구는 <豊臣정권과 王權-觀念과 儀禮를 ...

      1. 2차년도 연구 주제 : ① 豊臣정권의 특질과 무가지배원리 ② 豊臣정권과 儀禮-聚樂第 行幸을 중심으로-
      2. 본 연구의 진행과정
      본 연구는 <豊臣정권과 王權-觀念과 儀禮를 중심으로->이란 연구테마 아래 2006년 7월부터 2008년 6월까지 총 2년에 걸쳐 수행되었다. 당초에는 ① <豊臣정권의 천황관-‘皇胤說’에서 ‘日輪의 子’로>, ② <豊臣정권기 천황의 종교적 권위 재검토>, ③ <豊臣정권의 특질과 무가지배원리>라는 세 가지 테마를 설정하고 3년간 수행할 것을 전제로 구성되었으나, 한국학술진흥재단측이 2년간에 연구를 수행하도록 수정·결정하여 연구기간이 2년으로 조정되었다. 이 중 제1차년도의 연구테마로 설정한 ① <豊臣정권의 천황관-‘皇胤說’에서 ‘日輪의 子’로>는 2008년 3월 「豊臣정권의 천황관과 ‘武威’」라는 제목으로 『歷史敎育』105집에 실렸고, 결과 보고도 종료된 상황이다. 다음으로 2차년도의 연구테마로 설정한 것은 ② <豊臣정권기 천황의 종교적 권위 재검토>이다. 그러나 <豊臣정권과 王權>의 관계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豊臣정권의 중요한 내적 원리에 먼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③ <豊臣정권의 특질과 무가지배원리>를 먼저 분석하였다. <豊臣정권의 특질과 무가지배원리>의 핵심 내용은 이른바 ‘功名’의 논리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2006년도에 「15·16세기 일본의 전국시대와 도요토미 정권」『전쟁과 동북아의 국제질서』(일조각)로 발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산견되는 공명의 개념은 당시 일본에 거주하였던 외국인들의 기록에 잘 드러나고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못했다. 이 점을 보완하여 당시 예수회 선교사로서 일본에 24년간 거주했던 루이스 프로이스를 중심으로 ‘功名’의 내용을 분석하였다. (참고자료 <‘가부키’와 ‘功名’으로 본 16세기 일본사회> 참조)
      3. 豊臣정권과 天皇 儀禮-聚樂第 行幸을 중심으로-
      전국시대에 들어오면, 천황의 옥체 안전과 國運長久를 기도하여 정월 8일에 행해지는 後七日御修法과 大元帥法 중에서 後七日御修法은 이미 중절되었고 大元帥法도 1471년부터는 護摩를 태우는 정도로 간략화된 방식이 실시되었다. 의례와 관련하여 천황위의 정통성을 나타내는 즉위례, 대상제와 같은 의례도 전국시대에는 실시되지 않았다.(이른바 ‘半帝’). 비용을 부담하는 막부가 피폐해졌기 때문이다. 1521년 21년 만에 겨우 즉위례를 올린 後柏原 천황은 그 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히데요시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1586년 11월 7일 즉위하여 동월 25일에 즉위례를 올린 後陽成 천황의 사례는 천황가가 기나 긴 ‘어둠의 터널’에서 벗어났음을 알리는 신호라 할 수 있다. 히데요시와 천황가의 의례관계는 관백 취임을 계기로 크게 변화하였다. 1588년 後陽成 천황의 聚樂第 방문은 이른바 豊臣秀吉과 천황의 관계가 돈독해졌음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기존 연구에서는 後陽成 천황의 聚樂第 방문을 秀吉의 천황권위 이용의 전형적인 사례로 지적되어 왔다. 朝尾直弘은 특히 大名통제에 주목하고 천황권위를 배경으로 秀吉에게 복종을 서약시킨 것으로 위치지운다. (同, 『天下統一』(大系日本の歷史)8, 小學館, 1988). 또 秀吉의 행렬에 주목한 연구도 있다. 中川和明는 행렬의 특징을 분석하여 “풍신정권이 설정한 취락제행행의 행렬 구성은 전통적인 국가질서를 중시한 것이며, 천황 및 조정에 대한 존중 포즈를 보인 것”으로 해석한다.(同, 「聚樂第行幸の行列について」, (弘前大學『國史硏究』90, 1991) 최근 池享도 秀吉의 행렬에 주목하면서 이를 秀吉이 전통에 의거하는 형태를 취하면서 새로운 지배의 정당성을 표현한 것으로 보았다. 특히 池享은 수길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즉 義滿·義敎의 경우 독자적인 무가 집단을 구성하고 있었지만 그 규모는 적었고 더욱이 천황의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황의 중심으로 하는 행렬에 포취되었다. 반면 秀吉의 경우는 행렬의 태반이 관백의 행렬로 그 위치가 갖는 독자적인 효과가 있었다. “천황과 수길이란 두 중심을 가진 이극적 구조를 갖고 있었”고 “‘전통’의 답습은 형식에 불과할 뿐이며 천황을 폄훼하고 秀吉이 사실상 국왕이란 입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關白 취임 직후에 수길이 “사실상 국왕이란 입장을 과시”한 것으로 보는 것에는 찬성할 수 없다. 이 시기는 황윤설을 바탕으로 천황 권력과 일체화를 도모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실제 행렬의 진행과 관련하여 秀吉은 전통적으로 關白이 행하고 있던 천황의 옷자락을 잡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秀吉이 천황 권위를 벗어나 독자성을 확보하려 한 것은 ‘태양의 아들(日輪의 子)’론의 등장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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