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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외방전교회 주교들의 문서를 통한 대한인식과 선교정책 연구 = A Study of the Understanding and the Missionary Policy of Korea through the writtings of Paris Missionary Society bisho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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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T14544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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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가장 뼈아픈 시기를 꼽으라고 한다면, 대부분은 1910년부터 35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일제강점기’를 꼽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제강점기 35년이란 시간동안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인적, 물적으로 많은 수탈을 당하고 식민국가라는 이유로 억압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인에게 있어 일제강점기는 그 자체로 ‘아픔’이다. 그리고 이 시기의 역사를 더욱 아파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동족의 배신(背信)이다. 일진회를 비롯한 친일단체들이 우리나라를 일본에 넘겼고,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에 충성을 맹세한 한국인들은 같은 민족인 다른 한국인들을 억압하고 몸소 수탈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현대에 와서는 이처럼 일본의 정책에 협조하고 조력했던 사람들을 ‘친일파’라고 부르고 있으며, 2009년에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대사전』을 편찬하여 친일인명에 대한 명확한 규정집과 인명집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 대상에는 가톨릭계 인물들도 빠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노기남 대주교를 비롯한 10명의 가톨릭계 인사들이 친일인물로 등재되었다. 노기남 대주교는 한국인으로서 첫 교구장이었으나, 일제말기 ‘경성교구총동원연맹’의 수장으로서 일본의 요구에 협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친일인명대사전에 등재된 것이다. 그는 한국인으로서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고, 또 그들의 정책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들의 정책을 순순히 따라주었기 때문에, 민족을 배신하였다는 불명예를 안게 된 것이다.
      노기남 대주교는 일본의 정책에 대해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지탄을 받는 것은 노기남 대주교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를 이끌어 왔던 두 인물, 뮈텔 대주교와 드망즈 주교에게도 손가락은 향하였다. 이들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합병했을 무렵에 조선 가톨릭교회를 이끌었고, 가톨릭교회를 이끄는 주교의 입장에서 조선 가톨릭 신자들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그 내용에는 독립운동을 반대하고 항일 무장투쟁을 반대하였으며, 일본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주교들이었고, 프랑스인이었기 때문에 친일인명에 등재되지는 않았으나, 사회의 불합리한 모습에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노기남 대주교보다 더 큰 지탄을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가톨릭교회의 입장에서,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며, 사목자로서 그들의 행동이 어떤 부분에서 지탄을 받아야 했는지 분명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정말 지탄 받을 행동을 한 것인가? 그들이 취했던 행동들은 정말 잘못된 것이었나?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북경 교구에서 분리시켜 조선 대목구로 설정한 이래 약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조선 대목구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주교들에게 맡겨졌었는데, 그 가운데 3명은 순교 성인으로서 가톨릭교회 안에서 존경을 받고 있는데, 왜 이들은 교회의 부끄러움으로 남아있어야 하는가? 그들이 선대(先代) 주교들과 달리 행동한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을 던져보며 그들이 취한 정책들을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그들에 대한 평가가 객관적 입장에서 올바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올바로 살펴보기 위하여 논자는 선대 주교들, 특히 구체적인 선교 정책들을 남겨놓은 흔적을 찾아 ‘사목지도서’를 편찬한 주교들을 중심으로 선대 주교들의 선교정책과 뮈텔, 드망즈 주교의 선교정책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먼저 제4대 조선대목구장이며, 103위 순교성인 중 한 분인 베르뇌 주교는 우리나라에서 첫 시노드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이 시노드를 개최한 이유는 신자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시노드의 결과물인 「장주교윤시제우서」나 「사목서한」은 각각 신자들의 행동규범과 성직자들의 행동규범을 담고 있지만, 그 목적 자체는 신자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사목서한」은 그 동안 조선대목구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성직자들의 공통된 규범을 마련함으로써 사목자마다 가진 선교지의 문화, 풍습에 대한 이견들을 통일시키고, 신자들에게 올바른 모범을 보여주며, 그들의 영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구체적 지침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조선 제7대 대목구장인 블랑주교는 병인박해가 일어난 이후 피난한 선교사들과 함께 조선 2차 시노드를 함께하였고, 3차 시노드를 개최하여 『조선교회관례집』을 편찬하였다. 이 관례집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발판이 되었다. 왜냐하면 베르뇌 주교와는 달리 블랑 주교가 이 관례집을 편찬할 때의 시기는 모진 박해의 시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해가 아주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블랑주교에게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그 동안 박해시기라는 이유로 신자들에게 용인되었던 잘못된 관습들을 바로 잡고, 박해 시기 동안 발생한 배교자들을 다시 교회에 받아들이는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했다. 또한 종교의 자유가 주어질 조짐에 따라 선교사들의 행동 양식도 변화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이 관례집을 편찬하게 된 것이다. 결국 블랑 주교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신자들의 영혼 구원이었다. 이미 살펴보았던 베르뇌 주교도, 블랑 주교도 선교지에서 목숨 바쳐 사목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신자들의 영혼 구원’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자면 ‘현지인 성직자 양성’ 이었다. 각각 주교들은 1855년에 배론에 성 요셉 신학교를, 1885년에는 부엉골에 예수성심신학교를 세워 성직자 양성을 위해 노력하는 시발점을 마련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렇다면 뮈텔 대주교와 드망즈 주교는 어떠했는가? 그들이 질타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그들이 질타 받은 부분은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항일무장투쟁도, 3․1 만세운동에 대한 참가도, 그리고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심지어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 한국인들의 비난을 받는 이유다. 그들은 정치적인 면에서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거부하는 ‘정치무관심주의’를 내세웠다. 그리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일본 정부가 요청하는 사항들이 종교적인 측면을 건드리지 않는 한 최대한 협조하였고, 정부와의 관계가 긴밀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뮈텔 대주교와 드망즈 주교가 일본 정부에게 우호적이었던가? 드망즈 주교는 한일합방 이후에 주교가 되었고, 그 이후의 기록물만 남아 있기 때문에 한일 합방 이전에 조선 정부에 대한 인식과 자세를 살펴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뮈텔 주교에게서 나타난 모습은 분명 조선 정부에 대해서도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뮈텔 주교는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도움이 필요할 땐 기꺼이 도움이 되어주겠다고 약속까지 하였다. 다만 마찰과 갈등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경우는 늘 신자나 선교사들이 갈등의 중심에 있을 때, 곧 ‘교안’이라 불리는 사건에 대해서만 적극적이고 강력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강력하게 대처하는 모습은 일제강점기 속에서 일본 정부에게 가톨릭교회가 불이익을 당할 상황에서는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결국 뮈텔 주교의 기본 자세는 한일 합방 이전이든, 이후이든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가지 질문을 통하여 뮈텔 주교가 일본에 우호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던 상황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를 일본에 넘겨 합병조약을 체결하도록 부추긴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는 뮈텔 주교에게 이 합병이 불법이라고, 일본이 합법적 정부가 아니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이 관점에 뮈텔과 드망즈 주교가 펼쳤던 정책들을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그들이 펼쳤던 선교정책은 선대 주교들의 선교정책과 다르지 않다. 기본은 늘 신자들의 영혼 구원이었고, 현지인 성직자의 양성이었다. 현지인 성직자 양성을 위하여 예수 성심 신학교를 발전시키고자 노력했으며,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유지하고자 애를 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신자들의 영신 사정을 살피기 위하여 사목방문을 게을리 하지 않은 모습도 볼 수 있었고, 조선 땅에 특이하게 뿌리 내린 ‘회장제도’를 더욱 체계화 하여 조선의 실정에 맞게 사용하고 발전시키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뮈텔과 드망즈 주교의 문서를 통해서 선대 주교들은 하지 않았던 정책들도 살펴볼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 속에서 조선인들의 문맹률이 높다는 점을 고려하고, 또 그것이 한국인들에게 결코 좋은 영향은 주지 못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어려움 속에서도 교육 사업을 끊임없이 진행하였고, 조선의 미래와 조선 가톨릭교회의 미래를 고려하여 청년들을 육성하였으며, 복지 사업을 실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한 가톨릭 신자들이 일본의 수탈에 넘어가지 않도록 일본 정부에서 실시하는 새로운 법들을 해석하고, 이에 대처할 수 있는 방안도 선교사들로 하여금 마련해주도록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비록 이 모든 것은 ‘선교’라는 측면에 부합하는 것들이었으나, 실제적으로 조선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준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모습이야 말로 뮈텔과 드망즈 주교가 시대의 요청에 발맞춰 나아가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이런 노력은 조선에 머무는 가톨릭신자들에게 도움을 주었고, 조선에서 가톨릭교회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비록 그들의 보여준 모습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소극적인 움직임이었고, 비겁하게도 보일 수 있지만, 역사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들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인정해야 한다. 그들이 사목을 하는 조선인들의 심중을 더 헤아리고 민족의 아픔에 함께 하였다면 그들에 대한 입장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취한 자세 덕분에 지금의 가톨릭교회의 모습이 있는 것이다.
      역사는 과거를 통하여 현재를 바라보고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이미 한 세기 전에 살았고, 그 시대를 이끌었던 주교들은 자신들의 상황 안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낸 것이고 입장을 보여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그 일들에 대해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올바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일제강점기 속에서 이루어진 일들을 ‘반일감정’이라는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우리는 과거의 올바른 사실을 통해 현재를 바라보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과거의 사실을 올바로 규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왜곡된 과거의 사실과 편견을 통해 현재를 바라본다면 그 바라보는 현재 역시 왜곡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문이 일제강점기 한국교회사 연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또한 본 논문이 부족한 점이 많다는 점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 논문을 작성하면서 아쉬운 점도 많았다는 점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본 논문에 앞서 주교들의 ‘사목지도서’가 연구된 논문이 없었다는 것, 심지어 ‘서울대목구 사목지도서’는 번역조차 되어있지 않다는 것은 아직 한국교회 안에서 일제강점기에 대한 올바른 연구조차 진행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올바른 역사가 간과될 때에 우리의 현재도, 그리고 미래도 간과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후로 우리의 올바른 역사를 바라보고 현재를 조명하는 많은 ‘한국교회사’ 논문들이 나올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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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가장 뼈아픈 시기를 꼽으라고 한다면, 대부분은 1910년부터 35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일제강점기’를 꼽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제강점기 35년이란 시간동안 우...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가장 뼈아픈 시기를 꼽으라고 한다면, 대부분은 1910년부터 35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일제강점기’를 꼽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제강점기 35년이란 시간동안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인적, 물적으로 많은 수탈을 당하고 식민국가라는 이유로 억압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인에게 있어 일제강점기는 그 자체로 ‘아픔’이다. 그리고 이 시기의 역사를 더욱 아파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동족의 배신(背信)이다. 일진회를 비롯한 친일단체들이 우리나라를 일본에 넘겼고,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에 충성을 맹세한 한국인들은 같은 민족인 다른 한국인들을 억압하고 몸소 수탈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현대에 와서는 이처럼 일본의 정책에 협조하고 조력했던 사람들을 ‘친일파’라고 부르고 있으며, 2009년에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대사전』을 편찬하여 친일인명에 대한 명확한 규정집과 인명집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 대상에는 가톨릭계 인물들도 빠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노기남 대주교를 비롯한 10명의 가톨릭계 인사들이 친일인물로 등재되었다. 노기남 대주교는 한국인으로서 첫 교구장이었으나, 일제말기 ‘경성교구총동원연맹’의 수장으로서 일본의 요구에 협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친일인명대사전에 등재된 것이다. 그는 한국인으로서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고, 또 그들의 정책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들의 정책을 순순히 따라주었기 때문에, 민족을 배신하였다는 불명예를 안게 된 것이다.
      노기남 대주교는 일본의 정책에 대해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지탄을 받는 것은 노기남 대주교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를 이끌어 왔던 두 인물, 뮈텔 대주교와 드망즈 주교에게도 손가락은 향하였다. 이들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합병했을 무렵에 조선 가톨릭교회를 이끌었고, 가톨릭교회를 이끄는 주교의 입장에서 조선 가톨릭 신자들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그 내용에는 독립운동을 반대하고 항일 무장투쟁을 반대하였으며, 일본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주교들이었고, 프랑스인이었기 때문에 친일인명에 등재되지는 않았으나, 사회의 불합리한 모습에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노기남 대주교보다 더 큰 지탄을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가톨릭교회의 입장에서,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며, 사목자로서 그들의 행동이 어떤 부분에서 지탄을 받아야 했는지 분명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정말 지탄 받을 행동을 한 것인가? 그들이 취했던 행동들은 정말 잘못된 것이었나?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북경 교구에서 분리시켜 조선 대목구로 설정한 이래 약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조선 대목구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주교들에게 맡겨졌었는데, 그 가운데 3명은 순교 성인으로서 가톨릭교회 안에서 존경을 받고 있는데, 왜 이들은 교회의 부끄러움으로 남아있어야 하는가? 그들이 선대(先代) 주교들과 달리 행동한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을 던져보며 그들이 취한 정책들을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그들에 대한 평가가 객관적 입장에서 올바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올바로 살펴보기 위하여 논자는 선대 주교들, 특히 구체적인 선교 정책들을 남겨놓은 흔적을 찾아 ‘사목지도서’를 편찬한 주교들을 중심으로 선대 주교들의 선교정책과 뮈텔, 드망즈 주교의 선교정책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먼저 제4대 조선대목구장이며, 103위 순교성인 중 한 분인 베르뇌 주교는 우리나라에서 첫 시노드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이 시노드를 개최한 이유는 신자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시노드의 결과물인 「장주교윤시제우서」나 「사목서한」은 각각 신자들의 행동규범과 성직자들의 행동규범을 담고 있지만, 그 목적 자체는 신자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사목서한」은 그 동안 조선대목구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성직자들의 공통된 규범을 마련함으로써 사목자마다 가진 선교지의 문화, 풍습에 대한 이견들을 통일시키고, 신자들에게 올바른 모범을 보여주며, 그들의 영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구체적 지침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조선 제7대 대목구장인 블랑주교는 병인박해가 일어난 이후 피난한 선교사들과 함께 조선 2차 시노드를 함께하였고, 3차 시노드를 개최하여 『조선교회관례집』을 편찬하였다. 이 관례집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발판이 되었다. 왜냐하면 베르뇌 주교와는 달리 블랑 주교가 이 관례집을 편찬할 때의 시기는 모진 박해의 시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해가 아주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블랑주교에게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그 동안 박해시기라는 이유로 신자들에게 용인되었던 잘못된 관습들을 바로 잡고, 박해 시기 동안 발생한 배교자들을 다시 교회에 받아들이는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했다. 또한 종교의 자유가 주어질 조짐에 따라 선교사들의 행동 양식도 변화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이 관례집을 편찬하게 된 것이다. 결국 블랑 주교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신자들의 영혼 구원이었다. 이미 살펴보았던 베르뇌 주교도, 블랑 주교도 선교지에서 목숨 바쳐 사목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신자들의 영혼 구원’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자면 ‘현지인 성직자 양성’ 이었다. 각각 주교들은 1855년에 배론에 성 요셉 신학교를, 1885년에는 부엉골에 예수성심신학교를 세워 성직자 양성을 위해 노력하는 시발점을 마련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렇다면 뮈텔 대주교와 드망즈 주교는 어떠했는가? 그들이 질타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그들이 질타 받은 부분은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항일무장투쟁도, 3․1 만세운동에 대한 참가도, 그리고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심지어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 한국인들의 비난을 받는 이유다. 그들은 정치적인 면에서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거부하는 ‘정치무관심주의’를 내세웠다. 그리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일본 정부가 요청하는 사항들이 종교적인 측면을 건드리지 않는 한 최대한 협조하였고, 정부와의 관계가 긴밀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뮈텔 대주교와 드망즈 주교가 일본 정부에게 우호적이었던가? 드망즈 주교는 한일합방 이후에 주교가 되었고, 그 이후의 기록물만 남아 있기 때문에 한일 합방 이전에 조선 정부에 대한 인식과 자세를 살펴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뮈텔 주교에게서 나타난 모습은 분명 조선 정부에 대해서도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뮈텔 주교는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도움이 필요할 땐 기꺼이 도움이 되어주겠다고 약속까지 하였다. 다만 마찰과 갈등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경우는 늘 신자나 선교사들이 갈등의 중심에 있을 때, 곧 ‘교안’이라 불리는 사건에 대해서만 적극적이고 강력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강력하게 대처하는 모습은 일제강점기 속에서 일본 정부에게 가톨릭교회가 불이익을 당할 상황에서는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결국 뮈텔 주교의 기본 자세는 한일 합방 이전이든, 이후이든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가지 질문을 통하여 뮈텔 주교가 일본에 우호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던 상황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를 일본에 넘겨 합병조약을 체결하도록 부추긴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는 뮈텔 주교에게 이 합병이 불법이라고, 일본이 합법적 정부가 아니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이 관점에 뮈텔과 드망즈 주교가 펼쳤던 정책들을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그들이 펼쳤던 선교정책은 선대 주교들의 선교정책과 다르지 않다. 기본은 늘 신자들의 영혼 구원이었고, 현지인 성직자의 양성이었다. 현지인 성직자 양성을 위하여 예수 성심 신학교를 발전시키고자 노력했으며,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유지하고자 애를 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신자들의 영신 사정을 살피기 위하여 사목방문을 게을리 하지 않은 모습도 볼 수 있었고, 조선 땅에 특이하게 뿌리 내린 ‘회장제도’를 더욱 체계화 하여 조선의 실정에 맞게 사용하고 발전시키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뮈텔과 드망즈 주교의 문서를 통해서 선대 주교들은 하지 않았던 정책들도 살펴볼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 속에서 조선인들의 문맹률이 높다는 점을 고려하고, 또 그것이 한국인들에게 결코 좋은 영향은 주지 못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어려움 속에서도 교육 사업을 끊임없이 진행하였고, 조선의 미래와 조선 가톨릭교회의 미래를 고려하여 청년들을 육성하였으며, 복지 사업을 실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한 가톨릭 신자들이 일본의 수탈에 넘어가지 않도록 일본 정부에서 실시하는 새로운 법들을 해석하고, 이에 대처할 수 있는 방안도 선교사들로 하여금 마련해주도록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비록 이 모든 것은 ‘선교’라는 측면에 부합하는 것들이었으나, 실제적으로 조선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준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모습이야 말로 뮈텔과 드망즈 주교가 시대의 요청에 발맞춰 나아가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이런 노력은 조선에 머무는 가톨릭신자들에게 도움을 주었고, 조선에서 가톨릭교회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비록 그들의 보여준 모습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소극적인 움직임이었고, 비겁하게도 보일 수 있지만, 역사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들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인정해야 한다. 그들이 사목을 하는 조선인들의 심중을 더 헤아리고 민족의 아픔에 함께 하였다면 그들에 대한 입장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취한 자세 덕분에 지금의 가톨릭교회의 모습이 있는 것이다.
      역사는 과거를 통하여 현재를 바라보고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이미 한 세기 전에 살았고, 그 시대를 이끌었던 주교들은 자신들의 상황 안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낸 것이고 입장을 보여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그 일들에 대해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올바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일제강점기 속에서 이루어진 일들을 ‘반일감정’이라는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우리는 과거의 올바른 사실을 통해 현재를 바라보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과거의 사실을 올바로 규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왜곡된 과거의 사실과 편견을 통해 현재를 바라본다면 그 바라보는 현재 역시 왜곡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문이 일제강점기 한국교회사 연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또한 본 논문이 부족한 점이 많다는 점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 논문을 작성하면서 아쉬운 점도 많았다는 점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본 논문에 앞서 주교들의 ‘사목지도서’가 연구된 논문이 없었다는 것, 심지어 ‘서울대목구 사목지도서’는 번역조차 되어있지 않다는 것은 아직 한국교회 안에서 일제강점기에 대한 올바른 연구조차 진행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올바른 역사가 간과될 때에 우리의 현재도, 그리고 미래도 간과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후로 우리의 올바른 역사를 바라보고 현재를 조명하는 많은 ‘한국교회사’ 논문들이 나올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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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Ⅰ. 서론 1
      • 1. 문제제기 1
      • 2. 연구 범위 및 목적 2
      • Ⅰ. 서론 1
      • 1. 문제제기 1
      • 2. 연구 범위 및 목적 2
      • Ⅱ. 본론 6
      • 1. 베르뇌 주교 문서에 나타난 대한인식과 선교정책 6
      • 1.1. 베르뇌 주교의 대한인식 6
      • 1.2. 사천 시노드와 조선교구 제 1차 시노드 9
      • 1.2.1. 사천 시노드의 개최 9
      • 1.2.2. 사천 시노드의 영향과 의의 11
      • 1.2.3. 조선교구 1차 시노드 12
      • 1.2.4. 조선교구 1차 시노드의 의의 13
      • 1.3. 「장주교윤시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 14
      • 1.4. 「장주교 사목서한」 22
      • 1.4.1. 서문 22
      • 1.4.2. 본문 24
      • 1.4.2.1. 전반부 25
      • 1.4.2.2. 후반부 - 사천 시노드 교령에 게재된 사항과 부가된 사항들 28
      • 2. 블랑 주교 문서에 나타난 대한인식과 선교정책 31
      • 2.1. 병인박해 이후의 교회와 시노드 31
      • 2.1.1. 조선교구 제 2차 시노드 31
      • 2.1.2. 조선교구 제 3차 시노드 34
      • 2.2. 『조선 교회 관례집』에 나타난 블랑 주교의 대한인식 36
      • 2.3. 『조선 교회 관례집』 40
      • 3. 뮈텔 주교 문서에 나타난 대한인식과 선교정책 44
      • 3.1. 파리 외방전교회 44
      • 3.1.1. 정교분리원칙과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원칙 45
      • 3.1.1.1. 정교분리원칙 46
      • 3.1.1.2. 한국에서의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정책 48
      • 3.2. 『뮈텔 주교 일기』에 나타난 대한인식과 자세 50
      • 3.2.1. 뮈텔 주교의 대한인식(對韓認識) 50
      • 3.2.1.1. 조선정부에 대한 인식(한일합방이전까지) 50
      • 3.2.1.2. 조선 사회에 대한 인식 57
      • 3.2.1.3. 교안(敎案)에 대한 인식 60
      • 3.2.1.4. 한일합방 그 이후의 사회에 대한 인식 64
      • 3.2.2. 뮈텔 주교의 자세 66
      • 3.2.2.1. 조선인에 대한 뮈텔 주교의 자세 67
      • 3.2.2.2. 정부와 교회간의 관계에 있어서의 자세 71
      • 3.3. 뮈텔문서에 나타난 선교정책 72
      • 3.3.1. 『서울 교구연보』 72
      • 3.3.1.1. 교육사업 74
      • 3.3.1.2. 복지사업 78
      • 3.3.1.3. 가톨릭 청년회 육성 79
      • 3.3.1.4. 한국인 성직자 양성 81
      • 3.3.1.5. 교구 연보에 나타난 부정적인 시각과 아쉬움 82
      • 3.3.2. 『회장직분』 87
      • 3.3.2.1. 『회장직분』의 배경과 목적 88
      • 3.3.2.2. 『회장직분』의 주요내용과 회장의 역할 89
      • 3.3.2.3. 『회장직분』에 나타난 선교정책 93
      • 4. 드망즈 주교 문서에 나타난 대한인식과 선교정책 97
      • 4.1. 『드망즈 주교 일기』에 나타난 대한인식과 선교정책 97
      • 4.1.1. 일제강점기 드망즈 주교의 한국교회에 대한 인식(認識) 98
      • 4.1.2. 드망즈 주교의 선교정책 100
      • 4.1.2.1. 조선인에 대한 정책 100
      • 4.1.2.2. 정부와의 관계 안에서의 정책과 인식 103
      • 4.2. 드망즈 문서 105
      • 4.2.1. 『대구대목구 사목지침서』 106
      • 4.2.1.1. 배경과 주요내용 106
      • 4.2.1.2. 『대구대목구 사목지침서』에 나타난 선교정책 108
      • 4.2.2. 『회장의 본분』 115
      • 4.2.2.1. 『회장의 본분』의 주요내용 115
      • 4.2.2.2. 『회장의 본분』에 나타난 선교정책 117
      • 4.2.3. 공문서 122
      • 5. 주교들의 대한인식과 선교정책 비교 127
      • 5.1. 대한인식의 비교 128
      • 5.2. 선교정책의 비교 129
      • Ⅲ. 결론 135
      • 국문초록(ABSTRACT) 138
      • 참고문헌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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