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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초기 불교계와 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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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고달사는 중국에서 귀국한 원감대사 현욱이 혜목산 기슭에서 자리를 잡는 데서부터 비롯하였다. 그러나 정식 창건은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한 지 20년 이상 지난 뒤인 861-868년 사이에 신라 경문왕이 현욱을 위해 고달사라는 사찰을 지어준 때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현욱은 신라 진골출신으로 친신라적이며 친왕실적인 입장을 취하였는데, 특히 경문왕과는 정치적으로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경문왕이 현욱을 위해 고달사를 지어준 것이라고 이해된다.
      현욱의 제자로 이관과 심희가 있었는데, 현욱의 법통은 심희가 이었다. 심희는 가야왕족 출신의 신김씨로 김유신의 후손이었는데, 그가 태어날 당시는 진골신분에서 벗어나 있었는 듯하다. 그는 9세 때 혜목산으로 출가하여 현욱의 제자가 되었으나, 현욱이 사망하자 송계선원(전남 강진), 설악(강원 양양의 선림원지)를 거쳐 명주에 머무르다가 마침내 김해에 자리잡고 봉림사를 개창하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여러 곳을 전전한 정치적 이유는 반후백제ㆍ 반궁예적 성향 때문이었다고 생각되며, 한때 소극적이었던 대신라 입장도 고려의 건국을 계기로 하여 적극적인 친신라정책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는 봉림사를 창건하면서 고달사의 전통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명하였는데,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그의 사상이나 정치적 입장은 스승인 현욱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유학을 거부한 순수국내파 승려로 선에 철저하던 그의 봉림사에는 제자가 500여명이나 되었고, 당시 여러 종파의 많은 고승들이 이절을 거쳐가는 등 전성기를 맞았지만, 그의 친신라적인 입장은 고달사와의 실질적인 관련을 끊게 만드는 것이었고, 봉림사의 몰락도 재촉하였다.
      그의 제자 찬유는 24세 때 중국으로 유학을 가서 30년만에 귀국하였다. 그는 심희가 죽자마자 곧 태조를 찾아가 귀부하고, 고려 국왕들의 후대를 받으면서 고달사를 재건하였다. 그러나 그는 스승의 정치적 노선을 벗어나 친고려적인 입장을 취하였고, 스승의 사상과 달리 선교선일치적인 성향도 나타냈다. 특히 그는 재위 초년에 개혁의 방향을 적극 모색하던 광종을 도왔는데, 특히 승과의 실시라든가 법안종의 도입에 공헌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광종 때 국사로 책봉되고, 고달원은 3부동선원의 하나로 지정되는 등 고달사의 부흥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후 고달사가 천태종 사원으로 흡수되면서 고달사는 불교사의 전면에서 밀려나고, 다시는 옛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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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달사는 중국에서 귀국한 원감대사 현욱이 혜목산 기슭에서 자리를 잡는 데서부터 비롯하였다. 그러나 정식 창건은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한 지 20년 이상 지난 뒤인 861-868년 사이에 신라 경...

      고달사는 중국에서 귀국한 원감대사 현욱이 혜목산 기슭에서 자리를 잡는 데서부터 비롯하였다. 그러나 정식 창건은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한 지 20년 이상 지난 뒤인 861-868년 사이에 신라 경문왕이 현욱을 위해 고달사라는 사찰을 지어준 때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현욱은 신라 진골출신으로 친신라적이며 친왕실적인 입장을 취하였는데, 특히 경문왕과는 정치적으로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경문왕이 현욱을 위해 고달사를 지어준 것이라고 이해된다.
      현욱의 제자로 이관과 심희가 있었는데, 현욱의 법통은 심희가 이었다. 심희는 가야왕족 출신의 신김씨로 김유신의 후손이었는데, 그가 태어날 당시는 진골신분에서 벗어나 있었는 듯하다. 그는 9세 때 혜목산으로 출가하여 현욱의 제자가 되었으나, 현욱이 사망하자 송계선원(전남 강진), 설악(강원 양양의 선림원지)를 거쳐 명주에 머무르다가 마침내 김해에 자리잡고 봉림사를 개창하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여러 곳을 전전한 정치적 이유는 반후백제ㆍ 반궁예적 성향 때문이었다고 생각되며, 한때 소극적이었던 대신라 입장도 고려의 건국을 계기로 하여 적극적인 친신라정책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는 봉림사를 창건하면서 고달사의 전통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명하였는데,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그의 사상이나 정치적 입장은 스승인 현욱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유학을 거부한 순수국내파 승려로 선에 철저하던 그의 봉림사에는 제자가 500여명이나 되었고, 당시 여러 종파의 많은 고승들이 이절을 거쳐가는 등 전성기를 맞았지만, 그의 친신라적인 입장은 고달사와의 실질적인 관련을 끊게 만드는 것이었고, 봉림사의 몰락도 재촉하였다.
      그의 제자 찬유는 24세 때 중국으로 유학을 가서 30년만에 귀국하였다. 그는 심희가 죽자마자 곧 태조를 찾아가 귀부하고, 고려 국왕들의 후대를 받으면서 고달사를 재건하였다. 그러나 그는 스승의 정치적 노선을 벗어나 친고려적인 입장을 취하였고, 스승의 사상과 달리 선교선일치적인 성향도 나타냈다. 특히 그는 재위 초년에 개혁의 방향을 적극 모색하던 광종을 도왔는데, 특히 승과의 실시라든가 법안종의 도입에 공헌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광종 때 국사로 책봉되고, 고달원은 3부동선원의 하나로 지정되는 등 고달사의 부흥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후 고달사가 천태종 사원으로 흡수되면서 고달사는 불교사의 전면에서 밀려나고, 다시는 옛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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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Kodal-sa(高達寺) Temple at Yeoju(驪州) was founded by King Kyeongmun(景文) of Shilla Dynasty from the year 861 to 868, in favor of Monk Hyeonuk(玄昱, 787-868) of the Contemplative Buddhism, because the latter took the side of Shilla's royal court in terms of politics.

      Shimhee(審希, 855-923), Hyeonuk's disciple, opened the Bongrim-sa(鳳林寺) Temple School with the foundation of the namesake temple, and took over the religious heritage and political stance of the Kodal-sa Temple. His excessive pro-Shilla policy, however, led to the decline of the school with the collapse of the dynasty.

      In contrast to his master, Chanyoo(璨幽, 869-958), Shimhee's disciple, accepted the doctrine of the Unity-of-Contemplation-and-Text, while declaring his allegiance to Koryo Dynasty.

      Also, he actively supported King Kwangjong(光宗) who made every effort to strengthen royal sovereignty. In the event, Kodal-sa Temple emerged again to be one of the major temples in the early Koryo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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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Kodal-sa(高達寺) Temple at Yeoju(驪州) was founded by King Kyeongmun(景文) of Shilla Dynasty from the year 861 to 868, in favor of Monk Hyeonuk(玄昱, 787-868) of the Contemplative Buddhism, because the latter took the side of Shilla's roy...

      The Kodal-sa(高達寺) Temple at Yeoju(驪州) was founded by King Kyeongmun(景文) of Shilla Dynasty from the year 861 to 868, in favor of Monk Hyeonuk(玄昱, 787-868) of the Contemplative Buddhism, because the latter took the side of Shilla's royal court in terms of politics.

      Shimhee(審希, 855-923), Hyeonuk's disciple, opened the Bongrim-sa(鳳林寺) Temple School with the foundation of the namesake temple, and took over the religious heritage and political stance of the Kodal-sa Temple. His excessive pro-Shilla policy, however, led to the decline of the school with the collapse of the dynasty.

      In contrast to his master, Chanyoo(璨幽, 869-958), Shimhee's disciple, accepted the doctrine of the Unity-of-Contemplation-and-Text, while declaring his allegiance to Koryo Dynasty.

      Also, he actively supported King Kwangjong(光宗) who made every effort to strengthen royal sovereignty. In the event, Kodal-sa Temple emerged again to be one of the major temples in the early Koryo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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