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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씨개명’과 친일 조선인의 협력 = Imperialist Japanese Enforcing the Change of Surname in Joseon, and the Activities of Korean Collabora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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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82645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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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창씨개명은 일제가 조선인에게 강요한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실시된 것이었다. 그 목적은 조선인의 생각과 마음을 일본인과 똑같이 만들려는 민족성 말살이었다. 조선 민중들의 머리 속에서 조선민족이라는 의식을 완전히 없애고 대신 그 자리에 일본 민족의 일원이라는 인식을 주입하기 위해 시행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 실시 날짜도 일제가 일본민족의 기원일로 기리고 있는 ‘2600년 기원절’로 잡았다.
      창씨제가 실시된 목적은 일본식 ‘家’제도를 도입하여 조선의 각 가정을 일본 천황을 종가로 하여 천황제를 지탱하는 기초로 삼는다는 것, 황국신민화의 일환이라는 점이 지적되어 왔다. 필자는 이에 덧붙여 자신의 실적을 과시하고 싶어 했던 총독 남차랑의 욕심이 더해졌던 것이라 보았다.
      제도 시행 초기에 이 제도에 호응하는 조선인은 많지 않았다. 겉으로는 강제성을 부정하면서도 속으로는 억지로라도 시키고 싶었던 조선총독의 의지에 따라 일제는 실적을 높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도별 실적을 공표하여 도별 경쟁을 유도했고, 신고가 마감된 이후에는 실적 비율을 높이기 위해 호적 총수 대신에 ‘실재 호적수’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모집단의 비중을 낮추면서 통계수치를 아전인수식으로 이용했다.
      이 제도가 실시되는 과정에 친일 조선인이 협력한 사례로는 크게 네가지 방식이 있었다. 맨 먼저는 사법법규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창씨제 실시를 위한 법안 마련에 참여한 이승우 등의 경우이다. 두 번째는 솔선하여 창씨와 개명을 한 행위로 종래의 姓 · 본관과 무관한 씨를 창설하고 일본식으로 개명하여 창씨제 실시 초기에 신고를 마친 경우이다. 세 번째는 창씨를 독려한 행위이다. 관리로서 솔선 창씨하고 창씨를 독려한 조선총독부 고등관들의 사례, 글과 강연을 통한 권유 선전한 이광수 등의 사례 등이 이에 속한다. 네 번째 창씨제 실시에 대한 감사표시 행위인데, 감사문 발송 결의 주도, 국방헌금 기부, 기념탑 제작 전달 등이 이에 속한다.
      친일 조선인이 창씨제 시행과정에서 보였던 이와 같은 협력 행위를 명확히 밝혀내고 그들에게 역사적 책임을 묻는다면, 이들의 협력 행위와는 달리 문중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창씨를 결정하고, 문중회의의 결정에 따라 창씨 신고를 이행한 대다수 조선민중에게 씌워진‘친일’ 혐의는 벗겨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창씨=친일’이라는 오해를 대중적으로 확산시켜 창씨개명과 관련된 친일문제의 책임을 희석시키려는 ‘친일 청산’ 방해 세력의 시도를 무력화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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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씨개명은 일제가 조선인에게 강요한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실시된 것이었다. 그 목적은 조선인의 생각과 마음을 일본인과 똑같이 만들려는 민족성 말살이었다. 조선 민중들의 ...

      창씨개명은 일제가 조선인에게 강요한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실시된 것이었다. 그 목적은 조선인의 생각과 마음을 일본인과 똑같이 만들려는 민족성 말살이었다. 조선 민중들의 머리 속에서 조선민족이라는 의식을 완전히 없애고 대신 그 자리에 일본 민족의 일원이라는 인식을 주입하기 위해 시행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 실시 날짜도 일제가 일본민족의 기원일로 기리고 있는 ‘2600년 기원절’로 잡았다.
      창씨제가 실시된 목적은 일본식 ‘家’제도를 도입하여 조선의 각 가정을 일본 천황을 종가로 하여 천황제를 지탱하는 기초로 삼는다는 것, 황국신민화의 일환이라는 점이 지적되어 왔다. 필자는 이에 덧붙여 자신의 실적을 과시하고 싶어 했던 총독 남차랑의 욕심이 더해졌던 것이라 보았다.
      제도 시행 초기에 이 제도에 호응하는 조선인은 많지 않았다. 겉으로는 강제성을 부정하면서도 속으로는 억지로라도 시키고 싶었던 조선총독의 의지에 따라 일제는 실적을 높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도별 실적을 공표하여 도별 경쟁을 유도했고, 신고가 마감된 이후에는 실적 비율을 높이기 위해 호적 총수 대신에 ‘실재 호적수’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모집단의 비중을 낮추면서 통계수치를 아전인수식으로 이용했다.
      이 제도가 실시되는 과정에 친일 조선인이 협력한 사례로는 크게 네가지 방식이 있었다. 맨 먼저는 사법법규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창씨제 실시를 위한 법안 마련에 참여한 이승우 등의 경우이다. 두 번째는 솔선하여 창씨와 개명을 한 행위로 종래의 姓 · 본관과 무관한 씨를 창설하고 일본식으로 개명하여 창씨제 실시 초기에 신고를 마친 경우이다. 세 번째는 창씨를 독려한 행위이다. 관리로서 솔선 창씨하고 창씨를 독려한 조선총독부 고등관들의 사례, 글과 강연을 통한 권유 선전한 이광수 등의 사례 등이 이에 속한다. 네 번째 창씨제 실시에 대한 감사표시 행위인데, 감사문 발송 결의 주도, 국방헌금 기부, 기념탑 제작 전달 등이 이에 속한다.
      친일 조선인이 창씨제 시행과정에서 보였던 이와 같은 협력 행위를 명확히 밝혀내고 그들에게 역사적 책임을 묻는다면, 이들의 협력 행위와는 달리 문중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창씨를 결정하고, 문중회의의 결정에 따라 창씨 신고를 이행한 대다수 조선민중에게 씌워진‘친일’ 혐의는 벗겨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창씨=친일’이라는 오해를 대중적으로 확산시켜 창씨개명과 관련된 친일문제의 책임을 희석시키려는 ‘친일 청산’ 방해 세력의 시도를 무력화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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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Imperialist Japan, especially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enforced Korean people to change their surname from Korean style, Seong(姓) to Japanese style, Ssi(氏) in 1940. The changing of Koreans’ surname Policy by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was to enforce Korean people to make their thoughts and minds to same to Japanese things.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tried to efforts to increase the number of Koreans who registered new surname, although the Governor-general, Minami Jiro denied the Registration of new surname, Japanese style, Ssi(氏) was not compulsion.
      Part of Korean who were pro-Japanese rule also collaborated to increase the number of Koreans who registered new surname. Collaboration were four types.
      First, engaging to prepare a bill, as the member of the Council for revision of the relevant regulation. Second, Registering of both Japanese surname and name, not only surname but name early. Third, Being a pioneer who registered new surname early than mass Korean, and propagating the registration of new surname by contributing a column to newspaper and giving a lecture. And the last, expressing their gratitude for changing surname policy, for example, leading to make resolution to send a letter of thanks to the Governor-general, donating political contribution to Imperialist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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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perialist Japan, especially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enforced Korean people to change their surname from Korean style, Seong(姓) to Japanese style, Ssi(氏) in 1940. The changing of Koreans’ surname Policy by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

      Imperialist Japan, especially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enforced Korean people to change their surname from Korean style, Seong(姓) to Japanese style, Ssi(氏) in 1940. The changing of Koreans’ surname Policy by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was to enforce Korean people to make their thoughts and minds to same to Japanese things.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tried to efforts to increase the number of Koreans who registered new surname, although the Governor-general, Minami Jiro denied the Registration of new surname, Japanese style, Ssi(氏) was not compulsion.
      Part of Korean who were pro-Japanese rule also collaborated to increase the number of Koreans who registered new surname. Collaboration were four types.
      First, engaging to prepare a bill, as the member of the Council for revision of the relevant regulation. Second, Registering of both Japanese surname and name, not only surname but name early. Third, Being a pioneer who registered new surname early than mass Korean, and propagating the registration of new surname by contributing a column to newspaper and giving a lecture. And the last, expressing their gratitude for changing surname policy, for example, leading to make resolution to send a letter of thanks to the Governor-general, donating political contribution to Imperialist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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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1. 머리말
      • 2. 창씨제 실시를 위한 준비
      • 3. 창씨제 실시 과정과 결과
      • 4. 친일 조선인의 협력
      • 5. 맺음말
      • 1. 머리말
      • 2. 창씨제 실시를 위한 준비
      • 3. 창씨제 실시 과정과 결과
      • 4. 친일 조선인의 협력
      • 5. 맺음말
      • 참고문헌
      • 국문요약
      • 영문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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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정주수, "「창씨개명연구」 1~6, 『사법행정』"

      2 민족문제연구소, "「제79회 제국의회 설명자료」(1941년 12월) in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 제13권" 제13권,한국학술정보 2000

      3 민족문제연구소, "「제77회 제국의회 설명자료」(1941년 11월) in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 제5권" 한국학술정보 2000

      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赤手空拳으로 成功한 商界人物」, 『삼천리』 제7권 제8호"

      5 민족문제연구소, "「昭和十六年上奏書」(1941년 5월) in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 제25권" 한국학술정보 2000

      6 민족문제연구소, "「昭和十五年上奏書」(1940년 5월) in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 제25권" 한국학술정보 2000

      7 한설야, "한설야 단편선" 박문서관 1941

      8 정욱재, "한말·일제하의 유림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9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2009

      10 임종국, "친일문학론" 평화출판사 1966

      1 정주수, "「창씨개명연구」 1~6, 『사법행정』"

      2 민족문제연구소, "「제79회 제국의회 설명자료」(1941년 12월) in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 제13권" 제13권,한국학술정보 2000

      3 민족문제연구소, "「제77회 제국의회 설명자료」(1941년 11월) in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 제5권" 한국학술정보 2000

      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赤手空拳으로 成功한 商界人物」, 『삼천리』 제7권 제8호"

      5 민족문제연구소, "「昭和十六年上奏書」(1941년 5월) in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 제25권" 한국학술정보 2000

      6 민족문제연구소, "「昭和十五年上奏書」(1940년 5월) in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 제25권" 한국학술정보 2000

      7 한설야, "한설야 단편선" 박문서관 1941

      8 정욱재, "한말·일제하의 유림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9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2009

      10 임종국, "친일문학론" 평화출판사 1966

      11 미즈노 나오키, "창씨개명-일본의 조선지배와 이름의 정치학" 산처럼 2008

      12 정운현, "창씨개명" 학민사 1994

      13 이승일, "조선총독부 법제 정책" 역사비평사 2008

      14 김원모, "영마루의 구름-春園 李光洙의 親日과 民族保存論-"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9

      15 정재정, "식민통치의 허상과 실상" 혜안

      16 이광수, "동포에 告함" 철학과 현실사 1997

      17 朝鮮總督府, "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41

      18 朝鮮總督官房調査課, "朝鮮昭和十五年國勢調査結果要約" 1944

      19 "愛國班 家庭用 諺文防共讀本" 박문서관 1941

      20 박종화, "多情佛心" 박문서관 1942

      21 水野直樹, "創氏改名-日本の朝鮮支配の中で" 岩波書店 2008

      22 金英達, "創氏改名の硏究" 未來社 1997

      23 金英達, "創氏改名の法制度と歷史" 明石書店 2002

      24 宮田節子, "創氏改名" 明石書店 1992

      25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 관계사료집』 Ⅷ" 2009

      26 "『조선총독부관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만선일보』"

      27 "『通報』 제75호" 조선총독부 1940

      28 "『通報』 제74호" 조선총독부 1940

      29 "『朝鮮』 제305호" 조선총독부 1940

      30 "『朝鮮』 제303호" 조선총독부 1940

      31 "『思想彙報』 제25호"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 1940

      32 "『思想彙報』 제23호"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 1940

      33 판원진일, "“明治民法”의 성씨제도와 “創氏改名”(朝鮮)“改姓名”(臺灣)의 비교분석" 한국법사학회 (22) : 155-190, 2000

      34 宮田節子, "‘創氏改名’에 대하여 in 벽사 이우성교수 정년퇴직 기념논총 민족사의 전개와 그 문화』 하" 창작과 비평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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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7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7-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6-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FAIL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5-05-20 학술지등록 한글명 :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외국어명 : JOURNAL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STUDIES
      KCI등재후보
      2005-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4-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3-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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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59 0.59 0.61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64 0.62 1.442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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