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 혹은 생계비’라는 NUWM의 설립목표에는 실업보험 체제와 관련한 보편적 사회적 시민권의 개념이 깔려있었다. 그러나 1931년 말-1932년 10월의 ‘생계비테스트의 위기’ 때 NUWM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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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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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 혹은 생계비’라는 NUWM의 설립목표에는 실업보험 체제와 관련한 보편적 사회적 시민권의 개념이 깔려있었다. 그러나 1931년 말-1932년 10월의 ‘생계비테스트의 위기’ 때 NUWM은 자...
‘일자리 혹은 생계비’라는 NUWM의 설립목표에는 실업보험 체제와 관련한 보편적 사회적 시민권의 개념이 깔려있었다. 그러나 1931년 말-1932년 10월의 ‘생계비테스트의 위기’ 때 NUWM은 자신이 주장해온 보편적 사회적 시민권에 기초한 실업보험 체제를 끝까지 요구하지 않고, 선택적 사회적 시민권 개념에 기초한 이중 실업보험 체제가 존속하는 가운데 보다 관대한 실업수당과 공적 실업부조를 약속한 정부의 제안에 만족하고 말았다. 이런 현상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먼저, 공산당과 연계되어 혁명적 성격을 갖고 있던 지도부와 달리, NUWM의 각 지방 조직들은 사실 이데올로기나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지방 조직의 운영과 재정 면에서 지도부의 통제를 벗어나 상당한 수준의 자치를 누리고 있었다. 이들의 가장 주된 관심사는 더 많은 액수의 실업 구제금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위기’ 시에 이들이 주장한 ‘일자리 혹은 생계비’라는 모토는 기존의 정치·경제체제와 주어진 실업보험 체제 내에서의 보다 높은 수준의 실업수당과 공적 실업부조와 실업자들의 생활수준의 개선을 의미하는 것이었지, 사회주의적 성격을 띠면서 체제의 변혁을 요구하는 보편적 사회적 시민권을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NUWM의 담론과 실제 행동은 달랐던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NUWM이 노동운동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노동당과 노동조합회의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한 것이다. 체제 내에서의 개혁을 추구하던 노동당은 그들의 선전과 달리, 선택적 사회적 시민권에 기초한 기존의 이중 실업보험 체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할 의도가 없었으며, 혁명적 성격을 띤 공산당과 이와 연계된 NUWM이 실업자를 포함한 노동자들의 대표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이들과의 연대를 거부했다. 이렇게 NUWM 지도부와 평 운동원들 사이의 목표의 차이와 좌파세력들 간의 분열로 인해 NUWM은 ‘생계비테스트의 위기’라는 호기를 맞고서도 노동자들을 위한 보편적 사회적 시민권을 끝까지 강력히 추진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공적 실업부조 체제의 운영이 지방선거로 선출된 관리들이 담당하던 PAC 체제에서 중앙정부가 임명하는 관리들이 운영하는 UAB 체제로 바뀜으로써, 실업노동자들의 생계와 직결된 공적 실업부조의 액수 결정과 관련하여 실업자들 자신이 지방정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민주적 통제’ 방법을 영원히 상실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NUWM은 ‘UAB의 위기’라는 호기를 맞아 이에 끝까지 저항하지 않고 정부가 더 관대한 공적 실업부조의 지급을 약속하자 이상하리만큼 금방 물러서고 말았는가?
이런 결과는 다음의 원인들에 의해 초래되었다. 먼저, NUWM 지도부는 자신이 타도해야 할 대상이 자본주의 국가라고 규정했지만,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이 국가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또 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명확히 규정하지 않았고, 나아가 UAB 체제가 실업노동자들에게 미칠 영향의 진정한 의미, 즉 실업자들의 지방정부에 대한 ‘민주적 통제’권의 상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UAB 체제와 정지법이 자본주의 국가의 재정적 안정성을 약화시켜 이 국가의 몰락을 더욱 촉진시킬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한편, 정치나 이데올로기에 무관심했던 NUWM의 평 운동원들은 새로운 체제의 의미를 더욱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이들이 주장하는 ‘일자로 혹은 생계비’에 담긴 보편적 사회적 시민권의 개념은 사회주의적이라기보다는 사회민주주의적인 것이었으며, 기존의 정치경체체제 내에서 국가의 보다 적극적 개입을 통한 자신들의 생활수준의 향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UAB 체제가 담보하고 있는 이런 국가의 개입이 정지법을 통해 공적 실업부조의 액수를 유지 내지 증가시킬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자, 즉각 UAB 체제를 수용했으며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생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자신들의 민주적 통제력의 상실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나아가 이번에도 NUWM은 노동운동의 주류와의 연대 형성에 실패했으며, 노동당과 노동조합회의도 더 많은 실업 구제금에 만족하고 물러났다. 더욱이 두 ‘위기’ 이후 공적 실업부조나 실업수당의 수준이 지방의 최저임금 수준과 유사한 경우도 많았으며, 1933년 이후 경기가 서서히 회복되면서 실업률이 점진적이나마 하락하면서 실업자들의 생활수준도 조금씩 향상되고 있었던 점도 이런 결과를 초래한 원인 중의 하나였다.
국문 초록 (Abstract)
<연수진행 중간보고서> Ⅰ.당초 연구계획 1.당초 연구목적 및 배경 2.당초 연구내용, 범위 및 방법 Ⅱ.실적 및 향후 계획 1.당초 연구계획 대비 현재까지 진...
<연수진행 중간보고서>
Ⅰ.당초 연구계획
1.당초 연구목적 및 배경
2.당초 연구내용, 범위 및 방법
Ⅱ.실적 및 향후 계획
1.당초 연구계획 대비 현재까지 진행된 연구내용 및 결과
2.당초 연구계획 대비 향후 연구내용, 방법, 기대효과 등
3.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