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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호적대장을 통해 본 고공의 노동성격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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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5986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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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이 연구는 1609년부터 1795년까지 약 200년간 경상도 울산군의 호적대장에서 발췌한 장기시계열 자료를 사용하여 호적에 입안된 고공의 사회․경제적 특성을 미시적으로 살펴보았다. 특히, 기존 단성과 언양, 대구의 호적대장을 통한 고공 연구 성과와 비교한 결과 보다 폭넓게 고공의 성격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본 연구의 결과에서 18세기 중반 이후의 울산 호적에 명기된 고공은 日雇, 季雇와 같은 단기고공이 아니라 대체로 장기고공이며, 고공의 성격이 시기에 따라 점차 변화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고공은 1759년을 전후하여 노동성격이 점차 변화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1759∼1765년 이전에는 고공의 숫자가 증가하였고, 고공은 주로 농업생산을 목적으로 고용된 비교적 신분이 자유로운 임노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고공의 숫자가 점차 감소하고 있었다. 특히 18세기 중후반 이후 고공은 여성화, 연소화 되었으며 고공계약은 장기화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호적에 입안된 장기고공은 급속히 줄어들고 결국 19세기 초반에는 호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고공의 성격 변화는 노비나 장기고공에 비해 노동생산성이 높을 뿐 아니라 수시로 고용이 가능한 단기고공의 광범한 사회적 존재와 1783년 고공법제의 개정으로 인해 호적에 올리는 고공의 경우는 고용주와 최소한 5년 이상 계약해야만 했던 사실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 같은 결과는 앞서 제출된 단성호적대장이나 언양호적대장의 고공 분석 결과와도 거의 일치한다. 따라서 이 연구는 조선후기 호적대장에 등재된 고공의 성격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는 또 하나의 사례로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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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연구는 1609년부터 1795년까지 약 200년간 경상도 울산군의 호적대장에서 발췌한 장기시계열 자료를 사용하여 호적에 입안된 고공의 사회․경제적 특성을 미시적으로 살펴보았다. 특히, 기...

      이 연구는 1609년부터 1795년까지 약 200년간 경상도 울산군의 호적대장에서 발췌한 장기시계열 자료를 사용하여 호적에 입안된 고공의 사회․경제적 특성을 미시적으로 살펴보았다. 특히, 기존 단성과 언양, 대구의 호적대장을 통한 고공 연구 성과와 비교한 결과 보다 폭넓게 고공의 성격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본 연구의 결과에서 18세기 중반 이후의 울산 호적에 명기된 고공은 日雇, 季雇와 같은 단기고공이 아니라 대체로 장기고공이며, 고공의 성격이 시기에 따라 점차 변화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고공은 1759년을 전후하여 노동성격이 점차 변화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1759∼1765년 이전에는 고공의 숫자가 증가하였고, 고공은 주로 농업생산을 목적으로 고용된 비교적 신분이 자유로운 임노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고공의 숫자가 점차 감소하고 있었다. 특히 18세기 중후반 이후 고공은 여성화, 연소화 되었으며 고공계약은 장기화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호적에 입안된 장기고공은 급속히 줄어들고 결국 19세기 초반에는 호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고공의 성격 변화는 노비나 장기고공에 비해 노동생산성이 높을 뿐 아니라 수시로 고용이 가능한 단기고공의 광범한 사회적 존재와 1783년 고공법제의 개정으로 인해 호적에 올리는 고공의 경우는 고용주와 최소한 5년 이상 계약해야만 했던 사실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 같은 결과는 앞서 제출된 단성호적대장이나 언양호적대장의 고공 분석 결과와도 거의 일치한다. 따라서 이 연구는 조선후기 호적대장에 등재된 고공의 성격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는 또 하나의 사례로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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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study looked at the social and economic characteristics of Kogong designs microscopically, using long-term time series extracted from the family register in Ulsan County, Gyeongsang Province for about 200 years from 1609 to 1795. In particular, the results compared with the results of Kogong research through the family register in Dansung, Eonyang and Daegu region showed a broader change in the character of Kogong. The results of this study show that the ancient ball listed in Ulsan"s family registry after the mid-18th century is rising, that it is generally long-term, not short-term, and that the nature of Kogong is gradually changing with time. In particular, it is believed that the labor force gradually changed around 1759. Prior to 1759-1765, the number of Kogong areas increased, and the Kogong areas were relatively free of status mainly for agricultural production. However, since then, the number of high pitches has been decreasing. In particular, Kogong contracts have been prolonged since the mid and late 18th century. Along with this, the long-term hard work drafted in the family registry quickly decreased and eventually disappeared from the family registry in the early 19th century. This change in the nature of the Kogong work is believed to be related to the wide social presence of short-term workers who are not only more productive than their labor or long-term work, but also to the fact that they had to sign contracts with employers for at least five years due to the revision of the Kogong law in 1783. These results are in agreement with the results of the high-resolution analysis of the previously reported Household Register of Danseong or Household Register of Eonyang. Therefore, I think that this study is meaningful as another example that clearly confirms the character of the Kogong in the late Chosun family regi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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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study looked at the social and economic characteristics of Kogong designs microscopically, using long-term time series extracted from the family register in Ulsan County, Gyeongsang Province for about 200 years from 1609 to 1795. In particular, th...

      The study looked at the social and economic characteristics of Kogong designs microscopically, using long-term time series extracted from the family register in Ulsan County, Gyeongsang Province for about 200 years from 1609 to 1795. In particular, the results compared with the results of Kogong research through the family register in Dansung, Eonyang and Daegu region showed a broader change in the character of Kogong. The results of this study show that the ancient ball listed in Ulsan"s family registry after the mid-18th century is rising, that it is generally long-term, not short-term, and that the nature of Kogong is gradually changing with time. In particular, it is believed that the labor force gradually changed around 1759. Prior to 1759-1765, the number of Kogong areas increased, and the Kogong areas were relatively free of status mainly for agricultural production. However, since then, the number of high pitches has been decreasing. In particular, Kogong contracts have been prolonged since the mid and late 18th century. Along with this, the long-term hard work drafted in the family registry quickly decreased and eventually disappeared from the family registry in the early 19th century. This change in the nature of the Kogong work is believed to be related to the wide social presence of short-term workers who are not only more productive than their labor or long-term work, but also to the fact that they had to sign contracts with employers for at least five years due to the revision of the Kogong law in 1783. These results are in agreement with the results of the high-resolution analysis of the previously reported Household Register of Danseong or Household Register of Eonyang. Therefore, I think that this study is meaningful as another example that clearly confirms the character of the Kogong in the late Chosun family regi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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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초록
      • Ⅰ. 머리말
      • Ⅱ. 고공법제와 고공자료의 특징
      • Ⅲ. 고공과 고주호의 비중 변화
      • Ⅳ. 고공의 신분별, 성별, 연령별 변화
      • 국문초록
      • Ⅰ. 머리말
      • Ⅱ. 고공법제와 고공자료의 특징
      • Ⅲ. 고공과 고주호의 비중 변화
      • Ⅳ. 고공의 신분별, 성별, 연령별 변화
      • Ⅴ. 고공의 출입과 고주호의 신분 변화
      • Ⅵ.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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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姜勝浩, "龜泉元裕漢敎授定年紀念論叢, 下" 혜안 2000

      2 손병규, "호적" 휴머니스트 2007

      3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서울대학교출판부 1998

      4 崔潤晤, "조선후기「和雇」의 성격" 3 : 1990

      5 장경준, "조선후기 호적대장과 ‘戶’의 성격 –경상도지역 사례-" 부산대 2015

      6 鄭震英, "조선후기 호적 ‘호’의 새로운 이해와 그 전망" 대동문화연구원 42 : 137-169, 2003

      7 정진영, "조선후기 호적 ‘호’의 編制와 성격" 40 : 2002

      8 김희호, "조선후기 협호와 고공의 비교" 경제사학회 57 : 3-38, 2014

      9 박용숙, "조선후기 향촌사회사 연구" 혜안 2007

      10 이정수, "조선후기 토지소유계층과 지가 변동" 혜안 2011

      1 姜勝浩, "龜泉元裕漢敎授定年紀念論叢, 下" 혜안 2000

      2 손병규, "호적" 휴머니스트 2007

      3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서울대학교출판부 1998

      4 崔潤晤, "조선후기「和雇」의 성격" 3 : 1990

      5 장경준, "조선후기 호적대장과 ‘戶’의 성격 –경상도지역 사례-" 부산대 2015

      6 鄭震英, "조선후기 호적 ‘호’의 새로운 이해와 그 전망" 대동문화연구원 42 : 137-169, 2003

      7 정진영, "조선후기 호적 ‘호’의 編制와 성격" 40 : 2002

      8 김희호, "조선후기 협호와 고공의 비교" 경제사학회 57 : 3-38, 2014

      9 박용숙, "조선후기 향촌사회사 연구" 혜안 2007

      10 이정수, "조선후기 토지소유계층과 지가 변동" 혜안 2011

      11 김석희, "조선후기 지방사회사 연구" 혜안 2004

      12 심재우, "조선후기 사회변동과 호적대장 연구의 과제" 한국역사연구회 (62) : 223-246, 2006

      13 심재우, "조선후기 단성현 법물야면 유학호의 분포와 성격" 41 : 2001

      14 이정수, "조선후기 단성과 언양 호적대장에 나타난 雇工의 노동성격 비교" 부산경남사학회 (91) : 113-154, 2014

      15 이정수, "조선후기 노동양식 연구 –奴婢, 雇工과 挾戶의 비교" 민속원 2016

      16 김경란, "조선후기 국가의 賤人여성 파악실태와 편제방식 ― '단성현호적대장'의 ‘婢’ 기재양상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원 (52) : 191-222, 2005

      17 이정수, "조선후기 奴婢賣買 자료를 통해 본奴婢의 사회·경제적 성격과 奴婢價의 변동" 한국민족문화연구소 (31) : 363-408, 2008

      18 이정수, "조선후기 奴婢價 변동의 원인 -생산성과 노비관리비용을 중심으로-" 부경역사연구소 (23) : 171-208, 2008

      19 김건태, "조선시대 양반가의 농업경영" 역사비평사 2004

      20 이정수, "조선시대 노비와 토지 소유방식" 경북대학교출판부 2006

      21 허종호, "조선봉건말기의 소작제 연구" 사회과학원출판사 1965

      22 권내현, "조선 후기 호적, 호구의 성격과 새로운 쟁점" 한국사연구회 (135) : 279-303, 2006

      23 李宇衍, "맛질의 農民들 -韓國近世村落生活史-" 일조각 2001

      24 호적대장연구팀, "단성호적대장연구"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03

      25 全炯澤, "노비의 저항과 해방" 34 : 1996

      26 歷史學會, "노비 · 농노 · 노예 -隸屬民의 比較史-" 일조각 1998

      27 崔元奎, "韓末·日帝下의 農業經營에 관한 硏究 -海南 尹氏家의 事例-" (50·51) : 1985

      28 朴成壽, "雇工硏究" 18 : 1964

      29 "經國大典"

      30 "秋官志"

      31 "牧民心書"

      32 久間健一, "朝鮮農業の近代的樣相" 目黑書店 1935

      33 四方博, "朝鮮経濟の硏究" 京城帝國大學法學會 1939

      34 金錫禧, "朝鮮王朝後期의 慶尙道 丹城縣 戶籍帳籍에 關하여" 釜山大 14 : 1975

      35 "朝鮮王朝實錄"

      36 金錫禧, "朝鮮朝後期 丹城縣戶籍帳籍에 關하여 Ⅱ" 釜山大 17 : 1978

      37 金容晩, "朝鮮時代 私奴婢硏究" 집문당 1997

      38 鄭奭鍾, "朝鮮後期社會變動硏究" 일조각 1983

      39 鄭奭鍾, "朝鮮後期社會變動硏究" 일조각 1983

      40 李榮薰, "朝鮮後期社會經濟史" 한길사 1988

      41 姜勝浩, "朝鮮後期 雇工定制 硏究" (10·11) : 1999

      42 金容燮, "朝鮮後期 農業史硏究 Ⅱ" 일조각 1980

      43 李俊九, "朝鮮後期 身分職役變動硏究" 일조각 1993

      44 노영구, "朝鮮後期 戶籍帳籍 硏究現況과 電算化의 一例" 39 : 2001

      45 全炯澤, "朝鮮後期 奴婢身分硏究" 일조각 1989

      46 鄭勝謨, "朝鮮後期 丹城縣의 身分構成比 變化와 그 動因; 특히 兩班戶 增加現象과 관련하여" 9 : 1993

      47 韓榮國, "朝鮮 後期의 雇工 -18·19世紀 大邱府戶籍에서 본 그 實態와 性格-" 81 : 1979

      48 傳衣凌, "明淸社會經濟史論文集" 中華書局 2008

      49 "承政院日記"

      50 "慶尙道蔚山府戶籍大帳 전산DB 원문판"

      51 "慶尙道蔚山府戶籍大帳"

      52 "慶尙道彦陽縣戶籍大帳 上·下"

      53 "慶尙道丹城縣戶籍大帳전산DB 한글판"

      54 "慶尙道丹城縣戶籍大帳 上·下"

      55 金錫禧, "慶尙道 丹城縣 戶籍帳籍에 관한 硏究 -18세기 逃亡 移居戶를 중심" 釜山大 24 : 1983

      56 金容燮, "宣祖朝 雇工歌의 農政史的 意義" 42 : 2003

      57 "大典通編"

      58 "大典會通"

      59 金容燮, "增補版 朝鮮後期農業史硏究 Ⅱ" 일조각 1990

      60 許大齡, "十六世紀十七世紀初期中國封建社會內部資本主義的萌芽" (3) : 1956

      61 "備邊司謄錄"

      62 정해은, "丹城縣 戶籍大帳에 등재된 戶의 出入" 40 : 2002

      63 Fenoaltea, S., "Slavery and Supervision in Comparative Perspective: A Model" 44 (44): 1984

      64 정진영, "19세기 중반∼20세기 초반 在村 兩班地主家의 농업경영―경상도 단성 金麟燮家의 家作地 경영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원 (62) : 105-148, 2008

      65 송양섭, "19세기 幼學戶의 구조와 성격-『丹城戶籍大帳』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원 (47) : 119-162, 2004

      66 장경준, "18세기 호적상 ‘主戶’의 존재 양태와 戶의 모습에 대한 일고찰 - 1714년 대구 조암방 호적을 중심으로 -" 부산경남사학회 (67) : 103-138, 2008

      67 정진영, "18세기 호적대장 ‘호(戶)’와 그 경제적 기반 -1714년 대구 조암방(租岩坊) 호적을 중심으로-" 39 : 2001

      68 朴容淑, "18·19세기의 雇工; 慶尙道 彦陽縣 戶籍의 分析" 7 : 1983

      69 崔潤晤, "18·19세기 농업고용노동의 전개와 발달" 77 : 1992

      70 이정수, "18~19세기 지주가의 농업경영과 고용노동의 확대" 부산경남사학회 (106) : 95-125, 2018

      71 정지영, "17·18세기 단성호적(丹城戶籍)에 기재된 호(戶)의 성격" 경제사학회 32 : 3-26, 2002

      72 이정수, "17-18세기 雇工의 노동성격에 대한 재해석" 경제사학회 47 : 3-37,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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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52 0.52 0.56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65 0.67 1.012 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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