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인기 검색어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KCI등재

    법흥왕의 흥법 논의와 정국 주도 = Flourishing of Buddhism(興法) of King Beopheung and His Political Lead

    한글로보기

    https://www.riss.kr/link?id=A107960370

    • 0

      상세조회
    • 0

      다운로드
    서지정보 열기
    • 내보내기
    • 내책장담기
    • 공유하기
    • 오류접수

    부가정보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This paper is aimed to look into the reign of King Beopheung when Silla faced domestic and foreign political changes and he suggested to flourish Buddhist law in Silla. Previous studies have mainly discussed King Beopheung’s decision to promote Buddhism in terms of King’s authority reinforce or ideological approach in that Silla needed a new change to substitute the traditional belief. However, in these kinds of research, the gradual decision-making process surrounding King Beopheung’s decision has been overlooked to be discussed.
    Considering the issue, the paper starts from the precondition that King Beophueng’s decision to flourishing of Buddhism would be associated with Silla’s political situation at that time. Firstly the paper focuses on Silla’s political situation before and immediately after King Beopheung’s enthronement. In particular, the state name and an honorific title amendment that both the King and Bureaucrat worked with show Silla’s endeavor to keep pace with a new period. However, the movement was far from the reality they sought to.
    Acknowledging this reality, King Beopheung tried to push ahead Silla’s expansion more outward. Contrary to the King’s intention, Bureaucrat argued to devote their energies to reinforce national defense and to finish the system reformation that continued from the period of Maripgan. The controversy related to flourishing of Buddhism stemmed from the opinion difference between them about the direction of state affairs. Despite the opposition of Bureaucrat, the king led the political atmosphere with the martyrdom of Ichadon in order to break through this situation. Next, the King made some achievements to dispel the concerns of Bureaucrat.
    The successful suggestion led by King Beopheung served as a good example for the future kings and Bureaucrats about what Silla should aim for, as well as the strengthening of the king’s authority or an ideological transformation in Silla. As a result, King Jinheung, the next king, could achieve territorial extension aggressively thanks to King Beopheung’s previous accomplishments.
    번역하기

    This paper is aimed to look into the reign of King Beopheung when Silla faced domestic and foreign political changes and he suggested to flourish Buddhist law in Silla. Previous studies have mainly discussed King Beopheung’s decision to promote Budd...

    This paper is aimed to look into the reign of King Beopheung when Silla faced domestic and foreign political changes and he suggested to flourish Buddhist law in Silla. Previous studies have mainly discussed King Beopheung’s decision to promote Buddhism in terms of King’s authority reinforce or ideological approach in that Silla needed a new change to substitute the traditional belief. However, in these kinds of research, the gradual decision-making process surrounding King Beopheung’s decision has been overlooked to be discussed.
    Considering the issue, the paper starts from the precondition that King Beophueng’s decision to flourishing of Buddhism would be associated with Silla’s political situation at that time. Firstly the paper focuses on Silla’s political situation before and immediately after King Beopheung’s enthronement. In particular, the state name and an honorific title amendment that both the King and Bureaucrat worked with show Silla’s endeavor to keep pace with a new period. However, the movement was far from the reality they sought to.
    Acknowledging this reality, King Beopheung tried to push ahead Silla’s expansion more outward. Contrary to the King’s intention, Bureaucrat argued to devote their energies to reinforce national defense and to finish the system reformation that continued from the period of Maripgan. The controversy related to flourishing of Buddhism stemmed from the opinion difference between them about the direction of state affairs. Despite the opposition of Bureaucrat, the king led the political atmosphere with the martyrdom of Ichadon in order to break through this situation. Next, the King made some achievements to dispel the concerns of Bureaucrat.
    The successful suggestion led by King Beopheung served as a good example for the future kings and Bureaucrats about what Silla should aim for, as well as the strengthening of the king’s authority or an ideological transformation in Silla. As a result, King Jinheung, the next king, could achieve territorial extension aggressively thanks to King Beopheung’s previous accomplishments.

    더보기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이 글은 법흥왕 재위기 신라가 직면한 대내외 정세와 흥법 논의의 연관성에 대해서 살펴본 것이다. 기존에는 법흥왕의 흥법을 왕권 강화라는 정치적 측면과 신라의 전통 신앙을 대체하는 새로운 사상의 필요성이라는 사상적 차원의 논의가 주로 이루어졌다. 기존 연구는 흥법의 결과적인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다양한 정치집단의 입장과 논의 과정을 주목하지 않았다.
    이를 고려하여 본고에서는 왕과 신료 간 흥법 논의를 신라의 국정 방향에 대한 정치적 쟁점이 반영된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살펴보고자 했다. 법흥왕 시기에 추진된 여러 정치개혁에도 불구하고, 즉위 이후 제기된 정통성 문제, 내부 통제의 이완, 국제관계에서의 정치적 약세, 대외관계 급변 등의 문제는 신라 정국의 불안 요소로 작용했다. 이와 같은 현실을 고려한 법흥왕은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대외진출을 추진하고자 했으며, 그 일환에서 흥법을 주도하였다.
    법흥왕은 흥법을 통해 외부와의 활발한 교류와 함께 대내외적 통제력과 권위를 강화하고자 했다. 반면 신료들은 신라가 직면한 대내외 정황의 급박한 사정을 이유로 체제개혁과 국방 강화에 힘을 쏟을 것을 주장하였다. 이렇듯 흥법 논쟁은 법흥왕과 신료들의 국정 방향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법흥왕의 흥법 추진은 신료들의 반대에 직면했지만, 법흥왕은 이를 강압적으로 시행하기보다는 신료들의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국정 성과를 도출하였다. 이는 곧 법흥왕이 흥법 문제를 둘러싸고 격화된 논쟁을 조정하면서 자신의 의도대로 정국을 이끌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법흥왕이 주도한 흥법의 성공은 비단 왕권의 강화나 사상적 변모라는 의미 못지않게 후대 왕들과 신료들에게 신라가 지향해 나가야 하는 바에 대한 하나의 지침이 되었다. 진흥왕 이후 영토 확장과 대외교섭, 불교 활동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법흥왕이 흥법 논의를 통해 도모하고자 했던 국정 방향의 연장에서 진행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번역하기

    이 글은 법흥왕 재위기 신라가 직면한 대내외 정세와 흥법 논의의 연관성에 대해서 살펴본 것이다. 기존에는 법흥왕의 흥법을 왕권 강화라는 정치적 측면과 신라의 전통 신앙을 대체하는 새...

    이 글은 법흥왕 재위기 신라가 직면한 대내외 정세와 흥법 논의의 연관성에 대해서 살펴본 것이다. 기존에는 법흥왕의 흥법을 왕권 강화라는 정치적 측면과 신라의 전통 신앙을 대체하는 새로운 사상의 필요성이라는 사상적 차원의 논의가 주로 이루어졌다. 기존 연구는 흥법의 결과적인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다양한 정치집단의 입장과 논의 과정을 주목하지 않았다.
    이를 고려하여 본고에서는 왕과 신료 간 흥법 논의를 신라의 국정 방향에 대한 정치적 쟁점이 반영된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살펴보고자 했다. 법흥왕 시기에 추진된 여러 정치개혁에도 불구하고, 즉위 이후 제기된 정통성 문제, 내부 통제의 이완, 국제관계에서의 정치적 약세, 대외관계 급변 등의 문제는 신라 정국의 불안 요소로 작용했다. 이와 같은 현실을 고려한 법흥왕은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대외진출을 추진하고자 했으며, 그 일환에서 흥법을 주도하였다.
    법흥왕은 흥법을 통해 외부와의 활발한 교류와 함께 대내외적 통제력과 권위를 강화하고자 했다. 반면 신료들은 신라가 직면한 대내외 정황의 급박한 사정을 이유로 체제개혁과 국방 강화에 힘을 쏟을 것을 주장하였다. 이렇듯 흥법 논쟁은 법흥왕과 신료들의 국정 방향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법흥왕의 흥법 추진은 신료들의 반대에 직면했지만, 법흥왕은 이를 강압적으로 시행하기보다는 신료들의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국정 성과를 도출하였다. 이는 곧 법흥왕이 흥법 문제를 둘러싸고 격화된 논쟁을 조정하면서 자신의 의도대로 정국을 이끌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법흥왕이 주도한 흥법의 성공은 비단 왕권의 강화나 사상적 변모라는 의미 못지않게 후대 왕들과 신료들에게 신라가 지향해 나가야 하는 바에 대한 하나의 지침이 되었다. 진흥왕 이후 영토 확장과 대외교섭, 불교 활동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법흥왕이 흥법 논의를 통해 도모하고자 했던 국정 방향의 연장에서 진행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더보기

    참고문헌 (Reference)

    1 "해동고승전"

    2 탕융동, "한위양진남북조 불교사 3" 學古房 2014

    3 최병헌, "한국사 특강"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0

    4 최광식, "한국 고대의 토착신앙과 불교" 고려대학교출판부 2007

    5 Lewis, Mark Edward, "하버드 중국사 남북조" 너머북스 2016

    6 "포항냉수리신라비"

    7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충주고구려비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20

    8 "충주고구려비"

    9 "천전리서석"

    10 "책부원귀"

    1 "해동고승전"

    2 탕융동, "한위양진남북조 불교사 3" 學古房 2014

    3 최병헌, "한국사 특강"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0

    4 최광식, "한국 고대의 토착신앙과 불교" 고려대학교출판부 2007

    5 Lewis, Mark Edward, "하버드 중국사 남북조" 너머북스 2016

    6 "포항냉수리신라비"

    7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충주고구려비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20

    8 "충주고구려비"

    9 "천전리서석"

    10 "책부원귀"

    11 윤세원, "전륜성왕의 개념형성과 수용과정에 관한 연구" 동양사회사상학회 (17) : 173-202, 2008

    12 강종훈, "울진봉평신라비의 재검토" 국학연구원 (148) : 1-50, 2009

    13 "울진봉평신라비"

    14 주보돈, "울진 봉평리 신라비와 한국 고대 금석문" 주류성출판사 2011

    15 임기환, "울진 봉평리 신라비와 한국 고대 금석문" 주류성 2011

    16 "영천청제비"

    17 김선숙, "양직공도梁職貢圖 양서梁書 의신라 국호 이칭異稱에 대한 검토" 한국국학진흥원 (32) : 7-47, 2017

    18 정연식, "신라의 태조 미추왕과 은하수 星漢" 한국고대사학회 (62) : 207-251, 2011

    19 강종훈, "신라상고사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20 박수진, "신라 중고기 대왕-갈문왕 체제의 성립과 성골의 출현" 수선사학회 (73) : 31-51, 2020

    21 선석열, "신라 왕위계승 원리 연구" 혜안 2015

    22 "삼국유사"

    23 김두진, "삼국시대 불교신앙사 연구" 일조각 2016

    24 김영태, "삼국시대 불교신앙 연구" 불광출판사 1990

    25 "삼국사기"

    26 조현걸, "불교의 정법치국의 이념과 신라정치체제에서의 수용* -신라의 삼국통일 이전 시기를 중심으로-" 대한정치학회 16 (16): 131-154, 2009

    27 노중국, "백제의 대외 교섭과 교류" 지식산업사 2012

    28 許興植, "韓國史의 時代區分" 韓國古代史硏究會 1995

    29 김복순, "韓國 古代佛敎史 硏究" 민족사 2002

    30 朱甫暾, "迎日冷水里新羅碑에 대한 基礎的 檢討" 6 : 1989

    31 서영교, "異斯夫의 가야 침공과 伴跛의 逆襲" 신라사학회 (40) : 1-27, 2017

    32 최광식, "新羅의 佛敎 傳來, 受容 및 公認" 12 : 1991

    33 이기백, "新羅時代의 國家佛敎와 儒敎" 韓國硏究院 1978

    34 李基白, "新羅思想史硏究" 一潮閣 1986

    35 辛鍾遠, "新羅初期佛敎史硏究" 민족사 1992

    36 李丙燾, "新羅佛敎의 浸透過程과 異次頓殉敎問題의 新考察" 14 : 1975

    37 金煐泰, "新羅佛敎思想硏究" 信興 1979

    38 金英美, "新羅佛敎思想史硏究" 民族社 1994

    39 李鍾旭,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 嶺南大學校出版部 1980

    40 김병곤, "新羅 王號 ‘寐錦’의 由來와 性格" 한국사학회 (84) : 1-34, 2006

    41 조범환, "新羅 法興王代 전반기 對百濟 정책과 對梁交涉" 동아시아고대학회 (42) : 65-89, 2016

    42 강나리, "新羅 法興王代 의사결정방식의 변화와 大王興輪寺" 신라사학회 (28) : 45-78, 2013

    43 조범환, "新羅 智證王代 北魏에 사신 파견과 목적" 인문과학연구소 (46) : 77-107, 2016

    44 이기백, "新羅 初期 佛敎와 貴族勢力" 40 : 1975

    45 魏英, "新羅 初傳佛敎의 展開過程 檢討" 신라문화연구소 (20) : 99-138, 2002

    46 신종원, "新羅 佛敎公認의 實相" 14 : 1993

    47 문경현, "新羅 佛敎 肇行攷" 14 : 1993

    48 魏英, "新羅 中古期 國家佛敎의 展開 -佛敎 公認과 僧官制를 中心으로-" 한국문화사학회 (15) : 115-163, 2001

    49 金杜珍, "斗溪李丙燾博士九旬紀念韓國史學論叢" 지식산업사 1987

    50 金貞培, "崇山朴吉眞博士華甲紀念事業會 韓國佛敎思想史" 圓佛敎思想硏究院 1975

    51 김두진, "古代人의 신앙과 불교수용" 국사편찬위원회 2 : 1978

    52 이강식, "原宗興法 猒髑滅身과 謁恭의 理國의 大義" 2 : 1999

    53 洪潤植, "三國時代의 佛敎受容과 社會發展의 諸問題" 8 : 1985

    54 李基白, "三國時代 佛敎 受用의 實際-佛敎 ‘下賜說’ 批判-" 29 : 1999

    55 주보돈, "『삼국유사』 「射琴匣」條의 이해" 40 : 2019

    56 정덕기, "6세기 초 신라의 尊號改正論과 稱王" 역사학회 (236) : 111-144, 2017

    57 박성현, "6세기 초 고구려 ` 신라의 화약과 정계 -「중원 고구려비」와 양국 경계의 재검토 -" 한국역사연구회 (76) : 203-237, 2010

    58 김창석, "6세기 전반 新羅의 대외관계와 百濟觀" 57 : 2018

    59 판카즈 모한, "6세기 신라에서의 왕권과 불교 간의 관계 ·" 불교학연구회 9 : 135-512, 2004

    60 박미선, "5세기 신라의 對高句麗關係와왕실의 불교 인식 변화" 신라사학회 (50) : 177-204, 2020

    61 윤진석, "5∼6세기 신라의 정치운영과 갈문왕" 계명대학교 대학원 2014

    62 양자량, "5~7세기 신라 국정운영과 대등" 숙명여대 2019

    63 梁起錫, "5~6世紀 前半 新羅와 百濟의 關係" 15 : 1994

    더보기

    동일학술지(권/호) 다른 논문

    동일학술지 더보기

    더보기

    분석정보

    View

    상세정보조회

    0

    Usage

    원문다운로드

    0

    대출신청

    0

    복사신청

    0

    EDDS신청

    0

    동일 주제 내 활용도 TOP

    더보기

    주제

    연도별 연구동향

    연도별 활용동향

    연관논문

    연구자 네트워크맵

    공동연구자 (7)

    유사연구자 (20) 활용도상위20명

    인용정보 인용지수 설명보기

    학술지 이력

    학술지 이력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8 평가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2-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9-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6-01-01 등재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KCI등재
    2014-01-01 등재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더보기

    학술지 인용정보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1.18 1.18 1.06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96 0.97 2.484 0.48
    더보기

    이 자료와 함께 이용한 RISS 자료

    나만을 위한 추천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