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 주된 검토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자료는 19세기 충청도 서해안에 위치한 성호리라는 한 작은 어촌에 거주하였던 金淸圭(金在明)家의 문서들이다. 이 집안에는 가계와 상업 활동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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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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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주된 검토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자료는 19세기 충청도 서해안에 위치한 성호리라는 한 작은 어촌에 거주하였던 金淸圭(金在明)家의 문서들이다. 이 집안에는 가계와 상업 활동을 시사해 주는 고신, 상업장부, 추수기뿐 아니라, 鄕約, 完文, 節目, 所志 등 성호리의 운영 구조를 추찰할 수 있는 마을문서를 포함하여 등 약 730건의 고문서가 전해져 왔다. 이 집안에 마을 문서가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19세기 후반 이 집안의 유력 인물인 金在明(1813-1886)이 성호리 향약에서 文書라는 有事職을 맡았던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 문서들은 현재 10여 건은 충청남도 역사문화원에 기탁되어 있고, 나머지는 이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일찍이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이 문서들을 마이크로필름으로 제작한 바 있다(국사편찬위원회, MF0001520-01).
이 연구의 성패는 무엇보다 이 고문서들을 얼마나 유기적으로 조직하여 이해하느냐에 달려있다. 즉 여기서의 유일한 방법은 문서가 갖는 정확한 네트워크를 파악하여, 이를 통해 사회적 네트워크를 파악하는 수준에 까지 이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조선시대 마을과 관련된 어떤 현상이 왕조체제 속에서 설명하지 못할 경우 어떤 문제가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본격적으로 소개하고자 하는 성호리에 관한 기존 연구를 한 가지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성호리에서의 상업 활동은 이른바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에 의해 일찍이 주목받은 바 있다. 예컨대 이병천은『忠淸道庄土文績』(奎19300)에 포함되어 있던 일련의 점련 문서를 통해서 이 마을의 主人權 賣買 實態에 관해서 일찍이 검토한 바 있다(李炳天, 1983; 이정수 ․ 김희호 2007).
이후 이 테제는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전면적 비판에 의해 실증으로부터 유리된 서구사회의 콘텍스트를 그대로 이식한 그릇된 전제로부터 출발하였다고 비판받아 왔다. 이 비판을 성호리에 비추어 본다면 자본주의 맹아론자들의 연구가 ‘主人權’ 등 단편적인 징후들을 통해 자본주의 맹아의 존재를 입증하는데 열을 올렸을 뿐, 이 상인들이 속해 있는 이 마을의 역사 생태적 실태에 대해 구체적인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비판을 어느 정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이러한 비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여기에는 여전히 중대한 문제가 남는다. 이후 성호리가 위치한 이 지역은 실질적으로 역사 연구의 빈 공백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 대해 내재적 발전론자들이 그동안 지적하여 왔던 활발한 상업 활동에 대해서 또 다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더욱이 내재적 발전론 비판자들의 반증이 주로 중부 내륙지방이나 영남의 북부지방의 자료들을 통한 실증을 근거로 하였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혹시 왕조체제를 구축한 결과 발생한 각 지역의 특성이 갖는 차이를 조선시대 전체의 성격으로 과도하게 부각시키고자 하였던 것은 아닐까? 이 때문에 이 마을의 성격은 처음부터 조선사회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지 않고서는 풀지 못할 난제가 되어버렸던 것은 아닐까?(이헌창 2010) 뿐만 아니라 시대적 변화 추이의 보편성에만 관심을 맞춘 기존의 연구 태도에 적잖은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더욱이 비교적 최근 이 지역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적지 않은 고문서들이 새롭게 발굴되었다. 이를 통해 성호리에 대한 더욱 밀착된 관심은 이춘진으로부터 시작되었다.(이춘진 2002) 그는 답사와 자신이 새로이 발굴한 문서를 검토하여 이 마을의 密陽 朴氏 집안이 宗稧 建立 등을 통한 문중 활동의 전개 양상을 검토하는 데 두었다. 그리고 강성복은 성호리 마을의 전반적 개관과 아울러 洞祭의 성격 변화를 검토한 바 있다(姜成福 2007). 그 밖에 성호리의 完文을 통해 이 마을이 부담하고 있던 역의 실태와 墓村으로서의 성격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는 경우도 있었고, 정승모는 18․19세기 鄕村中人의 존재를 성호리의 副契를 통해 확인한 바 있다(정승모 2005).
그런데 새로운 자료에 의한 이러한 관찰들조차 위에서 언급한 연구자들의 방법론적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성호리에서 나타난 사회현상들은 여전히 사례의 하나로 취급되어 자신이 제기한 특정 주제에 비추어 보는 실증주의적 관점을 견지하였다. 더욱이 위에서 언급된 이론적 성격으로부터 제기된 내재적 발전론의 지적, 혹은 비판과 관련지어 이해된 적이 없었다. 이로써 아직 성호리와 이 지역의 성격이 조선의 왕조체제에서 위치한 전체적인 통찰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