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술(연구)의 내용은 <신주와 종묘제향>, <왕릉의 조성과 능제>, <영정의 상징과 진전의례>, <왕실의 역사와 본궁>, <사친과 궁원제> 등 전체 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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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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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연구)의 내용은 <신주와 종묘제향>, <왕릉의 조성과 능제>, <영정의 상징과 진전의례>, <왕실의 역사와 본궁>, <사친과 궁원제> 등 전체 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
저술(연구)의 내용은 <신주와 종묘제향>, <왕릉의 조성과 능제>, <영정의 상징과 진전의례>, <왕실의 역사와 본궁>, <사친과 궁원제> 등 전체 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각각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신주와 종묘 제향
종묘는 도성내 중심적인 위치에 정해지므로 중심 상징이 뚜렷이 부각되고, 종묘 정전의 구성에는 왕권의 계승을 보여주기 위한 연속성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또한 종묘는 산릉이나 원묘와 달리 유교 예법을 통해 그 정당성을 획득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종묘의 공간적 특징과 신주(神主)의 종교적 의미에 주목할 것이다. 신주와 책보(冊寶) 등 왕권을 상징하는 상징물을 살펴보고 그것의 봉안의례(奉安儀禮)를 고찰할 것이다. 그리고 사시제(四時祭)를 중심으로 한 제향의 엄밀한 절차와 그 의미, 속제(俗祭)의 운영 등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2. 왕릉의 조성과 능제(陵祭)
무덤은 시신을 안장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가 의례를 통해서 끊임없이 만나는 공간이었다. 또한 유교문화에서 묘제(墓祭)는 예법상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실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예식이었다. 이 점은 묘제가 유교적 예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종교 현상임을 암시한다. 또한 왕릉 제향은 종교사적으로 볼 때 불교와 유교의 결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왕릉의 관리에 원찰의 기능과 역할을 살펴보는 것은 왕실의 불교문화 뿐 아니라 조선시대 중층적인 종교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영향은 제향에서 육식(肉食)의 배제로 남아있으므로 이를 중심으로 왕릉의 제향을 살펴볼 것이다.
3. 영정(影幀)의 상징과 진전 의례
진전(眞殿)은 선왕의 영정을 모신 전각을 가리킨다. 이러한 진전은 영정의 봉장 외에도 선왕에 대한 제향이 거행되는 곳이었다. 조선 전기 진전은 불교의 유습이라는 혐의와 신유학자들의 반성상주의적(反聖像主義的) 태도, 그리고 제사의 중첩 등을 이유로 제향에서 배제되거나 열등한 지위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전이 건립되고 영정이 봉안되어 제향이 거행되었던 까닭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정의 상징과 이에 대한 유교 담론을 살펴보고 그것이 종교문화에 미친 영향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궁궐 내에 세워진 선원전 다례(茶禮)에 관한 역사적 연원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여성의 역할을 고찰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태조, 세조, 원종, 숙종, 영조, 순조의 영정을 모신 한양의 대표적 진전인 영희전의 건립과 변천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이 진전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숙종과 영조의 진전 행차와 작헌례(酌獻禮)를 통해서 진전의 종교적, 정치적 의미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4. 왕실의 역사와 본궁(本宮)
본궁은 왕실의 연원과 닿아있다. 본궁은 국왕이 잠저로 있을 때 거처하던 곳을 가리킨다. 함흥본궁은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살던 집이다. 태조는 즉위 후 이곳에 목조, 익조, 도조, 환조 4대의 위판을 봉안하였고, 그가 죽은 후에는 그와 신의왕후의 위판이 봉안되었다. 영흥본궁은 태조의 탄강지로서 태조와 신의왕후의 위판을 봉안한 곳이었다.
왕실 발흥과 연관된 본궁의 제향은 유교적인 것과 구별되는 것들이다. 5월 태백제와 야백제, 야흑제는 성단(星壇)에서 태백성에게 지내는 것이다. 또한 국초에는 매년 단오 때 어의(御衣)와 안마(鞍馬)를 보내어 내시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이것은 무당에 의해서 거행되었던 별기은제(別祈恩祭)의 흔적을 담고 있다. 본궁 제향에 대한 유교적 정비는 정조대 이루어졌는데 현재 전하는 《함흥본궁의식》, 《영흥본궁의식》에 그 자세한 내용이 실려있다. 그러므로 이 자료를 근거로 본궁에 남아있는 무속의 모습과 그것의 유교적 변형을 고찰하고자
5. 사친(私親)과 궁원제(宮園祭)
조선후기 국가 사전에서 보이는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궁원에 대한 제사의 증가이다. 궁원은 종묘에 들지 못한 국왕의 생친(生親)을 모신 제향 공간이다. 본 연구는 생친(生親)에 대한 제사를 통해 유교 사회의 독특한 인정과 의리의 대립적 구조를 해결하는 방식을 고찰할 것이다. 그리고 생친의 제향을 국가의 공식적인 사전에 포함시켜 국왕의 권위를 높이는 의례화 과정을 밝히고자 한다. 한편, 이 본궁은 각각이 의례의 주체가 되어서 국가에서 주관하는 제향 외 각종 다례와 고사(告祀)를 거행하고 유명 사찰이나 산천에 사람을 보내어 신행을 행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담고있는 회계책 등의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왕실의 신행과 의례를 밝히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