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代 기우 제사는 大唐開元禮에 「皇帝孟夏雩祀于圜丘」, 「興慶宮祭五龍壇」, 「時旱祈雨於太廟」, 「時旱祈雨於太社」, 「時旱祈嶽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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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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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代 기우 제사는 大唐開元禮에 「皇帝孟夏雩祀于圜丘」, 「興慶宮祭五龍壇」, 「時旱祈雨於太廟」, 「時旱祈雨於太社」, 「時旱祈嶽鎭...
唐代 기우 제사는 大唐開元禮에 「皇帝孟夏雩祀于圜丘」, 「興慶宮祭五龍壇」, 「時旱祈雨於太廟」, 「時旱祈雨於太社」, 「時旱祈嶽鎭於北郊」, 「時旱就祈嶽鎭海瀆」, 「諸州祈社稷」, 「諸州祈諸神」, 「諸縣祈社稷」, 「諸縣祈諸神」, 「祀風․雨師」를 들 수 있다. 祈雨의 대상은 당조가 가장 존귀하게 여긴 昊天上帝부터 縣의 諸神까지 다양하였고 嶽鎭海瀆과 같은 자연물은 구름과 비를 낼 수 있다는 믿음에서 숭배의 대상이었다. 기우 제사의 시기는 雩祀가 常祀인 것을 제외하면 모두 ‘久闕時雨’에 거행한다고 하였듯이 임시 제사였다. 그 제사의 등급은 圜丘에서의 雩祀는 大祀이고 나머지는 小祀였다. 唐代 기우 제사의 종류와 절차, 특징 등의 내용에 대해 圜丘에서의 雩祀를 실례로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제사의 기우 대상은 당조가 가장 존숭했던 昊天上帝였고 景皇帝를 配祀하고 특별히 蒼犢 2마리를 희생으로 바쳤다. 그 절차는 ①卜日 ②齋戒 ③陳設 ④省牲器 ⑤鑾駕出宮 ⑥奠玉帛 ⑦進熟 ⑧鑾駕還宮으로 이루어진다. 다른 기우 제사도 대체로 동일한 방식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단지 절차의 간소여부, 散齋․致祭 기일, 祝文의 내용, 主祭의 지위, 犧牲․牲器의 종류나 수 등에서 차이가 있다. 기우 제사의 운용은 嶽鎭-海瀆-社稷-宗廟의 순서로 단계적으로 거행되었고 州縣에서도 사직과 산천에 차례로 제사지냈다. 따라서 전통적인 기우 제사의 규정과 절차 등의 전체적인 체계 속에서 五龍壇 제사 규정과 절차의 특징은 무엇인지 검토하고자 한다.
용 숭배가 정식 제사로 편입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 현종 시기와 그 이후 당조의 기우 대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수많은 지방의 諸神이 기우 대상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장열․장구령이 성황신에 올린 제문에서 알 수 있듯이 淫祀로 간주될 수 있던 성황신을 지방 諸神의 하나로 간주한 것을 필두로, 이후 각지에 堯廟․禹廟․銅官趙監廟․康令祠․蔣子文廟․趙城明王廟․顯祐廟 등 주로 장강 유역을 중심으로 수많은 기우 관련 사묘가 건립되었다. 이들 지방의 많은 신들이 기우를 매개로 당조의 승인을 받았던 사실은 민간신앙의 발전에 轉機를 제공한 조치로 주목할 수 있다.
다양한 기우 대상의 부상 속에서 전통적으로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다고 믿어진 용이 폭넓게 숭배되었던 것은 필연적 결과인데 그 중요한 계기는 개원 연간 용 숭배를 국가제사로 편입시킨 五龍壇 제사였다. 이는 이전부터 숭배되던 용 신앙을 당조가 흡수한 것으로 이후 용을 매개로 한 기우가 더욱 일상화되었고 자연히 龍壇, 龍堂, 龍祠, 龍王廟 등과 같은 사당도 증가하였다. 그 분포는 장강 유역에 다수 분포하고 있어 다른 사묘의 증가 상황과 동일하다. 이는 장강 유역이 淫祠가 만연된 곳이었고 당 후반기 장강 개발이 가속화되어 당조의 재정중심지로 부상된 결과, 지역 의식이 대두되었던 현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龍 숭배가 확산되면서 당시 이 지역 포교에 진력했던 승려는 불교의 용에 대한 우위를 은연중에 강조하였다. 台州 屈坦은 台州에서 오래 동안 숭배되었고 그 이유는 비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그는 ‘蛟螭’의 일종으로 雷雨를 일으킬 수 있었고 한발 때마다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龍王으로 숭배되었고 이후 龍王이란 시호를 받고 湫水通靈王으로 공인되었다. 그의 일화중 屈坦과 그의 모친인 龍母가 智者大師의 受戒를 받았고 그의 권고에 의해 한발 때마다 비를 내려 주었다는 것, 혹은 굴탄이 元和5年 湫水院의 건립과 함께 龍王殿에 모셔졌다는 언급 등은 모두 龍王에 대한 불교의 우위를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龍王殿이 사원에 부속되었던 것, 劉禹錫이 太平寺에 부속된 九龍祠에서 기우한 것 등 龍堂은 寺院에 부속되어 있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용 신앙이 고차원적인 교리나 신앙의 장소를 쉽게 구비할 수 없었던 까닭에 불교와 타협하여 확산되었던 것을 의미하고 당대 민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우 제사의 실상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