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요약>-「藝苑巵言」이라는 텍스트의 문학적 미학적 학술적 특징과 조선적 수용양상- 조선문단에 가장 심각한 영향을 끼쳤고, 조선 문인들이 가장 예민하게 의식했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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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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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요약>-「藝苑巵言」이라는 텍스트의 문학적 미학적 학술적 특징과 조선적 수용양상- 조선문단에 가장 심각한 영향을 끼쳤고, 조선 문인들이 가장 예민하게 의식했던 ...
<연구요약>-「藝苑巵言」이라는 텍스트의 문학적 미학적 학술적 특징과 조선적 수용양상-
조선문단에 가장 심각한 영향을 끼쳤고, 조선 문인들이 가장 예민하게 의식했던 인물은 王世禎(1526-1590)이다. 전후칠자의 존재가 조선문단에 알려진 이후까지 생존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왕세정의 의고적 창작론은 그의 생존시부터 명말청초의 錢謙益에 이르기까지 혹독한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문학적 성취가 만만한 것은 결코 아니다. 명대 문단의 영수였던만큼 그 이름에 값하여 수십 종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과, 시와 산문은 물론 戱曲 傳奇 詞曲 등의 장르에까지 손을 댔다.
가장 중요한 것은 398권이란 방대한 분량의 弇州山人四部稿(180권) 續稿(207권)로 조선 문단에 수입되어 널리 읽혔다. 1577년 간행된 엄주산인사부고는 일반 문집과는 달리 賦部 詩部 文部 說部의 4부로 엮어져 있는데, 그 중 설부의 문예비평서 藝苑巵言이 조선 문단에서 가장 널리 읽혔고 영향력도 컸다.
왕세정의 저작을 최초로 수입한 사람은 윤근수다. 왕세정이란 인물의 존재와 그의 저작이 조선문단에 알려진 것은 1582년이다. 1582년 명의 사신 黃洪憲이 황태자 탄생을 알리는 詔書를 가지고 입국했을 때 비로소 알려졌다. 이때 윤근수는 왕세정의 저작과 명성을 처음 듣고 그 뒤 사신 편에 부탁해 四部稿를 구입했다.
왕세정의 저작과 편서는 허균의 독서범위를 보면, 허균의 사망해인 1618년 이전까지 거의 완벽하게 수입되어 있었던 것 같다. 성소부부고의 「世說刪補注解序」는 왕세정이 劉義卿의 世說新語와 何良俊의 何氏語林을 합쳐서 엮은 世說刪補에 허균이 주해를 단 책의 서문이다. 허균은 1606년 朱之蕃에게 이 책을 받아 주해를 붙였던 것이다. 또 「明尺牘跋」은 왕세정이 편집한 古尺牘을 허균 자신이 재편집한 뒤 붙인 발문이다. 왕세정의 列仙傳과 盛事述 따위의 저작도 이미 허균의 독서 범위에 들어 있다. 즉 허균이 편집한 閑情錄에는 왕세정의 저작이거나 편서인 弇山堂別集 明野史彙 長公外紀 艶異編과 같은 책들이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
李晬光(1563-1628)은 盛唐詩를 창작의 전범으로 삼은 사람인데, 이것은 ‘詩必盛唐’이란 전후칠자의 의고적 창작론과 관련이 있음이 분명하다. 이수광은 1614년에 완성된 芝峰類說에서 왕세정과 「예원치언」을 수십 번이나 인용하며 왕세정의 논리를 상당 부분 수용했다. 당송고문을 비판하고 선진양한 산문을 전범으로 삼아야 할 것을 열렬히 주장했던 柳夢寅(1559-1623)은 그의 산문론 전반에 걸쳐 이반룡과 왕세정의 산문을 두루 언급하고 있다.
특히 「藝苑巵言」은 숙종연간에 간행되어 널리 유포되기까지 하였다. 왕세정의 일반 문집과 저술들은 중국 판본의 수입 혹은 필사 초록의 형태로 流轉되었다면 「藝苑巵言」은 국내에서 간행되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점에 대해서도 자세히 밝혀져야 할 것이다. 더구나 「藝苑巵言」은 시론 문론 뿐만아니라 사상 예술일반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으므로 조선후기 문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검토되어야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 「藝苑巵言」이라는 텍스트의 문학적 미학적 학술적 특징과 조선적 수용 관계를 집중 논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