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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망부재 시대를 넘는 소통의 몸짓,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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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그동안 자살이라는 소재는 문학에서 빈번하게 다루어져 왔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초여름이 되면 반드시 몇 명씩 죽는다는 술집여자의 음독자살,「서울, 1964년 겨울」에서 보이는 월부 책 판매원의 자살은 삶의 장벽에 부딪친 자의 차선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죽음의 양상은 경제적인 빈곤, 가족의 부재, 외로움 등을 드러내는 회피형 내지는 고발형 자살에 가깝다. 그러나 자살 안내인을 화자로 하는 김영하의「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 이르면 유디트와 미미의 자살을 돕는 화자는 자살을 휴식을 취하는 일, 욕망을 넘어선 여유로움을 취하는 행위로 인식하게 된다.
    김경욱의 단편소설「토니와 사이다」에도 역시 자살 안내인이 등장하는데, 그는 자살카페를 운영하면서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 고객들을 편하게 죽음에 이르도록 도와주고 대가를 챙기는 사람이다. 세상은 힘들어지고 자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증가할 것이기 때문에 사업의 전망을 밝다고 한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잠재적인 수요자인 셈인데 그는 정말 죽으려는 자와 그렇지 않은 고객을 분류하는 것이 사업의 관건이라고 한다. 단순하게 삶이 권태로운 자들, 고독한 자들, 유미주의자들은 인터뷰 과정에서 탈락하게 되고 고객이 될 수 있는 자격은 죽는 것 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죽음이 오히려 유일한 희망이며 안식이 될 수 있는 사람들뿐이다. ‘토니와 사이다’라는 아이디로 불리는 두 사람은 유복한 가정의 출신들이지만 그들은 ‘사는 게 별것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버린 자들’이며 살아야 할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자들이다.
    박민규의 「아침의 문」은 자살 카페에서 만난 사람들의 집단 자살을 다루고 있다. 자살을 하기 위해 모인 여섯 명 중 셋은 성공했고 둘은 돌아갔으며 화자만 홀로 살아남아 재시도를 꿈꾼다. 살아남은 사람이 다시 자살을 시도하는 긴장된 시간을 통해 자살의 동기, 자살하는 사람의 심정 혹은 방법 등이 제시된다. 자살에 성공한 사람은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자살에 실패한 사람의 입을 통해 자살자 스스로가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행복해지고 싶지만 행복할 수 없고,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죽는다는 것은 힘들고 무섭고 두려운 일이다. 집단 자살에서 실패하고 살아남은 택배기사인 주인공은 비루한 삶의 진실을 간파했으며 그 삶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압박붕대로 올가미를 만들어 목에 건다. 그러나 그가 의자위에서 올가미를 걸고 바라본 것은 맞은 편 옥상에서 어떤 여자가 배를 동였던 압박 붕대를 풀고 아기를 낳는 광경이다. 즉 이곳을 나가려는 자와 그곳을 나오려는 자가 대면하게 되고 아기에 대한 살의와 공격성을 직감한 그는 건너편 옥상으로 건너가 우는 아이를 안아 올린다.
    박민규는 「아침의 문」을 통해 자살의 문제를 심도있게 재현하고 있다. 이를 악무는 것, 힘을 주는 것, 그리고 끝없이 욕을 하는 것...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미혼모는 혼자서 출산을 한다. 또한 제발 모르게 했으면 좋을, 알고 싶지 않은 광경을 마주 대한 남자는 쏟아지듯, 엎질러지듯 나오는 팔과 다리, 새 생명 앞에서 외면하고 싶은 무엇인가를 마주하게 된다. 그 곳으로 가는 이유와 이곳을 벗어나려는 진짜 이유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는 작은 인간을 안아 올린다. 작가는 미혼모의 배를 압박하고 있던 붕대와, 자살을 위한 올가미를 만들었던 두 개의 압박붕대라는 메타포를 통해 억압된 현실을 상징하면서, 자궁의 문을 열고 나오는 생명과 올가미에 목을 맨 생명을 마주보게 함으로써 탄생과 죽음의 순간을 조우하게하고 있다.
    작가는 알지 못한다는 말을 반복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삶과 죽음을 알지 못하지만 살아가면서 조금씩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임을 , 이 치열한 삶의 대열에서 스스로 물러서는 죽음을 통해 자살이 가진 소통 지향성과 적극적인 삶의 양식 그리고 슬픈 인류의 절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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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자살이라는 소재는 문학에서 빈번하게 다루어져 왔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초여름이 되면 반드시 몇 명씩 죽는다는 술집여자의 음독자살,「서울, 1964년 겨울」에서 보이는 ...

    그동안 자살이라는 소재는 문학에서 빈번하게 다루어져 왔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초여름이 되면 반드시 몇 명씩 죽는다는 술집여자의 음독자살,「서울, 1964년 겨울」에서 보이는 월부 책 판매원의 자살은 삶의 장벽에 부딪친 자의 차선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죽음의 양상은 경제적인 빈곤, 가족의 부재, 외로움 등을 드러내는 회피형 내지는 고발형 자살에 가깝다. 그러나 자살 안내인을 화자로 하는 김영하의「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 이르면 유디트와 미미의 자살을 돕는 화자는 자살을 휴식을 취하는 일, 욕망을 넘어선 여유로움을 취하는 행위로 인식하게 된다.
    김경욱의 단편소설「토니와 사이다」에도 역시 자살 안내인이 등장하는데, 그는 자살카페를 운영하면서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 고객들을 편하게 죽음에 이르도록 도와주고 대가를 챙기는 사람이다. 세상은 힘들어지고 자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증가할 것이기 때문에 사업의 전망을 밝다고 한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잠재적인 수요자인 셈인데 그는 정말 죽으려는 자와 그렇지 않은 고객을 분류하는 것이 사업의 관건이라고 한다. 단순하게 삶이 권태로운 자들, 고독한 자들, 유미주의자들은 인터뷰 과정에서 탈락하게 되고 고객이 될 수 있는 자격은 죽는 것 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죽음이 오히려 유일한 희망이며 안식이 될 수 있는 사람들뿐이다. ‘토니와 사이다’라는 아이디로 불리는 두 사람은 유복한 가정의 출신들이지만 그들은 ‘사는 게 별것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버린 자들’이며 살아야 할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자들이다.
    박민규의 「아침의 문」은 자살 카페에서 만난 사람들의 집단 자살을 다루고 있다. 자살을 하기 위해 모인 여섯 명 중 셋은 성공했고 둘은 돌아갔으며 화자만 홀로 살아남아 재시도를 꿈꾼다. 살아남은 사람이 다시 자살을 시도하는 긴장된 시간을 통해 자살의 동기, 자살하는 사람의 심정 혹은 방법 등이 제시된다. 자살에 성공한 사람은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자살에 실패한 사람의 입을 통해 자살자 스스로가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행복해지고 싶지만 행복할 수 없고,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죽는다는 것은 힘들고 무섭고 두려운 일이다. 집단 자살에서 실패하고 살아남은 택배기사인 주인공은 비루한 삶의 진실을 간파했으며 그 삶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압박붕대로 올가미를 만들어 목에 건다. 그러나 그가 의자위에서 올가미를 걸고 바라본 것은 맞은 편 옥상에서 어떤 여자가 배를 동였던 압박 붕대를 풀고 아기를 낳는 광경이다. 즉 이곳을 나가려는 자와 그곳을 나오려는 자가 대면하게 되고 아기에 대한 살의와 공격성을 직감한 그는 건너편 옥상으로 건너가 우는 아이를 안아 올린다.
    박민규는 「아침의 문」을 통해 자살의 문제를 심도있게 재현하고 있다. 이를 악무는 것, 힘을 주는 것, 그리고 끝없이 욕을 하는 것...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미혼모는 혼자서 출산을 한다. 또한 제발 모르게 했으면 좋을, 알고 싶지 않은 광경을 마주 대한 남자는 쏟아지듯, 엎질러지듯 나오는 팔과 다리, 새 생명 앞에서 외면하고 싶은 무엇인가를 마주하게 된다. 그 곳으로 가는 이유와 이곳을 벗어나려는 진짜 이유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는 작은 인간을 안아 올린다. 작가는 미혼모의 배를 압박하고 있던 붕대와, 자살을 위한 올가미를 만들었던 두 개의 압박붕대라는 메타포를 통해 억압된 현실을 상징하면서, 자궁의 문을 열고 나오는 생명과 올가미에 목을 맨 생명을 마주보게 함으로써 탄생과 죽음의 순간을 조우하게하고 있다.
    작가는 알지 못한다는 말을 반복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삶과 죽음을 알지 못하지만 살아가면서 조금씩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임을 , 이 치열한 삶의 대열에서 스스로 물러서는 죽음을 통해 자살이 가진 소통 지향성과 적극적인 삶의 양식 그리고 슬픈 인류의 절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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