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 사후 아카데미 학파의 학풍은 회의주의로 기운다. 기원전 280년경 아카데미의 수장이 된 아르케실라오스가 아카데미 학파의 철학을 회의주의로 바꾸기 때문이다. 우선적으로 그는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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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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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사후 아카데미 학파의 학풍은 회의주의로 기운다. 기원전 280년경 아카데미의 수장이 된 아르케실라오스가 아카데미 학파의 철학을 회의주의로 바꾸기 때문이다. 우선적으로 그는 독단주의적 사고를 비판한다. 그의 이러한 전략은 카르네아데스가 계승하며, 아카데미는 200년 가까이 회의주의의 지배하에 놓인다. 그런데 카르네아데스 사후, 아카데미의 후계자들은 회의주의 논변이 단순히 독단주의자를 논박하기 위한 대인논증일 뿐인지, 아니면 회의주의자도 무엇인가를 믿고 주장할 수 있는지를 놓고 심각한 논쟁을 벌인다. 급기야 아카데미의 중심인물이었던 아스칼론의 안티오코스가 스토아 학파로 전향하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결국 아카데미 학파와 스토아 학파 간의 논쟁은 스토아 학파가 스토아 학파와 싸우는 꼴이 되고 만다. 이 때, 아카데미 안에서 회의주의를 지속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아이네시데모스는 기원전 4세기의 회의주의자 피론에 매료되어, 그를 시조로 하는 강력한 회의주의 학파를 창시한다. 이것이 바로 피론주의 회의주의의 시작이다.
사실, 아이네시데모스가 왜 피론에게서 영감을 받았는지는 규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은 공통적으로 인식론적 평형과 인식론적 한계를 강조한다. 비록 구체적인 논의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나, 그들은 모두 마음의 평안을 목표로 한다. 행복한 삶의 길은 우리의 인식론적 한계를 인정하고, 관습이나 습관에 따라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의하면, “아이네시데모스는 《피론주의 담화》에서 피론이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으며 현상들에 따라 살았다고 말한다”고 한다. 물론 피론이 실제로 회의주의자였는지 아니었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논란의 여지는 있다. 이는 그가 고대의 유명한 철학자들처럼 저술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더하여 제자 티몬이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지 않고 온전히 그의 스승의 사상을 기록으로 남겼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하지만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그를 피론주의라고 불리는 회의주의 학파의 시조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아이네시데모스 또한 그의 위상을 인정하고 있다.
피론 이후, 그의 철학은 기원전 3세기 필로스의 티몬, 기원전 1세기의 아이네시데모스 그리고 기원후 2세기의 섹스투스 엠피리쿠스가 계승한다. 그런데 몇 백 년에 걸쳐 전개되는 피론주의의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아이네시데모스이다. 왜냐하면 피론주의의 핵심이 매우 복잡하고 딜레마적인 형태를 가진 파괴적인 논증이며, 이것이 섹스투스의 회의주의를 특징짓는 요소라고 했을 때, 그것을 체계화한 사람은 바로 아이네시데모스이기 때문이다. 그가 제시한 10가지 논증방식은 고대 회의주의자들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그것은 지식의 가능성에 대한 피론주의자들의 가장 강력한 논증이자 체계적인 이해의 산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에 본 연구자는 고대 회의주의 역사에서 독특한 정치적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피론주의 회의주의의 진정한 창시자로 간주되는 아이네시데모스의 철학적 고유성을 관련 문헌을 중심으로 전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