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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경덕왕대 삼모부인(三毛夫人)의 생애와 정치적 의미 = The Lady Sammo's biography and political significance in the reign of King Gyeongdeok of Silla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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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4066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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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Lady Sammo was the queen of King Gyeongdeok, 35th king of Silla dynasty, but she was banished from the palace. References to and explanations about her have hitherto focused on her banishment as part of the political dynamics of mid-Silla political history. This paper, however, focuses on her life history and attempts to interpret the political significance of Lady Sammo as represented by the dramatic transformation from being a queen to her banishment.
      First, information about her background and the political background of King Gyeongdeok's enthronement are provided, and Lady Sammo's lineage and marital relations are examined. Second, investigation is made into the political background and significance surrounding the event of her "banishment." Lady Sammo was banished soon after King Gyeongdeok's enthronement, but interestingly, she was invested with the title of "Lady Saryang." Furthermore, she appears in history as the donator for the casting of the Bell of Hwangnyong Monastery after she was banished. This shows that although she was no longer the queen of King Gyeongdeok, she was still active under some other social status after her banishment. Especially of interest is Lady Sammo's donation for the casting of the Bell of Hwangnyong Monastery, which was a temple of national importance, in light of the fact that the person who ordered the casting of the bell at the time was King Gyeongdeok, indicating that Lady Sammo's donation can be construed as maintenance of the political relationship between Lady Sammo and her king even after her banishment. As well, considering that the scale of the bell at Hwangnyong Monastery is four times heavier than the Bell of King Seondeok the Great, so-called Aemilae Bell, it could be said Lady Sammo had access to a sizeable financial base even after her banishment from the pa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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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dy Sammo was the queen of King Gyeongdeok, 35th king of Silla dynasty, but she was banished from the palace. References to and explanations about her have hitherto focused on her banishment as part of the political dynamics of mid-Silla political hi...

      Lady Sammo was the queen of King Gyeongdeok, 35th king of Silla dynasty, but she was banished from the palace. References to and explanations about her have hitherto focused on her banishment as part of the political dynamics of mid-Silla political history. This paper, however, focuses on her life history and attempts to interpret the political significance of Lady Sammo as represented by the dramatic transformation from being a queen to her banishment.
      First, information about her background and the political background of King Gyeongdeok's enthronement are provided, and Lady Sammo's lineage and marital relations are examined. Second, investigation is made into the political background and significance surrounding the event of her "banishment." Lady Sammo was banished soon after King Gyeongdeok's enthronement, but interestingly, she was invested with the title of "Lady Saryang." Furthermore, she appears in history as the donator for the casting of the Bell of Hwangnyong Monastery after she was banished. This shows that although she was no longer the queen of King Gyeongdeok, she was still active under some other social status after her banishment. Especially of interest is Lady Sammo's donation for the casting of the Bell of Hwangnyong Monastery, which was a temple of national importance, in light of the fact that the person who ordered the casting of the bell at the time was King Gyeongdeok, indicating that Lady Sammo's donation can be construed as maintenance of the political relationship between Lady Sammo and her king even after her banishment. As well, considering that the scale of the bell at Hwangnyong Monastery is four times heavier than the Bell of King Seondeok the Great, so-called Aemilae Bell, it could be said Lady Sammo had access to a sizeable financial base even after her banishment from the pa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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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삼모부인은 신라 제35대 경덕왕의 왕비였다가 출궁(出宮)되었던 인물이다. 삼모부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출궁’사건을 중심으로 신라 중대의 정치사 연구에서 정치적 역학관계를 설명하는 일환으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삼모부인이라는 한 여성의 생애사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면서, 왕비에서 출궁이라고 하는 삶의 궤적 속에 나타나는 삼모부인의 정치적 의미를 해석해보았다.
      삼모부인은 경덕왕이 즉위한 후 곧 출궁되지만 특이하게 ‘사량부인’으로 봉해졌다. 뿐만 아니라 출궁 후에 황룡사종 주조의 시주자로 역사에 등장하고 있다. 이는 삼모부인이 출궁으로 왕의 배우자로서의 관계는 없어지지만, 또 다른 정치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았다. 특히 황룡사종 주조의 주체가 경덕왕이라는 점에서 시주자인 삼모부인은 출궁 후에도 경덕왕과 정치적 협력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해석하였다. 황룡사종은 현재 남아 있는 속칭 에밀레종으로 알려진 ‘성덕대왕 신종’의 4배나 되는 무게로 알려졌는데, 여기에 소요되는 비용을 감당했다는 것은 출궁 뒤 삼모부인의 경제적 기반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고 보았다.
      왕비가 되었다가 출궁되었던 삼모부인의 삶은 신라 중대 왕비의 성격이나 정치 세력을 이해하는 데에도 시사점을 준다. 신라에서는 중대(中代)에 이르러 삼모부인과 같이 왕비가 후계자를 낳지 못하거나 정치적인 역학관계에서 밀려날 경우 출궁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 상대(上代)에 비해 왕비의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후대 고려나 조선시대 왕비와는 달리 출궁으로 왕비로서의 의미는 상실되지만 별도의 정치․사회적 지위를 누리며 독자적인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와함께 신라 중대에 삼모부인 일가라는 유력한 정치 세력의 존재를 추출할 수 있었다. 이들 일가의 정치적 성격은 왕권의 반대세력으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왕권과 밀착되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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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모부인은 신라 제35대 경덕왕의 왕비였다가 출궁(出宮)되었던 인물이다. 삼모부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출궁’사건을 중심으로 신라 중대의 정치사 연구에서 정치적 역학관계를 설명하...

      삼모부인은 신라 제35대 경덕왕의 왕비였다가 출궁(出宮)되었던 인물이다. 삼모부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출궁’사건을 중심으로 신라 중대의 정치사 연구에서 정치적 역학관계를 설명하는 일환으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삼모부인이라는 한 여성의 생애사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면서, 왕비에서 출궁이라고 하는 삶의 궤적 속에 나타나는 삼모부인의 정치적 의미를 해석해보았다.
      삼모부인은 경덕왕이 즉위한 후 곧 출궁되지만 특이하게 ‘사량부인’으로 봉해졌다. 뿐만 아니라 출궁 후에 황룡사종 주조의 시주자로 역사에 등장하고 있다. 이는 삼모부인이 출궁으로 왕의 배우자로서의 관계는 없어지지만, 또 다른 정치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았다. 특히 황룡사종 주조의 주체가 경덕왕이라는 점에서 시주자인 삼모부인은 출궁 후에도 경덕왕과 정치적 협력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해석하였다. 황룡사종은 현재 남아 있는 속칭 에밀레종으로 알려진 ‘성덕대왕 신종’의 4배나 되는 무게로 알려졌는데, 여기에 소요되는 비용을 감당했다는 것은 출궁 뒤 삼모부인의 경제적 기반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고 보았다.
      왕비가 되었다가 출궁되었던 삼모부인의 삶은 신라 중대 왕비의 성격이나 정치 세력을 이해하는 데에도 시사점을 준다. 신라에서는 중대(中代)에 이르러 삼모부인과 같이 왕비가 후계자를 낳지 못하거나 정치적인 역학관계에서 밀려날 경우 출궁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 상대(上代)에 비해 왕비의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후대 고려나 조선시대 왕비와는 달리 출궁으로 왕비로서의 의미는 상실되지만 별도의 정치․사회적 지위를 누리며 독자적인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와함께 신라 중대에 삼모부인 일가라는 유력한 정치 세력의 존재를 추출할 수 있었다. 이들 일가의 정치적 성격은 왕권의 반대세력으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왕권과 밀착되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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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朴海鉉, "신라 중대 정치사 연구" 국학자료원 2003

      2 김지은, "경덕왕대의 대일외교" 신라문화연구소 (30) : 117-136, 2007

      3 李基白, "黃龍寺와 그 創建, In 新羅思想史硏究" 一潮閣 61-75, 1986

      4 李基白, "韓國史講座(古代篇)" 一潮閣 1982

      5 鈴木靖民, "金順貞·金邕論" 45 : 21-38, 1967

      6 鄭求福, "迎日冷水里新羅碑의 金石學的 考察" 3 : 29-54, 1990

      7 韓國古代史硏究所,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Ⅱ․Ⅲ"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992

      8 金興三, "聖德王의 王權强化政策과 祭儀를 통한 河西州地方 統治(下)" 4 : 61-88, 1999

      9 金英美, "聖德王代 專制王權에 대한 一考察" 22 : 369-392, 1988

      10 李昊榮, "聖德大王神鐘의 解釋에 관한 몇가지 문제" 125 : 8-16, 1975

      1 朴海鉉, "신라 중대 정치사 연구" 국학자료원 2003

      2 김지은, "경덕왕대의 대일외교" 신라문화연구소 (30) : 117-136, 2007

      3 李基白, "黃龍寺와 그 創建, In 新羅思想史硏究" 一潮閣 61-75,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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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鄭求福, "迎日冷水里新羅碑의 金石學的 考察" 3 : 29-54,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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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金英美, "聖德王代 專制王權에 대한 一考察" 22 : 369-392, 1988

      10 李昊榮, "聖德大王神鐘의 解釋에 관한 몇가지 문제" 125 : 8-16, 1975

      11 "續日本紀"

      12 金壽泰, "統一新羅期 專制王權의 崩壞와 金邕" 99 : 123-145, 1983

      13 金英美, "統一新羅時代 阿彌陀信仰의 歷史的 性格" 50 : 37-78, 1985

      14 申瀅植, "統一新羅史硏究" 三知院 1990

      15 趙二玉, "統一新羅 景德王代의 專制王權과 祿邑에 對한 再解釋" 1 : 65-102, 1993

      16 李泳鎬, "新羅의 王權과 貴族社會-중대 국왕의 혼인 문제를 중심으로-" 신라문화연구소 (22) : 20-65, 2003

      17 李基白,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18 金壽泰, "新羅中代政治史硏究" 一潮閣 1996

      19 濱田耕策, "新羅 聖德王代神鐘と中代の王室" 3 : 24-46, 1980

      20 濱田耕策, "新羅 聖德王代の政治と外交, In 朝鮮歷史論集 上" 龍溪書舍 213-236, 1979

      21 趙二玉, "新羅 聖德王代 唐外交政策 硏究" 19 : 77-98, 1990

      22 金壽泰, "新羅 聖德王·孝成王代 金順元의 政治的 活動" 3 : 205-231, 1983

      23 박해현, "新羅 景德王代의 外戚 勢力" 11 : 323-351, 1997

      24 申政勳, "新羅 景德王代 王權强化策의 性格" 6 : 1-62, 2000

      25 金壽泰, "新羅 孝昭王代 眞骨貴族의 동향" 24 : 97-120, 1991

      26 박해현, "新羅 孝成王代 政治勢力의 推移" 12 : 327-354, 1993

      27 李基白, "新羅 執事部의 成立" 25 : 13-32, 1964

      28 李昊榮, "新羅 中代 王室과 奉德寺" 8 : 1-13, 1974

      29 金光洙, "新羅 中代 梵鐘의 造成背景에 관한 硏究" 경주대학교 1998

      30 全德在, "新羅 中代 對日外交의 推移와 眞骨貴族의 動向-聖德王-惠恭王代를 中心으로" 37 : 1-40, 1997

      31 조태영, "三國遺事 水路夫人 說話의 神話的 成層과 歷史的 實在" 16 : 15-33, 1999

      32 "三國遺事"

      33 "三國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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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 1차 FAIL (등재유지) KCI등재
      200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6-06-10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전남사학 -> 역사학연구 KCI등재
      2006-03-21 학회명변경 한글명 : 전남사학회 -> 호남사학회
      영문명 : Chonnam Historical Association -> Honam Historical Associ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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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4-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3-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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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68 0.68 0.68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63 0.6 1.183 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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