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의 생부(生父)인 정원군(定遠君)이 원종(元宗)으로 추숭된 것은 인조 10년인 1632년이다. 원종추숭 문제는 인조 즉위 초에 인조가 정원군의 사묘(私廟)에 고하는 축문의 두사(頭辭)에 ‘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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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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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인조의 생부(生父)인 정원군(定遠君)이 원종(元宗)으로 추숭된 것은 인조 10년인 1632년이다. 원종추숭 문제는 인조 즉위 초에 인조가 정원군의 사묘(私廟)에 고하는 축문의 두사(頭辭)에 ‘칭...
인조의 생부(生父)인 정원군(定遠君)이 원종(元宗)으로 추숭된 것은 인조 10년인 1632년이다. 원종추숭 문제는 인조 즉위 초에 인조가 정원군의 사묘(私廟)에 고하는 축문의 두사(頭辭)에 ‘칭고칭자(稱考稱子)’할 수 있는가 하는 논란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이 논란은 인조가 ‘반정(反正)’이란 명분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조부인 선조(宣祖)에게서 직접 계승하게 되면서 생부인 정원군과의 관계를 어떻게 보아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출발하여,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숭되기까지 인조통치 전반기 최대의 정치적 쟁점이었다.
인조 즉위 초에 산림(山林)으로 명망이 높았던 김장생과 박지계의 서로 다른 예론(禮論) 주장은 추숭론과 추숭반대론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고 추숭문제를 정치적 쟁점으로 비화시켰다. 그러므로 원종추숭 문제에 대한 연구로는 예론에 초점을 맞춘 것이 있다.
인조의 원종추숭은 다수의 거센 반대 여론(소위 공론)에 부딪혔다. 다수의 반대여론을 무릅쓴 원종추숭 강행에 대해 이성무는 반정이란 비상수단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왕통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무리하게 종법상의 정통 즉 종통(宗統)을 확립한 사례라고 해석했다.
또한 반정공신이 정치적 입지를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공론의 거센 저항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원종추숭을 관철시켰다고 보았다.
이영춘은 선조(先祖)의 추존(追尊)은 유교국가에서 효도를 장려하는 전례(典禮)였고, 인조가 특히 효를 중시했으며 효성이 깊었으므로 비록 생부를 높이고자 하는 욕심에서 나왔다하더라도 효성이란 명분으로 제기되었기 때문에 신료들이 끝내 말릴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해석했다.
오수창은 일찍이 인조의 원종추숭에 대해서는 일부 추숭론자를 제외하면 당색(黨色)과 관계없이 반대의견이 보편적이었던 것은 당시인들에게 예(禮)와 이(理)라는 신념 즉 성리학적 명분이 강했다고 지적했다.
이상과 같이 지금까지의 원종추숭에 관한 연구경향은 추숭론과 추숭반대론의 이론적 근거가 된 예론과 인조반정의 정통성확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추숭과정을 살펴보면서 인조의 역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일부 추숭론자를 제외하면 추숭반대론자가 대다수였고 당시 여론은 추숭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는데 인조가 거센 반대 여론에 굴복하지 않고 결국 원종추숭을 추진하고 완성하는 과정에서 주도적이고 끈기 있는 추진력과 정치력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필자는 원종추숭에 대한 인조의 태도와 입장에 초점을 맞추었다. 다수의 추숭반대론자와 소수의 추숭론자 사이에서 보였던 10년간의 인조의 언행과 태도를 시기별로 정리하여 인조의 원종추숭의 결행의 의미 살펴보고자 한다. 원종추숭 과정을 시기적으로 크게 두 단계로 나누었다. 첫째는 인조 즉위 초에 사묘의 칭호에 대한 논쟁에서 인조 4년 생모인 계운궁(啓運宮)의 죽음으로 야기된 계운궁의 상제례(喪祭禮)에 대한 논란까지이다. 이 시기를 원종추숭에 빌미가 된 추숭의 발단시기로 보았다. 둘째는 정원군 묘의 이장에서 공식적으로 추숭도감을 설치하는 인조 10년까지로 추숭의 본격적인 전개시기로 보았다. 이 작업을 통해 상당한 인내심과 끈기를 가지고 원종추숭을 추진했던 인조의 추진력과 추숭론자와 추숭반대론자들을 적절하게 조종하며 왕권을 공고히 하고 신권을 견제하고자 했던 인조의 정치력을 부각시켜보고자 한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article discusses the political ability of Injo through the dispute on the posthumous name Wonjong who is Injo`s biological father. Injo who dethroned Kuanghaekun(光海君) by military coup and ascended the throne was regarded as direct successo...
This article discusses the political ability of Injo through the dispute on the posthumous name Wonjong who is Injo`s biological father. Injo who dethroned Kuanghaekun(光海君) by military coup and ascended the throne was regarded as direct successor of Sunjo(宣祖) who is his grandfather. So as soon as Injo ascended the throne, there was the argument about the relationship of Injo and his father Jeongwonkun(定遠君). This was the most political dispute of the first half of reign of Injo , which was bestowed Jeongwonkun the posthumous name Wonjong in 1632.
The process of the dispute on the posthumous name was divided into two stage. The first stage was begun by the argument about the name of private shrine, and ended by the argument about the funeral rites of Keunkung(啓運宮) who is Injo`s biological mother. In this time, Injo named his title as the son of Jeongwonkun through the transformed rites(變禮). This was the cause of the dispute about posthumous name Wonjong. In the funeral rites of Keunkung, Injo couldn`t hold two-year mourning like his hope, but he could perform the funeral rites of Keunkung regarding as the Rites of Royal funeral(國喪), and firmly maintained to hold two-year mourning in his mind. He really treated his mother Keunkung as a queen in the two-year mourning funeral rites. In addition to the funeral rites of Keunkung, Injo ordered the government to raise the name of the tomb of Jeongwonkun, and he wanted to complete the posthumous name Wonjong. But this attempt was stopped by invasion of the early Ching(丁卯胡亂, 1627). The second stage was the period which the posthumous name was completed in 1632.
In this stage Injo controled the bitter dispute on the posthumous name which divided all ministers into two side, and consolidated the power of king.
논문의제출일 미상 본문에 나와있지 않음 정보원 : 호서사학;36집;135-169쪽;2003
논문의제출일 미상
본문에 나와있지 않음
정보원 : 호서사학;36집;135-169쪽;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