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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말 일제강점기 민족사학자들의 위만과 위만조선 이해와 서술 = Korean Nationalist Historians' Understanding on Wiman-Choson during from Late Choson Dynasty to Japanese Colonial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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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4808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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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studies on Wiman(衛滿) and Wiman-Choson(衛滿朝鮮) were accumulated in the departments of Ancient Korean History. So modern Korean Historians were no intervened places on the narratives of Wiman and Wiman-Choson. However we focus on the inventing of Korean national history during from Late Choson dynasty to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Korean Nationalist Historians regard Wiman as a Chinese surrendered person or a naturalized person to Kija-Choson.
      For the purpose of colonial rule, the Japanese official scholars emphasized that the Wiman-Choson were the ancient Chinese Colony. They also removed the components of Korean identities. In contrast, Korean Nationalist Historians stressed on the momentum of Korean's solidarity even though the agreement of Wiman's Chinese origin.
      After this, we will effort to advance the search of many modern narratives on ancient Korean history. First, we compare the discourse on Wiman-Choson between the Mailsinbo(每日申報) and the Koreans published newspapers. Second, we scrutinize the Korean nationalist historian's efforts of oblivion on Kija-Choson and Wiman-Choson which came from China. Lastly, we try to connect the understanding Wiman-Choson at colonial period and re-interpretation after Korean liberation at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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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studies on Wiman(衛滿) and Wiman-Choson(衛滿朝鮮) were accumulated in the departments of Ancient Korean History. So modern Korean Historians were no intervened places on the narratives of Wiman and Wiman-Choson. However we focus on the inven...

      The studies on Wiman(衛滿) and Wiman-Choson(衛滿朝鮮) were accumulated in the departments of Ancient Korean History. So modern Korean Historians were no intervened places on the narratives of Wiman and Wiman-Choson. However we focus on the inventing of Korean national history during from Late Choson dynasty to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Korean Nationalist Historians regard Wiman as a Chinese surrendered person or a naturalized person to Kija-Choson.
      For the purpose of colonial rule, the Japanese official scholars emphasized that the Wiman-Choson were the ancient Chinese Colony. They also removed the components of Korean identities. In contrast, Korean Nationalist Historians stressed on the momentum of Korean's solidarity even though the agreement of Wiman's Chinese origin.
      After this, we will effort to advance the search of many modern narratives on ancient Korean history. First, we compare the discourse on Wiman-Choson between the Mailsinbo(每日申報) and the Koreans published newspapers. Second, we scrutinize the Korean nationalist historian's efforts of oblivion on Kija-Choson and Wiman-Choson which came from China. Lastly, we try to connect the understanding Wiman-Choson at colonial period and re-interpretation after Korean liberation at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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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고대사의 영역에서 고조선 연구의 일환으로 위만과 위만조선에 관한 많은 성과가 축적되어 왔다. 그럼에도 근대 민족사를 서술하는 방식은 민족공동체를 그 외부의 집단과 구별하는 것을 전제로, 과거의 사건과 사실을 민족적 입장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위만을 ‘항인(降人)’ 중국인, 귀화인 등으로 설명하는 것은 근대적 해석이다. 따라서 근현대 민족사의 구성에서 위만과 위만조선에 관한 이해와 해석은 중요한 문제가 된다.
      한말 일제강점기를 통해 일본인 관학자들은 과거 위만조선을 중국의 식민지로 규정해서 일제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고자 했다. 이들은위만과 위만조선에 관한 연구 속에서 ‘조선적인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자 했다. 반면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위만조선과 한사군에 관해서는 그 실체를 인정하면서도 중국이란 타자의 침략에 대한 대응으로 민족적 단합의 계기인 점을 강조했다.
      향후 위만(조선)에 관한 근대적 해석을 살펴보기 위해 우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 조선인 언론매체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와 차이가 있는지 다음으로 위만조선의 문화와 이후 한사군 특히 낙랑의 문화를 어떻게 구별하는지 그리고 위만(조선)의 ‘부정적인’ 역사가 해방 후에 어떻게 해석되는지를 연결시켜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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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사의 영역에서 고조선 연구의 일환으로 위만과 위만조선에 관한 많은 성과가 축적되어 왔다. 그럼에도 근대 민족사를 서술하는 방식은 민족공동체를 그 외부의 집단과 구별하는 것을 ...

      고대사의 영역에서 고조선 연구의 일환으로 위만과 위만조선에 관한 많은 성과가 축적되어 왔다. 그럼에도 근대 민족사를 서술하는 방식은 민족공동체를 그 외부의 집단과 구별하는 것을 전제로, 과거의 사건과 사실을 민족적 입장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위만을 ‘항인(降人)’ 중국인, 귀화인 등으로 설명하는 것은 근대적 해석이다. 따라서 근현대 민족사의 구성에서 위만과 위만조선에 관한 이해와 해석은 중요한 문제가 된다.
      한말 일제강점기를 통해 일본인 관학자들은 과거 위만조선을 중국의 식민지로 규정해서 일제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고자 했다. 이들은위만과 위만조선에 관한 연구 속에서 ‘조선적인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자 했다. 반면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위만조선과 한사군에 관해서는 그 실체를 인정하면서도 중국이란 타자의 침략에 대한 대응으로 민족적 단합의 계기인 점을 강조했다.
      향후 위만(조선)에 관한 근대적 해석을 살펴보기 위해 우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 조선인 언론매체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와 차이가 있는지 다음으로 위만조선의 문화와 이후 한사군 특히 낙랑의 문화를 어떻게 구별하는지 그리고 위만(조선)의 ‘부정적인’ 역사가 해방 후에 어떻게 해석되는지를 연결시켜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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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조동걸, "현대한국사학사" 나남출판 2008

      2 조법종, "한국사연구회" 한국사연구회 110 : 2000

      3 조법종, "한국 고대사회의 고조선단군인식 연구- 고조선고구려시기 단군인식의 계승성을 중심으로 -" 한국고대학회 (23) : 147-172, 2005

      4 이영화, "최남선의 역사학" 경인문화사 2003

      5 장지연, "지리 3 (속)" 5 : 1906

      6 서영수, "위만조선의 형성과정과 국가적 성격" 한국고대사학회 9 : 1996

      7 윤내현, "위만조선의 재인식" 단군사학회 19 : 1985

      8 김남중, "위만조선의 영역과 왕험성" 한국고대사학회 22 : 2001

      9 조법종, "위만조선에 대한 전쟁과 降漢제후국의 성격" 한국고대학회 14 : 2000

      10 김시황, "위만조선에 대한 새로운 이해" 동양예학회 31 : 2014

      1 조동걸, "현대한국사학사" 나남출판 2008

      2 조법종, "한국사연구회" 한국사연구회 110 : 2000

      3 조법종, "한국 고대사회의 고조선단군인식 연구- 고조선고구려시기 단군인식의 계승성을 중심으로 -" 한국고대학회 (23) : 147-172, 2005

      4 이영화, "최남선의 역사학" 경인문화사 2003

      5 장지연, "지리 3 (속)" 5 : 1906

      6 서영수, "위만조선의 형성과정과 국가적 성격" 한국고대사학회 9 : 1996

      7 윤내현, "위만조선의 재인식" 단군사학회 19 : 1985

      8 김남중, "위만조선의 영역과 왕험성" 한국고대사학회 22 : 2001

      9 조법종, "위만조선에 대한 전쟁과 降漢제후국의 성격" 한국고대학회 14 : 2000

      10 김시황, "위만조선에 대한 새로운 이해" 동양예학회 31 : 2014

      11 김남중, "위만조선과 고구려 초기의 相" 한국고대사탐구학회 (14) : 5-42, 2013

      12 오영찬, "위만조선 및 낙랑군과 진변한지역의 교섭" 이화사학연구소 (47) : 1-35, 2013

      13 김한규, "위만조선 관계 중국측 사료에 대한 재검토" 신라대학교 8 : 1980

      14 김남중, "위만의 출신 종족에 대한 再考" 한국고대학회 (42) : 5-29, 2014

      15 한영우, "역사학의 역사" 지식산업사 2002

      16 이석용, "역사와 국성(國性)의 관계" 18 : 1909

      17 김교헌, "신단실기" 한뿌리 1986

      18 허연자, "대동자논사(對童子論史)" 3 : 1908

      19 오영찬, "기원전 2세기대 서북한 고고 자료와 위만조선" 한국고대사학회 (76) : 95-125, 2014

      20 박선미, "고고학 자료로 본 위만조선의 문화 성격 – 평양 일대의 고분을 중심으로 –" 동양학연구원 (53) : 247-276, 2013

      21 송영대, "高句麗와 唐의 箕子朝鮮 認識 檢討" 부산경남사학회 (100) : 171-202, 2016

      22 김남중, "險瀆과 고조선의 관계" 고려사학회 (61) : 77-108, 2015

      23 김남중, "衛滿朝鮮의 王權과 地方統治體制" 한국고대사학회 33 : 141-174, 2004

      24 오현수, "箕子傳承의 형성과정 연구" 고려사학회 (65) : 51-87, 2016

      25 박찬흥, "滿鮮史觀에서의 한국고대사 인식 연구" 고려사학회 (29) : 9-40, 2007

      26 박경철, "古朝鮮 對外關係 進展과 衛滿朝鮮" 동북아역사재단 (44) : 13-63, 2014

      27 육당전집편찬위원회, "『육당 최남선전집』 1~3" 현암사 1975

      28 백암박은식선생전집편찬위원회, "『백암박은식전집』 1" 동방미디어 2002

      29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 "『단재신채호전집』 2·3"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30 고구려연구재단, "『고조선·단군·부여 자료집』 상" 2005

      31 박찬흥, "‘만선사’에서의 고대 만주 역사에 대한 인식" 한국고대사학회 (76) : 127-16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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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67 0.67 0.62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64 0.63 1.2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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