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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학술대회 : 세종의 국가경영과 한국학의 미래_3차 학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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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기조강연> 전통과 사회보존의 국가경영 - 이홍구 세종과 유교적 국가경영 - 이성무 <1차 학술회의> 세종의 국가경영 연구 : 리더십 접근에...

      <기조강연>
      전통과 사회보존의 국가경영 - 이홍구
      세종과 유교적 국가경영 - 이성무
      <1차 학술회의>
      세종의 국가경영 연구 : 리더십 접근에 의한 세종시대 신연구 - 정윤재
      세종의 유교적 법치 : 인정과 법의 관계를 중심으로 - 박영도
      세종의 시인발정의 국가경영 : 수령구임책의 도입과 실행과정을 중심으로 - 배병삼
      세종조 사대교린의 국가경영 : 대마도 정벌과 파저강 토벌을 중심으로 - 이지경
      세종의 공론형성의 국가경영 : 공법도입과정을 중심으로- 박현모
      <2차 학술회의>
      세종 국가경영의 기초 : 성장과 교육 - 정재훈
      세종의 위민적 국가경영 : 훈민정음 창제를 중심으로 - 유미림
      세종의 국가경영에 있어서 불교와 유교 : 신앙과 정치 사이의 긴장과 통합 - 부남철
      세종시대 과학기술의 자주성에 대한 검토 - 문중양
      세종의 유교적 국가경영 : 예, 악을 중심으로 - 강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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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세종의 국가경영 연구 : 리더십 접근에 의한 세종시대 신연구 - 정윤재 세종시대에 관한 그간의 연구업적들은 비교적 풍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문화 혹은 문화정책 중심 ...

      세종의 국가경영 연구 : 리더십 접근에 의한 세종시대 신연구 - 정윤재
      세종시대에 관한 그간의 연구업적들은 비교적 풍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문화 혹은 문화정책 중심 연구들로서 그러한 업적들이 생산되게된 정치적 배경으로서 세종의 국가경영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는 형편이다. 정치와 관련된 연구업적들이 전혀 없을 수는 없지만, 그것들 역시 대부분 정치적 권력갈등을 묘사하거나, 왕이 아닌 사대부들의 정치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세종조를 포함한 조선시대의 연구는 지나치게 사상 혹은 철학적 논변중심으로 수행되어 조선시대의 장기지속성과 나름대로 지녔던 다니내미즘을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본 연구는 세종조에 대한 “리더십 접근”을 시도하여, 세종의 다양한 업적들이 생산된 배경으로서의 그의 국가경영 내용을 드러내고 평가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러한 리더십 접근을 통해 연구자들은, 세종의 성장과 교육과정, 유교적 비전, 상황인식과 처방, 주변엘리트 및 국민과의 관계 및 소통방식, 각종 정책들의 입안 및 집행방식, 정책수행의 결과에 대한 인식과 평가,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고자 한다.
      리더십 접근에 의한 세종의 국가경영 연구는 적어도 다음 3 가지의 의의를 지닌 것으로 생각한다. 첫째, 조선왕조에 대한 내재적 접근으로 생산된 새로운 지식을 바탕으로 기존의 부정적 인식과 평가를 극복하고 나아가 조선왕조의 長期持續 原因分析에 기여할 수 있다. 조선왕조가 일제에 의해 패망한 이후, 유교정치시대였던 조선왕조는 비록 문화적으로는 우수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보잘것이 없었던 시기로 평가되는 것이 상례였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과 평가는 조선왕조 패망 이후, 신채호나 박은식과 같은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의 조선왕조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그것은 한민족과 한민족사의 고칠 수 없는 정치적 한계로 단정해버리는 소위 ‘정체사관’(停滯史觀)으로 변질되었다. 그러나 이제 동아시아 역사상 유교국가로서 500년 이상 지속되었던 국가가 조선왕조 뿐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유의하여, 조선왕조 지속의 국제환경, 정치사상, 문화, 국가경영상의 원인들에 대한 분석과 평가가 새롭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세종의 국가경영 연구는 조선왕조 지속원인에 대한 탐구의 단초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둘째, 조선왕조의 위민적(爲民的) 국가경영 과정은 현대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유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민주적 정부는 주권재민의 원칙(of the people)과 인민참여의 원칙(by the people)뿐 아니라 위민이 원칙(for the people)에 따라 운영되는 정부이기 때문이다. 2차대전 이후 세계 각 지역에 보급된 민주주의는 주권재민의 원칙과 인민참여의 원칙에 너무 경도되어 위민의 원칙에 따른 국가와 공직담임자들의 책임과 권위, 그리고 효율적인 국정관리의 중요성이 경시되는 경향이 있었다(Zakaria 2003). 수기치인의 정치이론이라 할 수 있는 유교사상과 그 실천적 사례로서의 조선왕조의 국가경영 연구는 현대민주주의의 이러한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공공리더십의 혁신과 교육에 기여할 수 있는 자료생산에 부응하는 것이다.
      셋째, 이러한 연구는 궁극적으로 “유교적 국가경영”(Confucian statecraft)의 개념화에 유용한 자원을 제공할 수 있다. 이제까지 유교정치 혹은 유교적 국가경영과 관련된 연구는 주로 경서읽기와 해석의 방법으로 수행되어왔으나, 세종의 국가경영 연구와 같이 유교적 이상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실제로 노력했던 실천적 과정들에 대한 분석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설사 정치과정에 대한 분석이 있었다 하더라도 대부분 ‘당쟁’이나 ‘권력쟁투’의 관점에서 시도되었기 때문에 유교정치의 전반적인 양태를 포괄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세종의 국가경영 연구와 같은 유교정치의 실천사례들이 꾸준히 연구되고 축적된다면 이는 궁극적으로 조선시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유교적 국가경영의 개념화 혹은 모델의 생산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세종의 유교적 법치 : 인정과 법의 관계를 중심으로 - 박영도
      유교적 법치라는 말을 들으면 과연 유교에 대해 법치를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부터 생기는 경우가 많다. 여기엔 크게 보아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첫째는 공법이 아니라 사법에서 출발하여 국가권력으로부터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주된 과제로 설정한 근대 서구의 법치 개념에서 의거하여, 유교적 국가경영이 법치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군주 일인의 전횡에 휘둘리는 전제군주체제라고 여기는 견해이다. 동아시아에서 법치가 개인의 권리를 국가권력으로부터 보호하는 장치로 이해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유교적 국가경영에서 법치를 부정하는 것은 법치를 서구적 유형으로 환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법치는 서구처럼 민법이 아니라 형법과 행정법 등의 공법을 중심으로 고유한 모습을 지니고 발전했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둘째, 동아시아에서 나름의 법치 전통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법치는 법가적 정치관일 뿐이고, 유교의 기본적 정치관인 인치, 예치, 덕치와 대립된다는 일종의 상식적 관점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 상식적 관점은 중국 정치사의 초기 맥락에서 법가가 유가와의 차별 속에서 자신을 분명하게 부각하기 위하여 유교와 법치의 대립을 강조한 점과 관련되어 있으며, 또 근세에 와서 유교 문명권의 쇠락과 관련하여 유교의 무능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이번에는 서구적 법치와의 비교 속에서 이 대립이 다시 강조되었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승환, 1998 : 170-171) 또 유교적 국가경영에서 실제의 법치적 작동과 유교적 자기이해 사이에 괴리가 있었다는 점도 상식적 관점의 유포에 일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유교적 국가경영에서 법치를 배제하려는 관점은 적어도 진시대의 법치 이후 유교적 국가경영에서 법치가 더 이상 배제될 수 없는 토대였으며, 유법(儒法)결합이 유교의 정통 법사상의 중심을 형성했으며, 실제로 국가경영의 주된 원칙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오해라고 할 수 있다.
      세종시대는 유교적 국가경영의 황금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의 목적은 세종의 유교적 국가경영을 유교적 법치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이를 통해 근대의 서구적 법치나 중국 전통시대의 법가적 법치와는 구별되는 유교적 법치의 구조적 특징을 확인하는데 있다. 위에서 언급한 의구심에 함축되어 있는 환원의 오류를 범하지 않으면서 세종의 유교적 법치에 접근하기 위해 먼저 종의 해석학적 출발점으로서 법치의 의미를 기능적 관점에서 재구성해보고 이어서 역사적 시각에서 유교적 법치의 일반적 특징을 법가적 법치 및 서구적 법치와의 구별 속에서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세종의 국가경영 활동에서 나타나는 유교적 법치의 특징을 仁政과 법의 관계를 중심으로 사법의 맥락과입법의 맥락으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다.

      세종의 시인발정의 국가경영 : 수령구임책의 도입과 실행과정을 중심으로 - 배병삼
      세종은 ‘정치가(君主)’란 역사연구라는 나침반에 의지하여 국가를 끌어가는 ‘선장’과 같은 존재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세종의 국가경영론은 시인발정(施仁發政)이라는 개념 속에서 잘 보인다. 이는 곧 경학(經學)적으로는 맹자사상을 세종이 잇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실제를 수령 구임책(守令久任策)의 일환으로 제시한 ‘6년 임기제’(그 전엔 ‘3년 임기제’였음)를 어떻게 정착시켰던지 그 과정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이 제도는 세종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해 추진되었다. 세종은 역사적 사례를 통해 확인된 정책인 경우, 공론을 거스르면서도 끝까지 추진하여 제도화시키는 집중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수령육기제는 <중용>에서 말한 바, “선(善)을 엄선하여 단단히 붙잡음(固執之)”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세종 리더십의 특징은 ‘텍스트에 대한 이해’와 ‘정치적 해석능력’에서 비롯되었다.
      첫째, 수령육기제를 경사(經史) 연구를 통해 다양한 사례를 확인하였다. 즉 유교경전과 역사서에 대한 깊은 독서(이해)를 바탕으로, 당시 조선의 정황에 걸맞은 정치적 해석과정을 거쳐 정치적 전략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세종의 독단, 또는 정책시행을 위한 설득의 힘은 ‘학문연구’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둘째, 그러나 세종의 학문인식은 텍스트(經史)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당대 현실정치를 중심에 놓고 문제해결 방편을 찾는, 실용적 차원에서 접근한 점도 주목해야할 점이다. 그는 경전과 역사서를 그 자체 진리의 현현으로 절대화하지 않았고, 정치적 필요성에 따라 상대적(용도적)으로 사용할 줄 알았다. 이점은 곧 그가 디디고 서 있는 현실세계를 중심으로 또 과거에 매몰되지 않고 미래를 과제로 삼는 주체적이고 능동적 자세를 갖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이 그의 정치가로서의 시공간 감각이라고 판단된다.

      세종의 공론형성의 국가경영 : 공법도입과정을 중심으로- 박현모
      세종의 중요한 치적의 하나로 거론되는 세제개혁은 그 ‘내용’ 못지않게 개혁안을 입법·시행하는 ‘과정’에 있어서 독특했다. 그 개혁은 한마디로, 중앙에서 파견된 조사관이 풍흉의 정도를 보고 세액을 매기는 ‘손실답험법’ 대신, 토지의 비옥도와 지역별 수확량에 따라 국가에서 정한 일정액을 내도록 하는 ‘貢法’으로의 전환을 말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공법을 제정·시행하는 ‘과정’인데, 놀랍게도 세종은 무려 ‘17년간의 긴 토론’을 거치면서 반대자들까지도 그 제도의 필요성을 인정한 상태에서 시행에 들어갔다. 그러면 세종은 당시 기득 세력이라 할 수 있는 고위관료들의 반대를 어떻게 극복해 나갔는가? 아마도 ‘세계 최초’라고 할 수 있는 전국적인 여론조사라는 방책을 사용한 세종의 생각은 무엇이었으며, 그 조사에 대해서 당시 신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무엇보다도 조선왕조의 정치운영 메커니즘인 공론정치의 관점에서 볼 때, 세종의 공론형성과 “熟議”의 정치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런 세종의 정치와 국가경영의 리더십으로부터 오늘날 한국정치가 배울 점은 없는가? 이 글은 바로 이와 같은 일련의 물음에 대한 작은 대답의 시도이다.

      세종 국가경영의 기초 : 성장과 교육 - 정재훈
      세종은 조선왕조의 기틀을 잡는데 크게 기여한 국왕이다. 조선왕조가 건국된 지 27년 만에 등극한 세종에게는 새로운 왕조의 기반을 마련해야 하는 책무가 부여되어 있었다. 세종은 태종의 셋째아들로서 이미 맏형이 세자로 있는 상황에서 왕위계승의 가능성이 별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세자로서 왕위를 준비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호학(好學)으로 인해 오히려 왕위계승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성리학이라는 신학문의 탐구를 통해 학문을 닦을 수 있었다. 짧은 2달여간의 세자 기간 동안 본격적인 왕세자 수업을 받지는 못했으나 이미 16세 때 대군이 되면서 성리학을 착실히 익힌 이수(李隨, 1374~1430)을 맞이하여 훌륭한 학자로서의 소양을 기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해서 세종은 자신이 왕위에 있으면서 왕세자 교육의 틀을 어느정도 갖추었다. 조선초기에 이루어진 제도가 대체로 초기에는 태종 때에 그 기틀이 마련되기 시작하여 세종 때에 어느 정도 정비가 되며, 이후 성종 때까지 수선과 보완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세종 때에는 왕세자 교육에서도 집현전(集賢殿)을 중심으로 교육이 이루어지는 등 제도적인 정비가 이루어진다.
      왕세자 교육을 위해 마련된 서연(書筵)에서도 고려때의 지배원리를 대체해서 등장한 성리학과 관련된 서적들이 주로 교재로 채택되었다. 국왕의 교육을 위해 마련된 경연(經筵)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왕세자교육에서도 성리학의 중심 경전인 사서(四書)와 이에 앞서 공부하는 『효경(孝經)』이나 『소학(小學)』등이 주목되었다. 한편 조선초기에는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하려는 목적에서 제왕학을 위해 저술되었던 『대학연의(大學衍義)』와 진(秦)·한(漢)에서부터 명(明)나라 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제고(制誥)·조칙(詔勅)을 편찬하여 요약한 『사륜요집(絲綸要集)』 등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왕자교육의 틀은 세종대에 크게 정비되어 이후 세자시강원으로 이어지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었다.

      세종의 위민적 국가경영 : 훈민정음 창제를 중심으로 - 유미림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이 국가경영 구상을 실천하려는 방략의 일환으로 나온 것이다. 이는 세종대에 추진된 일련의 언어·문화적 업적들이 일련의 인적 자원과 정책적 지속성의 측면에서 연관되어 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특히 정음은 그것이 창제되어야 다른 어문 정책의 실행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일차적인 사업으로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정음 창제의 필요성은 교화의 확대와 율문의 언문화, 운서의 편찬이라는 현실적인 요구에서 촉진된 측면이 크지만, 여기에는 이러한 사업을 조선인의 풍토와 특성에 맞추어 만들어야 한다는 세종의 자의식이 크게 작용하였다.
      어문정책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세종은 선제권을 잡고 일을 추진하였는데, 정책을 추진할 때는 되도록이면 비공개로 추진하거나 신임할 만한 최소한의 인원으로 극비리에 추진함으로써 반대를 최소화하고자 했다. 또한 반대가 있다 하더라도 이들을 설복하는 과정에서 정당성을 확보하여 이니셔티브를 취하려 했다. 이때 신하들을 제압하기 위해 세종이 택한 방식은 이치와 명분에 근거하여 따져 묻는 방식이었다.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 논리가 명분이 없음을 지적하고 자신의 정책은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애민’의 명분을 내세움으로써 정책의 정당성을 유교의 명분론에서 구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 희생양을 만들어냄으로써 반대 세력을 제압하고 그로써 경계시키는 방식을 취하였다.
      훈민정음은 그것을 이용하여 용비어천가를 만들었는데, 그 내용이 왕조 창출의 비정통성, 비도덕성을 합리화하기 위한 송덕가라는 점은 일련의 언어정책이 궁극적으로는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왕조의 정당성을 확립시키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세종의 국가경영에 있어서 불교와 유교 : 신앙과 정치 사이의 긴장과 통합 - 부남철
      이 논문은 유교정치를 추구한 세종이 불교를 신앙의 차원에서 그 필요성을 인정하고 표용한 측면을 연구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유교와 불교는 이론적으로 갈등 관계로 볼 수 있지만 세종은 유교정치를 하면서 불교라는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유교 정치를 목표로 삼았지만 불교 신앙을 유지했다. 그렇지만 세종은 자신의 신앙과 국가 정책상의 목표를 분명하게 구별했다. 그래서 그는 세속화된 불교계를 정책적으로 정비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런 그의 불교 개혁의 목표는 불교를 근절하자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앙으로서의 치에 남아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당시에 불교가 신앙으로서 국가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일정 부분 역할을 하고 있음을 주목했다. 그것 중의 하나는 불교가 여전히 다수의 신앙으로서 종교적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당시에는 성리학을 공부한 학자들 일부도 불교 신앙을 유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강경한 불교 비판 여론이 있었지만 세종은 불교계의 활동을 인정하고 묵인하는 정책을 취하면서 불교 개혁의 내용과 완급을 조절했다. 세종의 이러한 조치는 유학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념적으로 혼란스러운 것이지만 국가경영을 책임진 군주의 입장에서는 당시의 현실적 상황에 부합하는 적절한 정책을 취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세종시대 과학기술의 자주성에 대한 검토 - 문중양
      세종시대 과학기술의 성격에 대한 선학들의 연구는 공통적으로 ‘유교적 통치이념의 구현’과 함께 조선이라는 ‘새 왕조의 건설’과 ‘자주적’이라는 성격이 지적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자주성의 의미는 논자에 따라 조금씩 달랐지만 대체적으로 중국에의 의존으로부터 벗어나 그것을 독자적으로 극복하는 의미였다. 자주성의 의미가 이렇다면 세종의 국가경영과 관련해서 세종시대 과학기술의 역사적 성격으로 부여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적어도 유교적 통치이념의 이상적 구현을 위한 과학기술과 중국에의 의존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과학기술을 수립한다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역사상이 아닐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이라는 나라가 건국과 함께 성리학적 통치이념과 사회질서를 기본 축으로 운영되던 나라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더 그러했다. 조선 초기 무렵에는 조선 지배층들의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아직은 심화되지 못했던 때이고, 이후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조선 초기의 시기에는 선진적인 중국적인 것의 수용과 정착을 통해 유교적 통치이념의 구현을 추구하는 것이 당면 과제였다면, 중국적인 것으로부터 탈피해 자주적인 무언가의 것을 추구하는 것은 훨씬 나중의 사안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논문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세종시대 자주적이었다고 이해되던 것들을 재검토해 보았다. 잠정적 결론은 자주적이라거나 중국의 의존에서 벗어나는 조선의 특수성을 주장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선진적인 중국의 것을 배워 익히려는 제 노력의 과정에서 나온 ‘지역성’에 대한 인식이었다는 것이다. 강남농법 수준의 농업기술을 궁극적으로 목표로 했던 『농사직설』, 금원의학의 궁극적인 소화와 정착을 목표로 했던 『향약집성방』, 그리고 ‘성인의 도’를 구현하는 데 저해가 되었던 조선의 혼란스러운 성운학과 문자학을 정리하려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훈민정음의 창제 등이 그것이었다. 그것들은 결국 조선을 선진국 중국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과정에서 조선이 중국과 다르다는 특수성 또는 개별성을 인지하고 고려해야 한다는 논리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유교적 이상국가와 사회를 추구하려는 세종의 중심적인 정책으로 고제 연구와 아악의 정비를 살펴보았다. 세종은 이상적인 유교적 제도로서의 고제(古制)를 추구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것을 어렵게 했다. 그것은 중국의 보편성과 조선의 지역성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중국의 보편성은 고대의 이상적인 ‘고제’(古制)일수도 있지만 현실 속의 동시대 천자가 부여한 ‘시왕지제’(時王之制)일 수도 있었다. 조선의 지역성은 고제와도 달랐고 시왕지제와도 달랐던 것이다. 율관의 제정과 아악의 정비 과정을 통해 이러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세종은 고제의 변통을 통해서 시왕지제와 부합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러한 선택은 조선의 지역성이 보편성 못지 않게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인식의 전환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었다. 이것이 율관의 제정과 아악의 정비를 통해 유교적 이상국가를 구현하는 세종의 인식이었다.
      세종시대의 천문역산학 사업은 이와 같은 고제 연구 및 아악의 정비를 통한 유교적 이상 국가와 사회의 구현이라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안정적인 농업생산을 위한 실용적인 차원에서 추진되었던 것도 아니었고, 중국과 다른 자주적인 역법을 얻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천문의기 제작사업을 종결 지운 ‘옥루’에서 우리는 그러한 세종시대 천문역산학의 의미를 잘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천문역법의 정비를 통해서 유교적 정치이념에 따라 요순의 ‘하늘을 받드는 정치’를 본받아 국가를 경영하겠다는 실천적 의미였던 것이다.

      세종의 유교적 국가경영 : 예, 악을 중심으로 - 강숙자
      유교 국가는 유덕자 군주가 예적 질서를 확립한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 목표이다. 조선왕조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채택한 이상 유교 문화를 이식하려는 것은 당연하다. 중화사상 혹은 화이관념은 중국문화가 으뜸이며 변방문화는 저급하다는 중국문화 중심주의를 말한다. 문화의 구체적인 형식은 예와 악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조선왕조 창업을 이어받은 세종의 가장 큰 임무는 바로 예와 악을 제정하는(制禮作樂) 일이었다. 형정(刑政) 이전에 예악(禮樂)으로 백성을 교화하고자 하는 것이 유교의 덕치주의가 표방하는 바이기에 세종은 왕조례인 『오례』와 사·서인의 예인 주자가례』를 수용하고 예제 정비를 진행하였다. 예를 제도화 하는 과정에서 세종이 부닥쳤던 문제와 고민은 민족의식과 중국문화중심주의와의 충돌이었다. 그 구체적인 사례가『오례』의 「길례」에서이다. 천자만이 하늘에 제사지내고 제후는 경내 산천에 제사지낸다는 명분에 밀려서 원단의 제천례가 폐절된 상태에서, 세종은 조선은 중국 영토 안에 있는 제후국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제천례의 부활을 시도하였지만. 신료들의 반대에 부닥쳐서 결국 원단의 제천례는「길례」에서 빠졌다. 그러나 육진을 개척하여 영토를 확장한 이후에 두만강을 嶽·海·瀆 中祀에 편입시키고 제사지낸 것은 세종의 확고한 영토의식을 알 수 있다. 환경이 척박한 그 곳에 세금을 면제하는 등의 장려책을 써서 백성들을 이주시켜 정착하게 한 것은 오늘 독도문제 해결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악은 왕조창업의 정통성과 선왕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으로 몽금척, 수보록, 근천정 등이 제작되었으나 태조의 4대조 조상과 태조·태종 여섯 임금의 공덕을 찬양한 『용비어천가』의 제작은 세종의 업적 가운데 압권이라 할 것이다. 악 제작에서도 중국문화중심주의와 우리의 향악을 보존하고자 하는 민족의식의 충돌을 거쳐서 국가 제사를 제외한 회례악과 기타의 행사에 아악과 향악을 겸해서 쓴 것은 오로지 세종의 의지였음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 율관제작 실험, 아악 정비, 편경과 편종의 악기 제작, 신악 창제, 정간보 발명은 세종의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이 없었다면 이루어 낼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세종은 전재적소에 사람을 쓰는 행정의 달인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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