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청교체 이후 조선 지식인들은 조선을 중화문명의 유일한 계승자로 격상시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들을 경주하였다. 조선 지식인들의 노력은 종족ㆍ지리ㆍ문화적 측면에서 중화의 지위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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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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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133-175(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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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교체 이후 조선 지식인들은 조선을 중화문명의 유일한 계승자로 격상시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들을 경주하였다. 조선 지식인들의 노력은 종족ㆍ지리ㆍ문화적 측면에서 중화의 지위를 획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문화적 측면에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청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중화문화를 내면화하는 문제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된 것과 달리 청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커져만 갔다. 즉 청조의 치세가 안정 될수록 이념과 현실 사이에서 청을 사유하는 방식이 분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李鼎受(1783~1834)가 활동하였던 19세기 전반의 서울지역은 다양한 사유들이 충돌하던 시․공간이었다. 한편에서는 18세기 후반 청 문물의 수용을 주장하였던 북학파들의 영향력이 아직 남아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辛酉邪獄등을 통해 새로운 사상이 탄압당하고 외척 가문 중심의 권세가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획득하고 있었다.
이정수는 18세기 조선 지식인들의 다양한 견해를 수용해서 자신만의 독특한 대청관을 내놓았다. 그는 우선 조선의 역사와 문화적 전통을 강조하는 한편 고조선의 지리적 강역을 공유하고 있었던 청과 경계 짓기를 시도하였다. 이를 통해 청은 ‘이적’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여받았다. 이적으로서의 청의 지위는 오삼계론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이정수는 송시열과 김창업, 그리고 일부 북학파에 의해 이루어진 오삼계에 대한 긍정과 청에 대한 이해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하지만 세계질서에 대한 이정수의 이해는 전통적인 시각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이정수는 외국조빙조에서 중국 정사 외국전의 전통에 따라 중국과 해외제국들에 대한 조공․책봉 관계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정수는 서역에 대한 강한 반감을 드러내었다. 그는 서양의 학문을 금수의 가르침이라고 표현하며 西洋禽獸論을 전개한다. 즉 이정수의 대외인식은 전통적인 중화와 이적의 구도가 여전히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것이 세계의 영역으로 확장되면서 儒學과 西學, 혹은 反儒學의 새로운 기준으로 전환됨을 알 수 있다. 이는 이정수의 문화적 화이관이 19세기 전반의 정치․사회적 상황과 긴밀한 연관을 맺으며 확장된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After the Ming-Qing transition, Chosun’s intellects made efforts to elevate Chosun as the only successor of Chinese civilization. Their efforts were made in a way to acquire the status of being China in racial, geographical, and cultural aspects, an...
After the Ming-Qing transition, Chosun’s intellects made efforts to elevate Chosun as the only successor of Chinese civilization. Their efforts were made in a way to acquire the status of being China in racial, geographical, and cultural aspects, and among them, the utmost effort was made culturally. Meanwhile, they also discussed how to deem Qing continuously. Although the matter of internalizing Chinese culture proceeded rather smoothly, their awareness of Qing differed further. In other words, as the reign of Qing became stabilized, the way of deeming Qing between ideology and reality began to be divided.
In Seoul during the beginning of the 19th century when Lee Jeong-soo (李鼎受: 1783~1834) worked actively, a variety of ideas conflicted. Even though Bukhak School insisting the acceptance of Qing’s civilization in the late 18th century was still influential, new ideas were suppressed through Sinyusaok (辛酉邪獄) or such and the powerful centered around the families of maternal relatives were obtaining the political lead.
Lee Jeong-soo accepted diverse opinions from Chosun intellects in the 18th century and presented his own unique view to Qing. First of all, he emphasized Chosun’s history and cultural tradition, and then, he tried setting boundary from Qing which was sharing territory with Gochosun geographically. Through this, Qing was assigned with its identity as ‘ijeok’. Qing’s status as ijeok was once again verified by Osamgyeron. Lee Jeong-soo did severely criticize the affirmation of Osamgye practiced by Song Siyeol and Kim Changeop and some of the Bukhak School members and reconsideration on understanding of Qing.
However, Lee Jeong-soo’s understanding of world order was not very different from the traditional viewpoint. Lee Jeong-soo did stress the relations of jogong․installation towards China and foreign empires according to the tradition of political affairs to China in Oegukjobingjo. Also, Lee Jeong-soo revealed his severe hostility against the West. Insisting that Western sciences are the teachings of birds and beasts, he developed Seoyanggeumsuron (西洋禽獸論). In brief, Lee Jeong-soo’s awareness of foreign countries was still significantly grounded on the traditional structure of China and igeok, and when this is extended to the scope of the world, it is converted to the new criteria of Confucianism (儒學), Seohak (西學), and anti-Confucianism (反儒學). This can be understood as the result of Lee Jeong-soo’s cultural Hwaigwan closely associated with the political and social situations of the early 19th century and becoming extended.
목차 (Table of Contents)
참고문헌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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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문창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삼한 연구-연구 추이와 특징을 중심으로-" 한국고대사학회 (62) : 61-10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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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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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7 | 평가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 2021-01-01 | 등재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 |
| 2018-01-01 | 등재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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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1-01 | 등재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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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1-01 | 등재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 |
| 2004-01-01 | 등재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 ![]() |
| 2003-01-01 | 등재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 |
학술지 인용정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 2016 | 1.11 | 1.11 | 1.03 |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 1.03 | 1.05 | 2.153 | 0.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