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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平康 蔡氏의 臨陂 入居와 入居 이후의 거주지 이동 -혼인 관계 분석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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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G3707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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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본 연구에서는 臨陂에 세거한 平康 蔡氏의 임피 入居 경위와 入居 이후 거주지 이동 양상을, 이들의 혼인 관계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밝혔다. 임피에 세거한 평강 채씨는 조선시대 임피의 大姓 중 제주 고씨와 함께 가장 먼저 임피에 入居한 성씨였다. 또한 가장 많은 문과 급제자와 사마시 합격자를 배출하였고, 임피 입거 이후 중앙 및 全州와 沃溝의 유명 성씨들과 혼인 관계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상의 사실은 평강 채씨가 조선시대 임피의 대표적인 성씨라는 것을 시사하여 준다. 따라서 평강 채씨는 본고의 연구 목적에 부합하는 연구 대상으로서 적절한 성씨라고 판단한다.
      평강 채씨는 蔡陽生과 그의 再堂姪 蔡智生이 고려 말에 임피에 최초로 入居한 이후 후손들이 임피에 세거하면서 大姓을 이루었다. 이들이 임피에 入居한 직접적인 원인은 고려의 멸망 때문이었지만, 이동 지역으로 임피를 선택한 이유는 혼인 관계 때문이었다. 옥구에 세거한 제주 고씨와의 혼인 관계를 연유로 임피에 入居한 것이다. 곧, 蔡陽生의 子婦가 려산 송씨 宋詹의 딸인데, 宋詹은 당시 옥구에 세거한 제주 고씨 高灝의 妻와 내외종 사촌 사이였다. 蔡陽生이 임피에 입거할 때 再堂姪인 蔡智生을 대동한 이유도 蔡智生의 母가 高灝의 妻와 이종 사촌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평강 채씨의 임피 入鄕이 妻家나 外家보다 더 큰 외연의 인척관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다른 성씨의 그것에 비해 독특하다. 그러나 앞으로 이러한 사례는 더 많이 발견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전통기 한국 사회에서 인관 관계 형성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 것이 血緣이었고, 그 다음이 戚緣이었다. 전통기 한국인들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친 인척관계의 범위는 예상외로 넓었다. 그것은 고려 말부터(이전의 시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말까지, 어느 지역, 어느 신분을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 조선 왕조 개창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不事二君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임피에 入居하였고 심지어 두문동에 들어가기도 한 평강 채씨의 후손들은 임피 入居 이후 조선 정부로부터 어떠한 탄압도 받지 않았으며,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조선의 최고 사회 이념인 성리학의 도덕규범인 忠을 이들이 실천하였기 때문이었고, 조선에서는 그 어떤 권위보다 심지어 국왕의 권위보다 성리학이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이념의 나라였다.
      임피에 세거한 蔡陽生의 후손들과 蔡智生의 후손들이 他官으로 거주지를 이동한 양상에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蔡陽生의 후손 중에는 조선 전기에 他官으로 거주지를 이동한 자들이 많았고, 長子와 次子를 가리지 않고 거주지를 이동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他官으로 거주지를 이동한 양상이 거의 없었다. 蔡智生의 후손들이 조선 전기에 他官으로 거주지를 이동하는데 영향을 미친 요인은 혼인과 관직 진출이었다. 他官에 거주한 다른 성씨와 혼인을 하거나, 문무 관직에 진출한 경우에는 他官으로 거주지를 이동한 자가 많았다. 他官으로 거주지를 이동한 양상에 관직 진출보다 혼인이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에 조혼이 유행하였으므로 혼인을 하고나서 관직에 진출하였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 長子와 次子를 가리지 않고 他官으로 거주지를 이동하였는데, 그 이유는 자녀 균분 상속과 윤제가 보편적으로 행하여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蔡智生의 후손뿐만 아니라 蔡陽生의 후손에서도 과거 합격자나 관직 진출자가 대폭 줄어들었다. 자꾸만 영세해 갔다. 他官으로 거주지를 이동한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특히 長子가 타관으로 이주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조선후기에 장자 위주의 재산분배와 제사 관행이 평강 채씨 가문에서도 굳어졌기 때문이었다. 조선 후기가 되면 중앙에 근거지를 둔 벌족들이 문과 급제나 고위 관직을 집중적으로 점유해 나갔고, 지방에 거주한 성씨들은 대부분 지방에서만 세력을 유지한 향반으로 사회적 지위가 굳어져 갔다. 곧, 중앙과 지방의 사족들이 이분화되어 갔다. 임피에 세거한 평강 채씨도 예외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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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연구에서는 臨陂에 세거한 平康 蔡氏의 임피 入居 경위와 入居 이후 거주지 이동 양상을, 이들의 혼인 관계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밝혔다. 임피에 세거한 평강 채씨는 조선시대 임피의 ...

      본 연구에서는 臨陂에 세거한 平康 蔡氏의 임피 入居 경위와 入居 이후 거주지 이동 양상을, 이들의 혼인 관계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밝혔다. 임피에 세거한 평강 채씨는 조선시대 임피의 大姓 중 제주 고씨와 함께 가장 먼저 임피에 入居한 성씨였다. 또한 가장 많은 문과 급제자와 사마시 합격자를 배출하였고, 임피 입거 이후 중앙 및 全州와 沃溝의 유명 성씨들과 혼인 관계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상의 사실은 평강 채씨가 조선시대 임피의 대표적인 성씨라는 것을 시사하여 준다. 따라서 평강 채씨는 본고의 연구 목적에 부합하는 연구 대상으로서 적절한 성씨라고 판단한다.
      평강 채씨는 蔡陽生과 그의 再堂姪 蔡智生이 고려 말에 임피에 최초로 入居한 이후 후손들이 임피에 세거하면서 大姓을 이루었다. 이들이 임피에 入居한 직접적인 원인은 고려의 멸망 때문이었지만, 이동 지역으로 임피를 선택한 이유는 혼인 관계 때문이었다. 옥구에 세거한 제주 고씨와의 혼인 관계를 연유로 임피에 入居한 것이다. 곧, 蔡陽生의 子婦가 려산 송씨 宋詹의 딸인데, 宋詹은 당시 옥구에 세거한 제주 고씨 高灝의 妻와 내외종 사촌 사이였다. 蔡陽生이 임피에 입거할 때 再堂姪인 蔡智生을 대동한 이유도 蔡智生의 母가 高灝의 妻와 이종 사촌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평강 채씨의 임피 入鄕이 妻家나 外家보다 더 큰 외연의 인척관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다른 성씨의 그것에 비해 독특하다. 그러나 앞으로 이러한 사례는 더 많이 발견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전통기 한국 사회에서 인관 관계 형성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 것이 血緣이었고, 그 다음이 戚緣이었다. 전통기 한국인들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친 인척관계의 범위는 예상외로 넓었다. 그것은 고려 말부터(이전의 시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말까지, 어느 지역, 어느 신분을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 조선 왕조 개창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不事二君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임피에 入居하였고 심지어 두문동에 들어가기도 한 평강 채씨의 후손들은 임피 入居 이후 조선 정부로부터 어떠한 탄압도 받지 않았으며,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조선의 최고 사회 이념인 성리학의 도덕규범인 忠을 이들이 실천하였기 때문이었고, 조선에서는 그 어떤 권위보다 심지어 국왕의 권위보다 성리학이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이념의 나라였다.
      임피에 세거한 蔡陽生의 후손들과 蔡智生의 후손들이 他官으로 거주지를 이동한 양상에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蔡陽生의 후손 중에는 조선 전기에 他官으로 거주지를 이동한 자들이 많았고, 長子와 次子를 가리지 않고 거주지를 이동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他官으로 거주지를 이동한 양상이 거의 없었다. 蔡智生의 후손들이 조선 전기에 他官으로 거주지를 이동하는데 영향을 미친 요인은 혼인과 관직 진출이었다. 他官에 거주한 다른 성씨와 혼인을 하거나, 문무 관직에 진출한 경우에는 他官으로 거주지를 이동한 자가 많았다. 他官으로 거주지를 이동한 양상에 관직 진출보다 혼인이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에 조혼이 유행하였으므로 혼인을 하고나서 관직에 진출하였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 長子와 次子를 가리지 않고 他官으로 거주지를 이동하였는데, 그 이유는 자녀 균분 상속과 윤제가 보편적으로 행하여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蔡智生의 후손뿐만 아니라 蔡陽生의 후손에서도 과거 합격자나 관직 진출자가 대폭 줄어들었다. 자꾸만 영세해 갔다. 他官으로 거주지를 이동한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특히 長子가 타관으로 이주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조선후기에 장자 위주의 재산분배와 제사 관행이 평강 채씨 가문에서도 굳어졌기 때문이었다. 조선 후기가 되면 중앙에 근거지를 둔 벌족들이 문과 급제나 고위 관직을 집중적으로 점유해 나갔고, 지방에 거주한 성씨들은 대부분 지방에서만 세력을 유지한 향반으로 사회적 지위가 굳어져 갔다. 곧, 중앙과 지방의 사족들이 이분화되어 갔다. 임피에 세거한 평강 채씨도 예외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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