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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등재

      19世紀 朝鮮 寫意花卉畵의 樣相 = Aspects of Conceptual Flower Paintings of 19<SUP>th</SUP> Century Joseon Korea : Focused Peony and Lotus Flower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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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회화에서 寫意란, 사물의 외형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사물의 의미나 화가의 내면의 감정과 의취를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明代 吳派의 沈周가 개성을 드러내는 필묵과 담백한 담채의 사용, 자신의 흥을 풀어내었다고 표현한 제시를 통해 문인화의 기본사상인 詩書畵一致를 보여주어 사의화훼화의 기틀을 만들었다. 이러한 양상으로 미루어 보아 사의화훼화란, 문인들이 자신들의 자유로운 내면의 감성을 드러내면서 수묵이나 수묵담채를 통해 筆墨의 美를 구사하며 대상을 간결하게 그리고 여백의 효과를 드러내는 그림으로 정의할 수 있다.
      조선전기부터 화훼에 대한 문인들의 관심이 높았으나 18세기에 사회경제적으로 안정되며 문인들 사이에 화훼원예취미와 화훼애호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청과의 왕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명·청대에 간행된 화보가 많이 유입되면서 『十竹齋書畫譜』와 『芥子園畵傳』 3집이 사의 화훼화의 제작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세기 사의화훼화를 주로 그린 화가들은 南宗畵家였던 沈師正·姜世晃·崔北 등으로 화보의 영향 속 산뜻한 담채와 간결한 형태의 筆墨의 미를 드러내는 작품을 제작하였다.
      19세기에 이르면 화훼원예취미가 더욱 확산되고, 화훼에 대한 전문적인 서적 및 화훼시가 유행하였다. 또한 부를 갖게 된 중인계층들이 서화 감상 및 수장, 창작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며 문예의 중심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 시기 활발히 활동했던 화가들은 남종화풍의 그림을 그렸으며 사의를 드러내고자 했다. 이외에 金正喜 등이 사행 이후에도 청의 문사들과 지속적으로 교유하고 서화고동 취미로 인하여 揚州畵派의 화훼화 등 많은 중국의 서화가 유입되었다. 이러한 영향은 19세기 사의화훼화가 성행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 중 특히 모란과 연화는 조선 말기 혼란한 시대 속 부귀와 안정을 원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 다시 성행하게 되었다.
      19세기의 사의화훼화 중 모란도와 연화도를 주로 제작했던 화가는 중인화가였던 許鍊과 金秀哲 그리고 田琦 등으로, 이들은 18세기 사의화훼화의 기반 위에 청대 양주화파 등의 영향을 받아 조선의 사의화훼화를 발전시켰다. 19세기 사의화훼화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우선, 18세기 화훼화보다 화훼의 형태와 기법이 다양해졌다. 18세기 화가들은 주로 화첩에 절지형태의 간략한 형태로 표현하였는데 비해 19세기에는 하나의 소재를 하나의 화첩이나 병풍에 다양한 형태로 그렸다. 대표적인 화가로 허련은 주로 먹으로 다양한 모습의 화훼를 그리고 어울리는 제시를 배치하여 시서화일치를 보여주었다. 둘째, 다양한 색채가 사용되었으며, 단순하고 추상적 형태의 현대적인 화훼화가 등장하였다. 대표적인 화가는 김수철과 전기로, 먼저 김수철은 다양한 소재 중 연화를 많이 그렸으며 18세기의 감각적인 색채를 발전시켜 묵과 담채를 혼용하여 사용하는 등 변화를 주었다. 더불어 한쪽으로 치우친 구도에 매우 평면적이고 간략한 형태의 화훼를 통해 사의를 드러냈다. 이에 반해 전기는 18세기 사의화훼화처럼 절지형태의 간략한 모습으로 그렸으나 극대화된 농담의 대비와 자유로운 필치로 추상적 형태의 새로운 사의화훼화를 그렸다.
      마지막으로 화훼화에 길상적 의미의 소재를 추가한 점이다. 19세기에 들어면서 모란은 괴석과 함께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전통 채색화조화에서도 볼 수 있는 조합이지만 문인화로서는 18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19세기에는 혼란한 사회분위기 속 길상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회화가 인기가 높아 부귀의 상징이었던 모란과 장수의 상징이었던 괴석이 함께 등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연화의 경우에는 허련의 그림을 통해 연화가 어해와 함께 등장함을 살펴볼 수 있었다. 어해는 부부금실 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19세기에 유행하던 화목이었고 이러한 길상적 의미의 소재를 함께 그린 양상은 19세기 말기에 잡화병 등이 성행하는데 토대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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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화에서 寫意란, 사물의 외형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사물의 의미나 화가의 내면의 감정과 의취를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明代 吳派의 沈周가 개성을 드러내는 필묵과 담백한 담채의 사용...

      회화에서 寫意란, 사물의 외형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사물의 의미나 화가의 내면의 감정과 의취를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明代 吳派의 沈周가 개성을 드러내는 필묵과 담백한 담채의 사용, 자신의 흥을 풀어내었다고 표현한 제시를 통해 문인화의 기본사상인 詩書畵一致를 보여주어 사의화훼화의 기틀을 만들었다. 이러한 양상으로 미루어 보아 사의화훼화란, 문인들이 자신들의 자유로운 내면의 감성을 드러내면서 수묵이나 수묵담채를 통해 筆墨의 美를 구사하며 대상을 간결하게 그리고 여백의 효과를 드러내는 그림으로 정의할 수 있다.
      조선전기부터 화훼에 대한 문인들의 관심이 높았으나 18세기에 사회경제적으로 안정되며 문인들 사이에 화훼원예취미와 화훼애호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청과의 왕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명·청대에 간행된 화보가 많이 유입되면서 『十竹齋書畫譜』와 『芥子園畵傳』 3집이 사의 화훼화의 제작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세기 사의화훼화를 주로 그린 화가들은 南宗畵家였던 沈師正·姜世晃·崔北 등으로 화보의 영향 속 산뜻한 담채와 간결한 형태의 筆墨의 미를 드러내는 작품을 제작하였다.
      19세기에 이르면 화훼원예취미가 더욱 확산되고, 화훼에 대한 전문적인 서적 및 화훼시가 유행하였다. 또한 부를 갖게 된 중인계층들이 서화 감상 및 수장, 창작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며 문예의 중심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 시기 활발히 활동했던 화가들은 남종화풍의 그림을 그렸으며 사의를 드러내고자 했다. 이외에 金正喜 등이 사행 이후에도 청의 문사들과 지속적으로 교유하고 서화고동 취미로 인하여 揚州畵派의 화훼화 등 많은 중국의 서화가 유입되었다. 이러한 영향은 19세기 사의화훼화가 성행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 중 특히 모란과 연화는 조선 말기 혼란한 시대 속 부귀와 안정을 원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 다시 성행하게 되었다.
      19세기의 사의화훼화 중 모란도와 연화도를 주로 제작했던 화가는 중인화가였던 許鍊과 金秀哲 그리고 田琦 등으로, 이들은 18세기 사의화훼화의 기반 위에 청대 양주화파 등의 영향을 받아 조선의 사의화훼화를 발전시켰다. 19세기 사의화훼화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우선, 18세기 화훼화보다 화훼의 형태와 기법이 다양해졌다. 18세기 화가들은 주로 화첩에 절지형태의 간략한 형태로 표현하였는데 비해 19세기에는 하나의 소재를 하나의 화첩이나 병풍에 다양한 형태로 그렸다. 대표적인 화가로 허련은 주로 먹으로 다양한 모습의 화훼를 그리고 어울리는 제시를 배치하여 시서화일치를 보여주었다. 둘째, 다양한 색채가 사용되었으며, 단순하고 추상적 형태의 현대적인 화훼화가 등장하였다. 대표적인 화가는 김수철과 전기로, 먼저 김수철은 다양한 소재 중 연화를 많이 그렸으며 18세기의 감각적인 색채를 발전시켜 묵과 담채를 혼용하여 사용하는 등 변화를 주었다. 더불어 한쪽으로 치우친 구도에 매우 평면적이고 간략한 형태의 화훼를 통해 사의를 드러냈다. 이에 반해 전기는 18세기 사의화훼화처럼 절지형태의 간략한 모습으로 그렸으나 극대화된 농담의 대비와 자유로운 필치로 추상적 형태의 새로운 사의화훼화를 그렸다.
      마지막으로 화훼화에 길상적 의미의 소재를 추가한 점이다. 19세기에 들어면서 모란은 괴석과 함께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전통 채색화조화에서도 볼 수 있는 조합이지만 문인화로서는 18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19세기에는 혼란한 사회분위기 속 길상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회화가 인기가 높아 부귀의 상징이었던 모란과 장수의 상징이었던 괴석이 함께 등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연화의 경우에는 허련의 그림을 통해 연화가 어해와 함께 등장함을 살펴볼 수 있었다. 어해는 부부금실 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19세기에 유행하던 화목이었고 이러한 길상적 의미의 소재를 함께 그린 양상은 19세기 말기에 잡화병 등이 성행하는데 토대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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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Ⅰ. 머리말
      • Ⅱ. 18세기 청과 조선의 사의화훼화
      • Ⅲ. 19세기 조선 사의화훼화의 제작배경
      • Ⅳ. 19세기 조선 사의화훼화의 특징
      • Ⅴ. 맺음말
      • Ⅰ. 머리말
      • Ⅱ. 18세기 청과 조선의 사의화훼화
      • Ⅲ. 19세기 조선 사의화훼화의 제작배경
      • Ⅳ. 19세기 조선 사의화훼화의 특징
      • Ⅴ. 맺음말
      • 참고문헌
      • 국문초록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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