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사기>가 원칙적으로 기존의 원 사료를 충실히 옮기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으며, 특히 전쟁과 반란 관련 기록은 정부 측에서 작성된 공식 보고서류가 중심이 되었다는 데에서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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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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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사기>가 원칙적으로 기존의 원 사료를 충실히 옮기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으며, 특히 전쟁과 반란 관련 기록은 정부 측에서 작성된 공식 보고서류가 중심이 되었다는 데에서 출발했다. 조선열전도 한의 고조선을 침공해서 멸망시킨 이후 전공을 판단하기 위한 공식 보고서가 일차 자료였을 것으로 보고, 한의 고조선 침공 및 고조선 멸망을 한에서 어떻게 구성했는지를 살폈다. 한은 먼저 침공의 일차적 합리화를 외신의 의무 불이행에서 찾았다. 그렇지만 이 외신이란 본래 특정한 의무가 부과되는 외교적 개념은 아니었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한의 입장에 의해 자의적으로 요구되는 것일 뿐이다. 한의 고조선 침공의 직접적 정당성은 고조선의 ‘반란’에서 구했다. 한의 제후왕 반란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조선의 遼東都尉 공격을 ‘반란’으로 간주하고 본격적인 전쟁을 도발했다. 봉선제사기 치러진 이후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점, 전쟁에 동원된 자들이 구체적인 郡國에서 징집된 자들이라는 점, 그 대부분은 死罪를 저지른 죄인 출신이라는 점은 전쟁의 경과를 이해하는 주요한 사항들이다. 한편 고조선의 타협 시도, 대신들의 항복 의사, 누선장군과 좌장군의 알력 등 멸망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사기의 남월 및 동월에 대한 기록을 참조할 때 그 구체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고조선의 멸망과 관련해 제기된 원봉 4년설은 찬성하기 어려우며, 한대 봉후의 구체적 사례 및 다른 기록과의 정합성으로 보건대 원봉 3년으로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