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다산(茶山) 호출(呼出) 문제는 다산의 문제의식이나 글 속에서 다산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다산 이후의 시대에 다산이 어떻게 계승되고 수용되는가를 통해 다산을 이해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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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Korean
학술저널
25-48(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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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다산(茶山) 호출(呼出) 문제는 다산의 문제의식이나 글 속에서 다산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다산 이후의 시대에 다산이 어떻게 계승되고 수용되는가를 통해 다산을 이해하는 ...
19세기 후반 다산(茶山) 호출(呼出) 문제는 다산의 문제의식이나 글 속에서 다산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다산 이후의 시대에 다산이 어떻게 계승되고 수용되는가를 통해 다산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조선후기 지식세계의 변화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었으며, 이러한 지식세계의 변화 속에서 19세기 후반 다산 호출의 양상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았다. 조선후기 지식세계의 가장 큰 변화는 지식세계 자체의 확대현상이다. 이는 학문적 연원의 다양화, 지식 유통체제의 확립, 지식계층의 확대현상으로 정리된다. 서당의 확대와 초보적 교재의 대량간행으로 농민적 지식층이 대거 양산되었고, 그 결과 농민적 지식층과 사대부 지식층으로 지식층의 분화가 나타났다. 농민적 지식층은 훈장(訓長)이나 의업(醫業), 소장(訴狀) 대서업(代書業)과 복술(卜術) 등에 종사하면서 지식을 상품화하여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다산의 학문은 경학, 경세학, 의학, 교육학, 언어학, 문학 등 매우 다양하다. 다산은 19세기 후반 이미 당파를 초월하여 높이 평가받고 있었다. 다산의 학문이 높이 평가받은 것은 다산이 “육경사서(六經四書) 이지수기(以之修己) 일표이서(一表二書) 이지위천하국가(以之爲天下國家) 소이비본말야(所以備本末也)”라고 요약했듯이 경학(經學)과 경세(經世)를 함께 아우르면서 본말을 갖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19세기 후반 다산이 호출되는 부분은 실용의 세계, 즉 행정과 소송에 주로 참고되는 목민심서, 흠흠심서, 국방에 적용되는 민보의, 의학서, 아동교육서, 박물학 등과 같은 경세와 실용서들이었다. 19세기 후반 다산 호출은 실용성과 함께 지식상품화와도 관련하여 나타났지만, 정작 다산 본인은 지식상품화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조선후기 지식세계의 확대와 지식층의 분화과정에서 다산의 학문은 경세(經世)의 책임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미숙한 농민적 지식인들의 지식세계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못했던 것이다.
목차 (Table of Contents)
1930년대 조선학(朝鮮學) 운동과 ‘실학자(實學者) 정다산(丁茶山)’의 재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