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1970년대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의 구술 생애사 분석을 통해 여성의 ‘공부’ 경험이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1970...
이 연구는 1970년대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의 구술 생애사 분석을 통해 여성의 ‘공부’ 경험이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1970년대 한국 여성 고등교육의 사회적 의미가 무엇인지 밝히고자 했다. 이 연구의 구술자들은 여성에게도 열려있는 고등교육 기회와 대졸 여성에게는 닫혀있는 노동시장 구조를 경험했던 첫 세대이다. 이 여성들의 구술 생애사를 ‘공부’ 경험과 자기성취 실천을 중심으로 분석한 이 연구는 이를 통해 한국 여성 고등교육의 특질과 사회적 의미를 밝혔다.
1970년대 고등교육을 받았던 12명의 여성의 구술 생애사를 분석한 이 연구는 이 여성들의 어린 시절과 초․중등교육 경험, 대학 진학 과정과 대학 교육 경험, 대학 졸업 후 진로 선택과 현재까지의 삶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 과정에서 이 여성들이 경험했던 내용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했는가를 함께 분석했다.
이 연구는 여성들의 구술 생애사 분석 결과, 다음과 같은 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구술자들의 ‘공부’ 경험은 이 여성들이 주변의 여성과는 다른 삶을 꿈꾸게 했고, 자기성취 욕구를 갖도록 만들었다. 이들이 ‘공부’ 잘하는 딸로 성장했던 경험은 개인의 능력을 통해 인정을 받는 성취의 과정이었다. 대학에서 새로운 학문을 접하고 자발적, 능동적으로 ‘공부’했던 경험은 이 여성들이 세계와 자아를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새롭게 인식할 수 있게 했다. 구술자들은 공통적으로 가정 밖의 공간에서 ‘나의 일’을 하고자 했으며, 사회적인 존재로 도전과 발전을 거듭하면서 살기를 원했다. 당시의 지배적인 젠더규범은 이 여성들의 삶에서 결혼과 출산, 가족 내 여성 역할을 우선적인 것으로 규정했지만, 이들의 ‘공부’ 경험은 젠더규범의 규정력을 넘는, 다른 삶을 지향하게 했다.
두 번째, 그럼에도 여성의 고등교육과 결혼을 둘러싼 당시의 지배적인 젠더규범은 구술자들의 교육 경험과 진로 선택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작동했다. 그러나 이 젠더규범이 모든 구술자들에게 일률적이거나 일방향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이 젠더규범은 부모의 성차별적인 교육 지원과 대학 진학 시 여성에게 적합한 학교와 학과의 선택, 대학 졸업 후 진로 결정 과정 및 결혼 후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젠더규범의 작동 과정은 구술자 개개인의 삶의 맥락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학과 성적이나 가족의 경제 상황, 부모의 신념에 따라 구술자들이 받은 젠더규범의 영향력에는 차이가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구술자들은 지적인 ‘여대생’ 정체성을 구성하고 중산층 여성성을 수행함으로써 이 젠더규범을 스스로 내면화했다. 그럼에도 일부 구술자들은 이 젠더규범에 반하여 자율적인 선택을 했다. 이러한 자율적인 선택이 이후에는 일종의 삶의 전략과 자기성취 실천으로 이어졌다.
세 번째, 구술자들의 자기성취 욕구와 가족 내 돌봄역할은 이들의 삶에서 모순과 갈등을 일으켰다. ‘나의 일’을 중심에 두고 도전과 발전을 거듭하는 자기성취는 시간과 에너지를 나 자신에게 집중시켜야 하는 것에 반해, 돌봄역할은 타자의 욕구와 필요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구술자들은 이 상반된 삶의 원리들을 자신의 삶에서 실현시키고자 했기 때문에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갈등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모순과 갈등은 구술자들의 자기성취 욕구와 이를 억압하는 외적인 젠더규범의 대립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이는 구술자들의 ‘공부’ 경험을 통해 구성된 자기성취 욕구와 스스로 내면화한 젠더규범 간의 내적 모순이기도 했다.
네 번째, 구술자들은 자기성취와 돌봄역할 간 모순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삶의 전략을 선택하고 다양한 자기성취 실천을 보여준다. 이 여성들은 자기성취와 돌봄역할 중 한 쪽을 조절하거나 둘 사이를 오가는 전략과 시간을 생산적으로 조직하고 돌봄역할을 다른 여성에게 위탁하는 전략을 사용해왔다. 이 전략들은 지배적인 젠더규범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거나 자기성취 욕구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두 가지를 양립할 수 있는 현실적이고 안전한 선택이었다.
당시 여성에게 닫혀있는 노동시장과 젠더규범으로 인해 졸업 후 생애취업의 기회를 갖지 못한 구술자들은 사회참여와 자원활동, 계속 ‘공부’ 하기 등의 다양한 자기성취의 방식을 찾고 실천해왔다. 또한 여성에게 적합한 역할로 여겨지는 자녀 교육 지원 실천을 통해 성취의 경험을 하기도 했다. 특히, 일부 구술자들은 딸에 대한 열성적인 교육 지원 실천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딸 교육열’은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해석한 결과이다. 구술자들은 자신의 딸에게는 스스로의 삶에 적용되었던 젠더규범과는 전혀 다른 성역할과 삶의 방식을 적용하고자 했으며, 이는 딸이 전문직 여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원하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자기성취 실천들을 통해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는 구술자들의 경험은 자기성취가 반드시 경제활동과 제도적인 보상을 주는 일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1970년대 한국의 여성 고등교육은 구술자들에게 자기성취 욕구를 가지고 ‘나의 일’을 하면서 살아가도록 만들었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이 여성들이 그 욕구를 성공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여성들은 그 현실에 굴하지 않고 나름의 방법으로 자기성취 실천을 하면서 살아왔다.
이 연구는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의 ‘공부’ 경험과 삶의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고등교육의 사회적 의미를 경제활동 참여 중심으로 보았던 기존의 관점이 간과했던 부분을 조명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70년대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의 ‘공부’ 경험은 세계와 자아를 주체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당시의 젠더규범을 넘어서는 삶의 포부를 갖게 했다. 이들의 자기성취 욕구와 이를 위한 삶의 전략과 자기성취 실천들은 지배적인 젠더규범에 균열을 내는 행위성을 보여주었다. 이는 이 여성들의 고등교육 경험이 지배적인 젠더규범의 영향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 규범의 영향력을 넘어서는 삶의 포부와 가치를 지향하게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포부와 가치는 이 여성들의 자기성취 실천과 딸에 대한 교육 지원으로 이어졌다. 특히, 이 여성들의 ‘딸 교육열’은 자신들이 내면화한 젠더규범과는 전혀 다른 규범을 다음 세대 여성의 삶에 적용함으로써 여성 고등교육의 사회적 의미를 새롭게 구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