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에서는 삼국의 관료제 운영의 특징을 의관제 및 관등제, 신분제의 연결고리 속에서 살펴보았다. 문헌 기록과 고고학자료와의 비교 검토를 통해 삼국의 衣冠制에 대해 먼저 검토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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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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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삼국의 관료제 운영의 특징을 의관제 및 관등제, 신분제의 연결고리 속에서 살펴보았다. 문헌 기록과 고고학자료와의 비교 검토를 통해 삼국의 衣冠制에 대해 먼저 검토하고, 삼국이 관료제를 운영해가는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 관등승진 상한제와 함께 신분제의 폐쇄성 완화 조치에 주목하였다.
고구려의 의관제에 관한 기록은 가장 소략한 편이나, 冠制를 중심으로 기록된 것이 특징적이며, 관등의 높낮이에 따라 관의 형태나 관모의 색깔이 결정되었다. 5세기 이후 귀족세력의 관료화, 관등체계의 분화가 관제에 반영되었는데, 6∼7세기 고구려의 지배층을 착용하는 冠의 형태에 따라 분류해보면 절풍을 쓰는 부류인 국인과 서인, 절풍에 새 깃을 꽂은 하급 관인, 蘇骨을 쓰는 고위 관료집단으로 나뉜다. 고위 관료는 6세기 후반에는 紫羅冠을 착용했지만 7세기 단계에는 좀더 세분되어 靑羅冠과 緋羅冠을 착용하는 부류로 구분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色服志의 의관제 규정이 어느 시기에 해당되는 것이냐를 두고 논란이 있다. 법흥왕대에 관리들의 복색이 정해진 것은 분명하지만, 자·비·청·황의 제도인지는 알 수 없으며, 冠制는 법흥왕대부터 진덕왕대 사이의 어느 시점에 갖춰졌을 가능성이 있다. 衣制는 관등이라는 일원적인 기준이 적용된 반면, 冠制는 이찬에서 대아찬까지는 관등, 아찬 이하에 대해서는 관등과 관직의 이원적인 기준이 적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백제의 의관제 기사에는 관직명이 등장하지 않아 의관제가 철저하게 관등을 기준으로 규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의관제는 관등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1차적으로 관등 소지자를 복색에 차이를 두어 3단계로 구분을 하고, 대색과 관색, 관식의 규정을 통해 각 관등을 엄격히 구분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제6관등인 나솔 이상의 고위관료만이 착용할 수 있었던 은제관식의 출토는 백제의 관제의 발달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실물자료이다. 삼국의 의관제가 그 성립 시기나 양상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이지만, 관료 개개인의 서열을 외부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관료사회의 질서를 정립하는 것이 의관제가 고대사회에서 수행했던 중요한 기능의 하나였다.
관료제의 운영과 관련해서는 삼국이 관등제 및 신분제를 운영해나감에 있어서 보이는 유사한 양상에 초점을 두었다. 관직에 대한 관등 규정인 1관직 복수관등제는 복수의 관등 중 최상위의 관등이 신분별로 사여될 수 있는 관등의 상한과 일치하기 때문에 관등 승진 상한제와 맥락이 통한다. 각 신분별로 수여받을 수 있는 관등군 내에서 개인의 능력을 인정해주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으나, 같은 신분층이 수여받을 수 있는 관등의 범주에 한정된 것이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신분의 고착화에 기여한 측면도 있다.
삼국별로 관등제의 정비 시기에 차이가 있고, 정비의 과정도 동일하지는 않았겠지만, 관등의 수여에 있어 신분이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동일한 신분 내에서 수여받는 관등에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히 신분 이외에도 가문의 역량이나 개인적 능력이 영향을 미쳤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같은 신분층이 받을 수 있는 官等群 내에서 가문의 역량이나 개인의 능력이 발휘될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1관직 복수관등제나 관등 승진 상한제는 폐쇄적인 신분제 속에서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