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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등재

    고려 초기 전주 연구 = Understanding Jeonju in the Early Goryeo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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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Jeonju was the capital of the Later Baekje dynasty. After the surrender of Shingum in 936 following battles at Ilichen and elsewhere, Jeonju became an administrative district of Goryeo. From Goryeo's perspective, it is likely that Jeonju was not an easy place to deal with in the Later Baekje dynasty’s region, especially as the capital. It was a symbolic space for those who opposed Goryeo.
    Wang Geon recognized the Later Baekje dynasty’s people as homogeneous, he also had a negative perception of them. This can be seen in the establishment of the Annamahobu immediately after the annexation of the Later Baekje dynasty, keeping in mind the rebellious spirit of the local people. In February 983, Jeonju was established, and then changed to Jeonjusooneui-gunJeoldosa and Annamdohobu depending on changes in the situation at the time, but after becoming Jeonju in 1022, it remained almost unchanged until the end of Goryeo.
    Immediately after the fall of the Later Baekje dynasty, some Jeonju people migrated to Gaekyung. This was partly to reward those who had cooperated with Goryeo, such as Park Young-gyu, but there was also a reason to prevent the Later Baekje dynasty’s people from forming a power with Jeonju as its center. In the Great King of Gwangjong reign, after the implementation of the pastoral system, there were some who moved into centralized management, as seen in the case of Yu Bang-heon. This was because they were able to help the Great King of Gwangjong’s reform. However, due to changes in the local system and those who entered the central government office, Jeonju Lee and Jeonju Park family have emerged as new Hyangri classes(local clerks) in Jeon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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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onju was the capital of the Later Baekje dynasty. After the surrender of Shingum in 936 following battles at Ilichen and elsewhere, Jeonju became an administrative district of Goryeo. From Goryeo's perspective, it is likely that Jeonju was not an ea...

    Jeonju was the capital of the Later Baekje dynasty. After the surrender of Shingum in 936 following battles at Ilichen and elsewhere, Jeonju became an administrative district of Goryeo. From Goryeo's perspective, it is likely that Jeonju was not an easy place to deal with in the Later Baekje dynasty’s region, especially as the capital. It was a symbolic space for those who opposed Goryeo.
    Wang Geon recognized the Later Baekje dynasty’s people as homogeneous, he also had a negative perception of them. This can be seen in the establishment of the Annamahobu immediately after the annexation of the Later Baekje dynasty, keeping in mind the rebellious spirit of the local people. In February 983, Jeonju was established, and then changed to Jeonjusooneui-gunJeoldosa and Annamdohobu depending on changes in the situation at the time, but after becoming Jeonju in 1022, it remained almost unchanged until the end of Goryeo.
    Immediately after the fall of the Later Baekje dynasty, some Jeonju people migrated to Gaekyung. This was partly to reward those who had cooperated with Goryeo, such as Park Young-gyu, but there was also a reason to prevent the Later Baekje dynasty’s people from forming a power with Jeonju as its center. In the Great King of Gwangjong reign, after the implementation of the pastoral system, there were some who moved into centralized management, as seen in the case of Yu Bang-heon. This was because they were able to help the Great King of Gwangjong’s reform. However, due to changes in the local system and those who entered the central government office, Jeonju Lee and Jeonju Park family have emerged as new Hyangri classes(local clerks) in Jeon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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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전주는 후백제의 수도였다. 936년 신검이 항복한 이후, 전주는 고려의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었다. 고려의 입장에서 전주는 후백제 지역, 특히 수도였던 전주는 다루기 쉽지 않은 곳이었다. 이곳은 고려에 반발하는 이들에게 상징적인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후백제를 통합한 왕건은 후백제인들에 대한 동질성을 가진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인식도 지니고 있었다. 이는 후백제 병합 직후 지역민의 이반을 염두에 두고 안남도호부를 설치한 것에서 엿볼 수 있다. 983년 2월에 전주목이 설치되었다가 당시 정세의 변화에 따라 전주순의군절도사, 안남대도호부 등으로 바뀌기도 했으나, 1022년에 전주목으로 정착된 이후에는 고려말까지 거의 변화없이 유지되었다.
    후백제 멸망 직후 전주인들 가운데는 개경으로 이주한 이들이 존재했다. 여기에는 박영규와 같이 고려에 협조한 이들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이루어진 경우도 있으나, 전주를 구심점으로 후백제계인들이 세력을 형성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이유 또한 존재했다. 과거제가 실시된 광종대 이후 유방헌의 사례에서 보듯이 전주인이 중앙의 관리로 진출하는 사례가 발생하였는데, 이들이 광종의 개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앙관직에 진출한 이들과 지방제도의 변화로 인해 전주에서는 전주이씨나 전주박씨 등이 새로운 향리층으로 대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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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는 후백제의 수도였다. 936년 신검이 항복한 이후, 전주는 고려의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었다. 고려의 입장에서 전주는 후백제 지역, 특히 수도였던 전주는 다루기 쉽지 않은 곳이었다. 이...

    전주는 후백제의 수도였다. 936년 신검이 항복한 이후, 전주는 고려의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었다. 고려의 입장에서 전주는 후백제 지역, 특히 수도였던 전주는 다루기 쉽지 않은 곳이었다. 이곳은 고려에 반발하는 이들에게 상징적인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후백제를 통합한 왕건은 후백제인들에 대한 동질성을 가진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인식도 지니고 있었다. 이는 후백제 병합 직후 지역민의 이반을 염두에 두고 안남도호부를 설치한 것에서 엿볼 수 있다. 983년 2월에 전주목이 설치되었다가 당시 정세의 변화에 따라 전주순의군절도사, 안남대도호부 등으로 바뀌기도 했으나, 1022년에 전주목으로 정착된 이후에는 고려말까지 거의 변화없이 유지되었다.
    후백제 멸망 직후 전주인들 가운데는 개경으로 이주한 이들이 존재했다. 여기에는 박영규와 같이 고려에 협조한 이들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이루어진 경우도 있으나, 전주를 구심점으로 후백제계인들이 세력을 형성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이유 또한 존재했다. 과거제가 실시된 광종대 이후 유방헌의 사례에서 보듯이 전주인이 중앙의 관리로 진출하는 사례가 발생하였는데, 이들이 광종의 개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앙관직에 진출한 이들과 지방제도의 변화로 인해 전주에서는 전주이씨나 전주박씨 등이 새로운 향리층으로 대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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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金光洙, "羅末麗初의 豪族과 官班" 23 : 1979

    2 허인욱, "후백제 멸망과 그 유민" 56 : 2019

    3 차인국, "후백제 고고학의 현황과 과제" 4 : 2021

    4 재)전라문화유산연구원, "전주 풍패지관 문화재구역 발굴조사 약식보고서" 2023

    5 (재)전주문화유산연구원, "전라북도 기념물 제107호 전라감영지 발굴조사 보고서" 2018

    6 이익주, "왕의 초상" 국립전주박물관 2005

    7 김창현, "고려의 불교와 상도 개경" 신서원 2011

    8 박경자, "고려시대 향리 연구" 국학자료원 2001

    9 이동희, "고려시대 전주목의 설치와 그 위상" 전주역사박물관 11 : 2017

    10 하태규, "고려시대 全州 지역 貫鄕 姓氏와 그 동향" 25 : 2002

    1 金光洙, "羅末麗初의 豪族과 官班" 23 : 1979

    2 허인욱, "후백제 멸망과 그 유민" 56 : 2019

    3 차인국, "후백제 고고학의 현황과 과제" 4 : 2021

    4 재)전라문화유산연구원, "전주 풍패지관 문화재구역 발굴조사 약식보고서" 2023

    5 (재)전주문화유산연구원, "전라북도 기념물 제107호 전라감영지 발굴조사 보고서" 2018

    6 이익주, "왕의 초상" 국립전주박물관 2005

    7 김창현, "고려의 불교와 상도 개경" 신서원 2011

    8 박경자, "고려시대 향리 연구" 국학자료원 2001

    9 이동희, "고려시대 전주목의 설치와 그 위상" 전주역사박물관 11 : 2017

    10 하태규, "고려시대 全州 지역 貫鄕 姓氏와 그 동향" 25 : 2002

    11 박종진, "고려시기 지방제도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7

    12 김용선,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학교출판부 2021

    13 이재범, "고려 태조의 훈요 제8조에 대한 연구-‘차현이남 공주강외’지역에 관한 해석-" 26 : 2012

    14 김아네스, "고려 초기의 都護府와 都督府" 173 : 2002

    15 윤경진, "고려 지방제도 성립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3

    16 전경숙, "고려 성종대 거란의 침략과 군사제도 개편" 91 : 2014

    17 羅恪淳, "高麗鄕吏의 身分的 特性과 그 變化" 45 : 1992

    18 金光洙, "高麗時代의 同正職" 11・12 : 1969

    19 朴龍雲, "高麗時代 蔭敍制와 科擧制硏究" 一志社 1980

    20 邊太燮, "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

    21 "高麗史節要"

    22 "高麗史"

    23 禹太連, "高麗初 地名別號의 制定과 그 運用(下)" 12 : 1989

    24 李基白, "高麗兵制史硏究" 一潮閣 1968

    25 許興植, "高麗佛敎史硏究" 一潮閣 1997

    26 신호철, "高麗 太祖의 後百濟 遺民政策과 ‘訓要 제8조’" 30 : 2003

    27 이광섭, "高麗 光宗代 灌燭寺의 創建과 地方支配" 50 : 2014

    28 국립문화재연구소, "高原日美子 寄贈 고려범종" 2000

    29 李樹健, "韓國中世社會史硏究" 一潮閣 1984

    30 河炫綱, "韓國中世史硏究" 一潮閣 1988

    31 한국사연구회, "譯註 羅末麗初金石文" 혜안 1996

    32 "牧隱文藁"

    33 "氏族源流"

    34 "東文選"

    35 "東國李相國集"

    36 "東人之文五七"

    37 허인욱, "李安社의 全州 出去에 관한 연구" 21 : 2014

    38 朝鮮總督府, "朝鮮金石總覽" 1919

    39 國立慶州文化財冊究所, "月城垓子發掘調査報告書 Ⅱ" 2004

    40 "扶桑略記"

    41 張國剛, "唐代官制" 三秦出版社 1987

    42 全榮來, "全州, 東固山城槪括調査報告" 全州市立博物館 1980

    43 전북문화재연구원, "全州 東固山城-남성벽・동문지・집수시설발굴조사보고서" 2011

    44 "五洲衍文長箋散稿"

    45 "三國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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