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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잉글랜드 혁명기 잉글랜드와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의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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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1) 올드잉글랜드에 대한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의 인식
      이 장은 뉴잉글랜드로 이주한 청교도들이 자신들이 떠나온 땅인 잉글랜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주의 동기를 알기 위해서는 새 땅이 이주자들에게 줄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포기한 옛 땅에 대한 인식도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 장은 왜 이주자들이 올드잉글랜드에서 그들의 희망을 포기해야만 했는가 하는 질문에 집중할 것이다.

      (2) 뉴잉글랜드 이주에 대한 올드잉글랜드 청교도들의 인식
      1630년대 로드의 종교박해에 대한 청교도들의 반응은 2가지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는,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뉴잉글랜드로 떠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잉글랜드에 남아서 투쟁하는 것이었다. 후자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의 경우에 뉴잉글랜드 이주에 대한 생각은 복잡하다. 한편 그들은 이주자들이 그들의 집과 그들이 태어난 고향과 마을을 버리고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서 떠났기 때문에 용감하고 경건하다고 평가하였다. 심지어 이주자들은 신앙을 위해서 그들 가족의 생명과 전 재산까지도 잃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주자들은 진정한 신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반면에 이주자들은 도망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잉글랜드에 남아있던 대부분의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이주는 교황 무리들에 대한 공동전선을 깨뜨리는 것과도 같았다. 이러한 잉글랜드 청교도들의 복잡한 감정이 이 장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3) 영국 혁명에 대한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의 인식
      이 장은 뉴잉글랜드 정착민들과 청교도들이 잉글랜드 내전의 발발을 어떻게 수용했으며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해 다룰 것이다. 1642년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했을 때 많은 이주자들은 잉글랜드가 종교적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벌 아래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잉글랜드를 떠났을 때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교회와 새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느꼈다. 따라서 잉글랜드 내전은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의 분명한 증거였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올드잉글랜드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의 땅을 더 견고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잉글랜드의 내전은 옛 땅으로 돌아와 교황 무리들에 대항하여 싸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여겨졌다. 잉글랜드에 남아 있는 그들의 형제들과 함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종교 개혁을 완성하고 미신적이고 우상적인 것들을 잉글랜드 교회에서 일소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고 생각했다.

      (4) 잉글랜드 내전과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의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의 역할
      이 장은 1640년대 대서양 양편의 청교도들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뚜렷이 교류를 했는지 제시하고자 한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장기의회에 의해 소집되었으며 잉글랜드 교회의 주교 제도에 대한 대안을 만들도록 요청받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총회는 세명의 뉴잉글랜드 목사, 즉 토마스 후커, 존 코튼 그리고 존 데이븐포트를 초청하였다.
      코튼과 데이븐포트는 참석하고자 했으나 식민지 상황이 여의치 않아 불참했으며, 후커는 "3000 마일 여행을 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이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중시하지 않았으며, 이후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장은 이들의 활동을 분석할 것이다.
      또한 이 장은 메사추세츠만 식민지의 특사들의 활동도 다루고자 한다. 잉글랜드에서 내전이 발발하자 메사추세츠만 식민지는 두 명의 다른 목사, 토마스 웰드와 휴 피터 그리고 사업가 윌리암 히빈스를 런던으로 파송하였다. 그들은 1643년 런던에서 New England' First Fruits 라는 팸플릿을 발간하고 뉴잉글랜드를 위한 모금활동을 벌였으며 의회정치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뉴잉글랜드에 대한 많은 무역제한이 철폐된 것도 이들의 활동과 관련이 있다.
      또한 이 장은 존 위스롭, 헨리 베인과 같은 뉴잉글랜드 지도자들이 1640년대 잉글랜드 사건들에 미친 영향도 탐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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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올드잉글랜드에 대한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의 인식 이 장은 뉴잉글랜드로 이주한 청교도들이 자신들이 떠나온 땅인 잉글랜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주의 동...

      (1) 올드잉글랜드에 대한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의 인식
      이 장은 뉴잉글랜드로 이주한 청교도들이 자신들이 떠나온 땅인 잉글랜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주의 동기를 알기 위해서는 새 땅이 이주자들에게 줄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포기한 옛 땅에 대한 인식도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 장은 왜 이주자들이 올드잉글랜드에서 그들의 희망을 포기해야만 했는가 하는 질문에 집중할 것이다.

      (2) 뉴잉글랜드 이주에 대한 올드잉글랜드 청교도들의 인식
      1630년대 로드의 종교박해에 대한 청교도들의 반응은 2가지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는,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뉴잉글랜드로 떠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잉글랜드에 남아서 투쟁하는 것이었다. 후자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의 경우에 뉴잉글랜드 이주에 대한 생각은 복잡하다. 한편 그들은 이주자들이 그들의 집과 그들이 태어난 고향과 마을을 버리고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서 떠났기 때문에 용감하고 경건하다고 평가하였다. 심지어 이주자들은 신앙을 위해서 그들 가족의 생명과 전 재산까지도 잃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주자들은 진정한 신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반면에 이주자들은 도망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잉글랜드에 남아있던 대부분의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이주는 교황 무리들에 대한 공동전선을 깨뜨리는 것과도 같았다. 이러한 잉글랜드 청교도들의 복잡한 감정이 이 장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3) 영국 혁명에 대한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의 인식
      이 장은 뉴잉글랜드 정착민들과 청교도들이 잉글랜드 내전의 발발을 어떻게 수용했으며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해 다룰 것이다. 1642년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했을 때 많은 이주자들은 잉글랜드가 종교적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벌 아래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잉글랜드를 떠났을 때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교회와 새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느꼈다. 따라서 잉글랜드 내전은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의 분명한 증거였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올드잉글랜드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의 땅을 더 견고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잉글랜드의 내전은 옛 땅으로 돌아와 교황 무리들에 대항하여 싸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여겨졌다. 잉글랜드에 남아 있는 그들의 형제들과 함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종교 개혁을 완성하고 미신적이고 우상적인 것들을 잉글랜드 교회에서 일소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고 생각했다.

      (4) 잉글랜드 내전과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의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의 역할
      이 장은 1640년대 대서양 양편의 청교도들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뚜렷이 교류를 했는지 제시하고자 한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장기의회에 의해 소집되었으며 잉글랜드 교회의 주교 제도에 대한 대안을 만들도록 요청받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총회는 세명의 뉴잉글랜드 목사, 즉 토마스 후커, 존 코튼 그리고 존 데이븐포트를 초청하였다.
      코튼과 데이븐포트는 참석하고자 했으나 식민지 상황이 여의치 않아 불참했으며, 후커는 "3000 마일 여행을 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이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중시하지 않았으며, 이후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장은 이들의 활동을 분석할 것이다.
      또한 이 장은 메사추세츠만 식민지의 특사들의 활동도 다루고자 한다. 잉글랜드에서 내전이 발발하자 메사추세츠만 식민지는 두 명의 다른 목사, 토마스 웰드와 휴 피터 그리고 사업가 윌리암 히빈스를 런던으로 파송하였다. 그들은 1643년 런던에서 New England' First Fruits 라는 팸플릿을 발간하고 뉴잉글랜드를 위한 모금활동을 벌였으며 의회정치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뉴잉글랜드에 대한 많은 무역제한이 철폐된 것도 이들의 활동과 관련이 있다.
      또한 이 장은 존 위스롭, 헨리 베인과 같은 뉴잉글랜드 지도자들이 1640년대 잉글랜드 사건들에 미친 영향도 탐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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