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KCI등재

      朝鮮前期 白丁에 대한 齊民化 政策의 成果 = The Results of the Policy for the Civilianization of Baekjeong's in the Early Chosun Dynasty

      한글로보기

      https://www.riss.kr/link?id=A100436988

      • 0

        상세조회
      • 0

        다운로드
      서지정보 열기
      • 내보내기
      • 내책장담기
      • 공유하기
      • 오류접수

      부가정보

      국문 초록 (Abstract)

      본 연구는 이전의 연구에서 활용하지 않았던 자료와 방법을 활용함으로써 백정에 대한 제민화 정책이 매우 성공적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세조대의 3대가 경고하도록 방금을 어기지 않은 백정을 일반 민호로 편제하도록 한 조처로 백정의 제민화가 법제적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16세기 이후 호적에 기재된 ‘皮匠’, ‘柳器匠’ 등은 제민화한 일부 백정 후손들의 직역이었다. 성종대 ‘실록’에 기재된 육아일마다 행하는 백정에 대한 점고는 16세기 중반 성주지방에서는 백정아일로 시행되고 있었다.
      제민화 정책을 시행하는 초기에는 백정에 대한 편호를 강화함으로써 인구와 범죄율이 크게 높아졌다. 그러나 세조대에 시행한 제민으로 편제된 자를 일반 백성과 같은 양식으로 호적에 기재하게 함으로써 16세기 이후 백정의 범죄활동과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게 되었다. 조선전기에 시행된 강력한 제민화 정책의 시행으로 대다수의 백정들은 농업중심의 생산경제 체제에 편입되면서 법제적으로 국가의 제민으로 파악되었으며, 유교적 윤리의식의 내면화라는 측면에서 모범이 되는 사례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생활습속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백정의 후손에 대한 차별은 사회적 관행으로 상존하였다.
      번역하기

      본 연구는 이전의 연구에서 활용하지 않았던 자료와 방법을 활용함으로써 백정에 대한 제민화 정책이 매우 성공적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세조대의 3대가 경고하도록 방금을 ...

      본 연구는 이전의 연구에서 활용하지 않았던 자료와 방법을 활용함으로써 백정에 대한 제민화 정책이 매우 성공적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세조대의 3대가 경고하도록 방금을 어기지 않은 백정을 일반 민호로 편제하도록 한 조처로 백정의 제민화가 법제적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16세기 이후 호적에 기재된 ‘皮匠’, ‘柳器匠’ 등은 제민화한 일부 백정 후손들의 직역이었다. 성종대 ‘실록’에 기재된 육아일마다 행하는 백정에 대한 점고는 16세기 중반 성주지방에서는 백정아일로 시행되고 있었다.
      제민화 정책을 시행하는 초기에는 백정에 대한 편호를 강화함으로써 인구와 범죄율이 크게 높아졌다. 그러나 세조대에 시행한 제민으로 편제된 자를 일반 백성과 같은 양식으로 호적에 기재하게 함으로써 16세기 이후 백정의 범죄활동과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게 되었다. 조선전기에 시행된 강력한 제민화 정책의 시행으로 대다수의 백정들은 농업중심의 생산경제 체제에 편입되면서 법제적으로 국가의 제민으로 파악되었으며, 유교적 윤리의식의 내면화라는 측면에서 모범이 되는 사례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생활습속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백정의 후손에 대한 차별은 사회적 관행으로 상존하였다.

      더보기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Using materials and methods that had not been utilized in previous research, this study reached the new interpretation that the policy for the civilianization of baekjeongs was very successful.
      That is, the civilization of baekjeongs was completed legislatively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 by allowing baekjeongs who had never violated prohibitions through three generations to be civilianized. Pijang(Tanners), Yugijang (wicker trunk maker), etc. recorded in the census register since the 16<SUP>th</SUP> century were terms referring to a civilianized baekjeong. The roll call of baekjeongs was made on every court day recorded in ‘Silrok’ during King Seongjong"s reign, but in the Seongju area during the mid 16<SUP>th</SUP> century it was made on the baekjeong court day.
      During the early period of the civilianization policy, regulation on baekjeongs" households was tightened and this increased the population and the criminal rate of baekjeongs. However, those who were civilianized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 were enrolled in the register using the same form as that for ordinary people and, as a result, the criminal activities and population of baekjeongs decreased sharply since the 16th century.
      With the powerful promotion of the civilianization policy during the early Chosun Dynasty, most of baekjeongs were incorporated into the production economic system centering on agriculture, and were regarded legislatively as civilians. Even there were exemplary cases in the aspect of the internalization of Confucian ethics. Nevertheless, it was a continuous social practice to discriminate against the descendents of baekjeongs who could not abandon their ancestors" customs.
      번역하기

      Using materials and methods that had not been utilized in previous research, this study reached the new interpretation that the policy for the civilianization of baekjeongs was very successful. That is, the civilization of baekjeongs was completed le...

      Using materials and methods that had not been utilized in previous research, this study reached the new interpretation that the policy for the civilianization of baekjeongs was very successful.
      That is, the civilization of baekjeongs was completed legislatively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 by allowing baekjeongs who had never violated prohibitions through three generations to be civilianized. Pijang(Tanners), Yugijang (wicker trunk maker), etc. recorded in the census register since the 16<SUP>th</SUP> century were terms referring to a civilianized baekjeong. The roll call of baekjeongs was made on every court day recorded in ‘Silrok’ during King Seongjong"s reign, but in the Seongju area during the mid 16<SUP>th</SUP> century it was made on the baekjeong court day.
      During the early period of the civilianization policy, regulation on baekjeongs" households was tightened and this increased the population and the criminal rate of baekjeongs. However, those who were civilianized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 were enrolled in the register using the same form as that for ordinary people and, as a result, the criminal activities and population of baekjeongs decreased sharply since the 16th century.
      With the powerful promotion of the civilianization policy during the early Chosun Dynasty, most of baekjeongs were incorporated into the production economic system centering on agriculture, and were regarded legislatively as civilians. Even there were exemplary cases in the aspect of the internalization of Confucian ethics. Nevertheless, it was a continuous social practice to discriminate against the descendents of baekjeongs who could not abandon their ancestors" customs.

      더보기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요약]
      • 1. 머리말
      • 2. 齊民化 政策의 必要性과 施行 推移
      • 2. 白丁의 犯罪活動과 人口變動 推移
      • 3. 白丁의 處地와 認識의 變化
      • [국문요약]
      • 1. 머리말
      • 2. 齊民化 政策의 必要性과 施行 推移
      • 2. 白丁의 犯罪活動과 人口變動 推移
      • 3. 白丁의 處地와 認識의 變化
      • 5. 맺음말
      • 참고문헌
      더보기

      참고문헌 (Reference)

      1 矢澤康祐, "林巨正의 反亂과 그 社會的 背景 in: 전통시대의 민중운동 상" 풀빛 1981

      2 "龍城誌"

      3 이준구, "조선중기 編戶白丁의 존재와 그 성격 in: 한국중세사논총" 2000

      4 이준구, "조선전기 白丁의 赴防과 軍役與否에 관한 검토" 仁荷歷史學會 10 : 2003

      5 이준구, "조선전기 白丁의 習俗과 사회경제적 처지 in: 조선의 정치와 사회" 집문당 2002

      6 정태헌, "조선전기 弭盜之策의 연구-行刑과 論賞策을 중심으로" 고려대사학회 30 : 1986

      7 정태헌, "조선전기 弭盜之策의 연구:도적 성행의 원인과 그 예방대책을 중심으로 in: 최영희선생화갑기념한국사학논총" 22-, 1987

      8 한희숙, "조선 태종․세종대 백정의 생활상과 도적활동" 고려사학회 6 : 1999

      9 이정수, "조선 초기 도적의 발생과 국가적 대응" 한국중세사연구회 1 : 1994

      10 한희숙, "조선 중종대 도적활동과 그 특징-16세기 민의 동향에 대한 일연구-" 역사학회 57 : 1998

      1 矢澤康祐, "林巨正의 反亂과 그 社會的 背景 in: 전통시대의 민중운동 상" 풀빛 1981

      2 "龍城誌"

      3 이준구, "조선중기 編戶白丁의 존재와 그 성격 in: 한국중세사논총" 2000

      4 이준구, "조선전기 白丁의 赴防과 軍役與否에 관한 검토" 仁荷歷史學會 10 : 2003

      5 이준구, "조선전기 白丁의 習俗과 사회경제적 처지 in: 조선의 정치와 사회" 집문당 2002

      6 정태헌, "조선전기 弭盜之策의 연구-行刑과 論賞策을 중심으로" 고려대사학회 30 : 1986

      7 정태헌, "조선전기 弭盜之策의 연구:도적 성행의 원인과 그 예방대책을 중심으로 in: 최영희선생화갑기념한국사학논총" 22-, 1987

      8 한희숙, "조선 태종․세종대 백정의 생활상과 도적활동" 고려사학회 6 : 1999

      9 이정수, "조선 초기 도적의 발생과 국가적 대응" 한국중세사연구회 1 : 1994

      10 한희숙, "조선 중종대 도적활동과 그 특징-16세기 민의 동향에 대한 일연구-" 역사학회 57 : 1998

      11 박종성, "조선 백정의 사회적 불만과 정치화" 서원대사회과학연구소 16 : 2003

      12 한희숙, "조선 명종대 군도의 발생배경과 활동의 특징" 조선시대사학회 10 : 1999

      13 한희숙, "연산군대 도적활동의 사회적 조명" 숙명여대한국학연구센터 6 : 1996

      14 에릭 홉스봄, "밴디트" 민음사 2004

      15 "독립신문"

      16 "黙齋日記"

      17 강만길, "鮮初白丁考" 한국사학회 18 : 1964

      18 문철영, "高麗末․朝鮮初 白丁의 身分과 差役" 서울대국사학과 26 : 1991

      19 "高麗史節要"

      20 "高麗史"

      21 "高宗時代史"

      22 "院日記"

      23 "輿地圖書"

      24 "象村稿"

      25 "葛川集"

      26 "經國大典"

      27 "筆苑雜記"

      28 "秋江集"

      29 "硏經齋集"

      30 "梅月堂詩集"

      31 "栢巖集"

      32 "松窩雜說"

      33 "松堂集"

      34 "東文選"

      35 "東史綱目"

      36 "朝鮮王朝實錄"

      37 이준구, "朝鮮後期 慶尙道 丹城地域 白丁의 存在樣相-丹城帳籍을 중심으로-" 조선사연구회 7 : 1998

      38 이준구, "朝鮮前期 白丁의 犯罪相과 齊民化 施策" 大邱史學會 56 : 1998

      39 鮎貝房之進, "揚水尺條 水尺條 禾尺條" 5 : 1932

      40 "承政"

      41 "大韓季年史"

      42 "增補文獻備考"

      43 "國朝寶鑑"

      44 "三峰集"

      45 한희숙, "16세기 임꺽정 난의 성격" 한국사연구회 89 : 1995

      46 이정수, "16세기 도적 발생과 그 사회․경제적의미" 한국사연구회 92 : 1996

      47 한희숙, "15세기 도적활동의 사회적 조명" 한국역사연구회 5 : 1992

      48 오영철, "15세기 白丁의 사회적 처지" 1993

      49 이영훈, "1528년 安東府 府北 周村 戶籍斷片" 한국고문서학회 8 : 1996

      더보기

      동일학술지(권/호) 다른 논문

      동일학술지 더보기

      더보기

      분석정보

      View

      상세정보조회

      0

      Usage

      원문다운로드

      0

      대출신청

      0

      복사신청

      0

      EDDS신청

      0

      동일 주제 내 활용도 TOP

      더보기

      주제

      연도별 연구동향

      연도별 활용동향

      연관논문

      연구자 네트워크맵

      공동연구자 (7)

      유사연구자 (20) 활용도상위20명

      인용정보 인용지수 설명보기

      학술지 이력

      학술지 이력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6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9-12-31 학술지명변경 외국어명 : The Journal of Korean Historical-forklife -> The Journal of Korean Historical-folklife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4-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2-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더보기

      학술지 인용정보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63 0.63 0.65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68 0.66 1.486 0.06
      더보기

      이 자료와 함께 이용한 RISS 자료

      나만을 위한 추천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