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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9년 안중근의 이토 사살 사건에 대한 국내 주요 언론의 보도와 지식인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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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1909년 10월 26일 淸 하얼빈에서 일어난 안중근의 이토 사살 사건을 다룬 국내 언론의 보도 태도는 처음에는 소극적이었다. 《皇城新聞》은 오히려 안중근을 두고 行凶者라고 하는 등 일제 권력에 압도당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안중근이 설파한 “동양평화”와 “한국독립”을 근거로 들어 일진회 등의 합방 또는 병합에 관한 논의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大韓每日申報》는 하얼빈의 총성을 직접 거론하면서 이완용을 박쥐로 취급하여 안중근의 의거를 본받을 것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국내 언론의 보도는 국내 일반에도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鄭喬는 『大韓季年史』를 통하여 이들 보도를 적극적으로 인용하여 안중근의 이토 사살 사건을 후세에 남기고자 하였다. 黃玹 또한 『梅泉野錄』을 통하여 민간에서 이 사건을 쾌거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밝혔다. 이와 같이 안중근의 이토 사살 사건은 국내 언론의 보도를 통하여 병합 직전 한국 사회에 “한국독립”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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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9년 10월 26일 淸 하얼빈에서 일어난 안중근의 이토 사살 사건을 다룬 국내 언론의 보도 태도는 처음에는 소극적이었다. 《皇城新聞》은 오히려 안중근을 두고 行凶者라고 하는 등 일제 권...

      1909년 10월 26일 淸 하얼빈에서 일어난 안중근의 이토 사살 사건을 다룬 국내 언론의 보도 태도는 처음에는 소극적이었다. 《皇城新聞》은 오히려 안중근을 두고 行凶者라고 하는 등 일제 권력에 압도당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안중근이 설파한 “동양평화”와 “한국독립”을 근거로 들어 일진회 등의 합방 또는 병합에 관한 논의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大韓每日申報》는 하얼빈의 총성을 직접 거론하면서 이완용을 박쥐로 취급하여 안중근의 의거를 본받을 것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국내 언론의 보도는 국내 일반에도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鄭喬는 『大韓季年史』를 통하여 이들 보도를 적극적으로 인용하여 안중근의 이토 사살 사건을 후세에 남기고자 하였다. 黃玹 또한 『梅泉野錄』을 통하여 민간에서 이 사건을 쾌거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밝혔다. 이와 같이 안중근의 이토 사살 사건은 국내 언론의 보도를 통하여 병합 직전 한국 사회에 “한국독립”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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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The domestic media"s attitude toward the shooting of Ito by An Jung-Geun in Harbin on October 26, 1909 was initially passive. Huangseong-Shinmun was overwhelmed by the Japanese colonial power, with An Jung-Geun as his predecessor. Behind the scenes, however, An criticized the discussion on the merger or merger of Il-Jin-Hoe and others on the basis of “Oriental Peace” and “Korean Independency” preached by An Jung-Geun. Daehan-Maeil-Shinbo even directly mentioned Harbin"s shooting, calling for Lee Wan-yong to be treated as a bat to follow An"s footsteps.
      Such local media coverage has had a far-reaching impact on the nation"s general public as well. In particular, Cheng Kyo actively quoted these reports as saying that An Jung-Geun"s killing of Ito was intended to remain in the future. Hwang Hyun also said in a parliamentary session that the private sector was taking the case as a pleasant one. As such, An Jung-Geun"s shooting of Ito was an opportunity to reflect on the meaning of “Korean Independency” in Korean society just before the annexation through local media repo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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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domestic media"s attitude toward the shooting of Ito by An Jung-Geun in Harbin on October 26, 1909 was initially passive. Huangseong-Shinmun was overwhelmed by the Japanese colonial power, with An Jung-Geun as his predecessor. Behind the scenes, h...

      The domestic media"s attitude toward the shooting of Ito by An Jung-Geun in Harbin on October 26, 1909 was initially passive. Huangseong-Shinmun was overwhelmed by the Japanese colonial power, with An Jung-Geun as his predecessor. Behind the scenes, however, An criticized the discussion on the merger or merger of Il-Jin-Hoe and others on the basis of “Oriental Peace” and “Korean Independency” preached by An Jung-Geun. Daehan-Maeil-Shinbo even directly mentioned Harbin"s shooting, calling for Lee Wan-yong to be treated as a bat to follow An"s footsteps.
      Such local media coverage has had a far-reaching impact on the nation"s general public as well. In particular, Cheng Kyo actively quoted these reports as saying that An Jung-Geun"s killing of Ito was intended to remain in the future. Hwang Hyun also said in a parliamentary session that the private sector was taking the case as a pleasant one. As such, An Jung-Geun"s shooting of Ito was an opportunity to reflect on the meaning of “Korean Independency” in Korean society just before the annexation through local media repo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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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 초록
      • Ⅰ. 머리말
      • Ⅱ. 이토 사살 사건에 대한 국내 주요 언론의 보도
      • Ⅲ. 국내 주요 언론의 보도 내용에 지식인의 반응
      • Ⅳ. 맺음말
      • 국문 초록
      • Ⅰ. 머리말
      • Ⅱ. 이토 사살 사건에 대한 국내 주요 언론의 보도
      • Ⅲ. 국내 주요 언론의 보도 내용에 지식인의 반응
      • Ⅳ.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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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김순덕, "한말義兵 關係文獻 解題集" 民音社 1993

      2 朴殷植, "한국인 집필 안중근전기 Ⅰ" 채륜 2014

      3 金澤榮, "한국인 집필 안중근 전기 Ⅰ" 채륜 2014

      4 金敬泰, "저널리즘論攷-牛凡 李海暢敎授 回甲紀念論文集-" 이화여자대학교 신문방송학 1976

      5 신주백, "일제강점기 ‘이등박문 저격사건’을 둘러싼 안중근에 관한 국내외 조선인사회의 기억" 한국민족운동사학회 (57) : 53-84, 2008

      6 이태진,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와 동양평화론-" 지식산업사 2010

      7 신운용, "안중근의거의 국제 정치적 배경에 관한 연구" 역사문화연구소 (33) : 115-154, 2009

      8 현광호, "안중근의 한중일 인식 - 동양평화론의 배경 -" 한국학연구소 33 : 371-396, 2010

      9 한상권, "안중근의 하얼빈거사와 공판투쟁(1)- 검찰관과의 논쟁을 중심으로 -" 한국역사연구회 (54) : 287-320, 2004

      10 한상권, "안중근의 하얼빈 거사와 공판투쟁(2)" 33 : 2004

      1 김순덕, "한말義兵 關係文獻 解題集" 民音社 1993

      2 朴殷植, "한국인 집필 안중근전기 Ⅰ" 채륜 2014

      3 金澤榮, "한국인 집필 안중근 전기 Ⅰ" 채륜 2014

      4 金敬泰, "저널리즘論攷-牛凡 李海暢敎授 回甲紀念論文集-" 이화여자대학교 신문방송학 1976

      5 신주백, "일제강점기 ‘이등박문 저격사건’을 둘러싼 안중근에 관한 국내외 조선인사회의 기억" 한국민족운동사학회 (57) : 53-84, 2008

      6 이태진,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와 동양평화론-" 지식산업사 2010

      7 신운용, "안중근의거의 국제 정치적 배경에 관한 연구" 역사문화연구소 (33) : 115-154, 2009

      8 현광호, "안중근의 한중일 인식 - 동양평화론의 배경 -" 한국학연구소 33 : 371-396, 2010

      9 한상권, "안중근의 하얼빈거사와 공판투쟁(1)- 검찰관과의 논쟁을 중심으로 -" 한국역사연구회 (54) : 287-320, 2004

      10 한상권, "안중근의 하얼빈 거사와 공판투쟁(2)" 33 : 2004

      11 도진순, "안중근의 전쟁과 평화, 죽임과 죽음" 한국역사연구회 (75) : 247-277, 2010

      12 서정훈,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에 대한 국제법 및 교회법적 접근" (재)천주교수원교구 수원교회사연구소 (12) : 247-296, 2015

      13 홍웅호, "안중근의 이토 사살 사건과 러일 관계" 한국사학회 (100) : 671-705, 2010

      14 김흥수, "안중근의 생애와 동양평화론" 空軍士官學校 46 : 2000

      15 현광호,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의 연구 현황과 연구 과제" 한국민족운동사학회 (75) : 93-132, 2013

      16 김주용, "안중근의 국권회복운동-伊藤博文 射殺을 중심으로" 9 : 2002

      17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안중근과 동양평화론-안중근의거 100주년기념 연구논문집 4-" 채륜 2010

      18 오영섭, "안중근-한국 독립과 동양평화의 사도" 역사공간 2020

      19 朴殷植, "안중근 전기" 국학자료원 2011

      20 신운용, "안중근 의거의 사상적 배경" 한국사상사학회 25 : 315-366, 2005

      21 신운용, "안중근 의거에 대한 국내의 인식과 반응" 한국근현대사학회 (33) : 7-49, 2005

      22 임수경, "안중근 연구의 성과와 과제-안중근의거100주년기념 연구논문집 3-" 채륜 2010

      23 윤병석, "안중근 연구-하얼빈의거 100주년의 성찰-" 국학자료원 2011

      24 崔起榮, "민족사와 교회사-최석우 신부수품 50주년 기념 논총 1"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25 최종길, "동양평화론과 조선인의 인식 — 안중근의 국제정세 인식을 중심으로 —" 수선사학회 (55) : 109-138, 2016

      26 김경일,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본 안중근과 동양평화론 : 열린 민족주의와 보편주의로의 지평" 한국학중앙연구원 32 (32): 193-219, 2009

      27 김윤희, "대한제국 언론매체의 정치기획과 안중근" 아시아문화연구소 32 : 69-97, 2013

      28 최덕규, "고종황제와 안중근의 하얼빈의거(1904~1910)" 한국민족운동사학회 (73) : 95-142, 2012

      29 "騎驢隨筆" 國史編纂委員會 1955

      30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7"

      31 金鎬逸, "舊韓末 安重根의 ‘東洋平和論’ 硏究" 10·11 : 1998

      32 "續陰晴史" 國史編纂委員會 1960

      33 "皇城新聞"

      34 "梅泉野錄" 國史編纂委員會 1955

      35 박민영, "柳麟錫의 의병통합 노력과 安重根의 하얼빈의거" 7 : 2009

      36 張錫興, "安重根의 대일본 인식과 하얼빈 의거" 16 : 2001

      37 崔奭祐, "安重根의 義擧와 敎會의 反應" 9 : 1994

      38 愼鏞廈, "安重根의 思想과 國權恢復運動"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사학연구실 2 : 1980

      39 신운용, "安重根의 ‘東洋平和論’과 伊藤博文의 ‘極東平和論’" 역사문화연구소 (23) : 131-178, 2005

      40 金昌洙, "安重根義擧의 歷史的 意義" 한국민족운동사학회 30 : 7-20, 2002

      41 趙珖, "安重根 연구의 현황과 과제" 12 : 2000

      42 尹慶老, "安重根 思想硏究; 義兵論과 東洋平和論을 中心으로" 한성대학 민족문화연구소 3 : 1985

      43 坂田吉雄, "孝明天皇毒殺説に関して" 14 (14): 1980

      44 "大韓每日申報"

      45 "大韓季年史" 國史編纂委員會 1957

      46 윤효정, "‘하얼빈 사건’에 대한 대한매일신보의 여론 형성 연구" 고려사학회 (42) : 225-246,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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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6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8-12-06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호서사학 -> 역사와 담론
      외국어명 : HO-SUH SAHAK -> HISTORY AND DISCOURSE(Journal of Historycal Review)
      KCI등재
      200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6-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5-09-29 학술지등록 한글명 : 호서사학
      외국어명 : HO-SUH SAHAK
      KCI등재후보
      2004-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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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56 0.56 0.48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46 0.46 0.953 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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