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대 정치·외교사의 정밀한 복원을 위해서는 집권 세력의 핵심 인물이었던 이이첨에 대한 집중적 고찰이 필요하다. 본 논문은 이러한 시도의 시발점으로서 광해군대 대명·대후금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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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Korean
李爾瞻 ; 光海君 ; 斥和論 ; 對明義理 ; Yi I-chum(李爾瞻) ; Gwanghaegun(光海君) ; Daemyeongeuirie (對明義理) ; Cheok’hwa-ron (斥和論)
KCI등재
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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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광해군대 정치·외교사의 정밀한 복원을 위해서는 집권 세력의 핵심 인물이었던 이이첨에 대한 집중적 고찰이 필요하다. 본 논문은 이러한 시도의 시발점으로서 광해군대 대명·대후금 외�...
광해군대 정치·외교사의 정밀한 복원을 위해서는 집권 세력의 핵심 인물이었던 이이첨에 대한 집중적 고찰이 필요하다. 본 논문은 이러한 시도의 시발점으로서 광해군대 대명·대후금 외교를 둘러싼 광해군과 이이첨의 갈등 양상과 그 정치적·사상적 함의에 대해 정리하였다. 아울러, 이이첨이 어떤 배경 아래 척화론과 대명의리의 고수를 주장했는지 살펴보았다.
광해군대의 대부분 신료들은 政派를 가리지 않고 명에 대한 지원과 후금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조선군이 후금군에 비해 전력상의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으며, 명군조차 후금군을 압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이 명의 요청을 수락하여 원병을 파견할 경우 후금의 보복 우려가 있다는 사실 역시 모르지 않았다.
이이첨 역시 시종일관 事大의 義理, 재조지은에 대한 보답 등을 강조하며, 명에 대한 원병 파견과 후금과의 화친 불가를 주장하였다. 그는 대명사대 또는 대명의리의 부정을 人倫의 멸절로 인식하였다. 흥미롭게도, 인조반정의 주도 세력 또한 동일한 修辭를 사용하여 광해군 축출의 정당성을 표명하였다. 심하 전투 패전 이후의 상황은 이전보다 훨씬 더 조선에 불리해졌지만, 이이첨을 비롯한 조정의 신료들은 그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들의 척화론은 기본적으로 외교안보적 대안의 성격이라기보다 利害를 초월한 義理의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이첨 또한 인조반정의 공신들과 마찬가지로 척화와 대명의리를 불변의 진리이자 보편적 당위로 간주하는 당대의 지적 분위기에 깊이 매몰된 인물이었다. 그의 강직한 기질과 원리주의적 실천가로서의 정치적 성향 등은 그가 앞장서 척화론을 제기한 또 하나의 배경으로 주목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류성룡의 현실주의적 외교 노선을 主和誤國이라 부르며 맹렬히 공격한 바 있으며, 대명 외교의례의 철저한 준행을 강조하는 행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For the precise restoration of political history and diplomacy during the reign of Gwanghaegun(光海君), intensive consideration needs to be given to Yi I-chum(李爾瞻), who was a key figure in the ruling power. As the starting point of this attem...
For the precise restoration of political history and diplomacy during the reign of Gwanghaegun(光海君), intensive consideration needs to be given to Yi I-chum(李爾瞻), who was a key figure in the ruling power. As the starting point of this attempt, this paper summarized the aspect of the conflict between Gwanghaegun(光海君) and YiI-chum(李爾瞻) over the diplomacy with Ming and Hugeum(後金) during the reign of Gwanghaegun(光海君) and its political and ideological implications. In addition, we looked at the background and motive of YiI-chum(李爾瞻)"s argument for the master of chirping theory and Daemyeongeurie(對明義理).
During the reign of Gwanghaegun(光海君), most of his officials insisted on support for Ming and a hard-line policy against Hugeum(後金), regardless of political factions. They were clearly aware that the Joseon army did not have a military advantage over Hugeum(後金) army, and that even the Ming army could not overwhelm Hugeum(後金) army. And they were also well aware that if Joseon accepted Ming"s request and sent relief troops, Hugeum(後金) might retaliate.
YiI-chum(李爾瞻) also consistently emphasized the Sadaeeuirie(事大義理) and in return for Chaejochieun(再造之恩)’, and insisted on sending soldiers to Ming and the impossibility of reconciliation with Hugeum(後金). He recognized the denial of Daemyeongsadae(對明事大) or Daemyeongeurie (對明義理) as the extinction of ethics. Interestingly, the leading forces of the Injo Banjeong(仁祖反正) also used the same rhetoric to justify the expulsion of Gwanghaegun(光海君). The situation after the defeat of the Battle of Simha(深河) was even more unfavorable to Joseon than before, but the officials of the royal court, including YiI-chum(李爾瞻), did not change their arguments. Because their Cheok’hwa-ron(斥和論) was basically raised from the dimension of righteousness that transcends interest, rather than as a diplomatic and security alternative.
YiI-chum(李爾瞻) was also a person who was deeply buried in the intellectual atmosphere of the time, who regarded Cheok’hwa and Daemyeongeuirie(對明義理) as unchanging truths and universal reasons, just like the meritorious retainer of Injo Banjeong(仁祖反正). His strong temperament and political disposition as a fundamentalist practitioner should be noted as another background in which he took the lead in raising the Cheok’hwa-ron(斥和論). In this regard, he fiercely attacked Ryu Seong-ryong(柳成龍)"s realist diplomatic line calling it Juhwaogug(主和誤國) and also left a track that emphasized strict adherence to diplomatic rites related to the Ming.
목차 (Table of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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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延吉敎區의 가톨릭 少年運動 - 탈시시오회(Tarsitiusvereins)를 중심으로 -
식민지 조선의 ‘대가족제’ 담론:1920년대~1930년대 ≪동아일보≫·≪조선일보≫ 기사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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