淵齋學派는 연재 송병선과 동생 宋秉珣의 문인 집단을 말한다. 송병선과 송병순은 충청도 지역은 물론,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강학을 통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송병선은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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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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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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淵齋學派는 연재 송병선과 동생 宋秉珣의 문인 집단을 말한다. 송병선과 송병순은 충청도 지역은 물론,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강학을 통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송병선은 불교...
淵齋學派는 연재 송병선과 동생 宋秉珣의 문인 집단을 말한다. 송병선과 송병순은 충청도 지역은 물론,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강학을 통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송병선은 불교와 천주교를 이단이라고 비판하였으며, 여러 차례의 상소를 통하여 위정척사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도가 없어지면 나라가 망한다고 믿었다. 이에 따라 그는 나라를 구하기 위한 척사론을 주장하였다. 송병순은 관료를 멀리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는데, 특히 송시열의 학문을 존신하여 소중화론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일본과의 강화조약이 침략의 시작이라면서 척왜론을 주장하였다.
송병선과 송병순은 여러 차례에 걸친 정부의 관직 제수에도 이를 거절하고 재야 유학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1905년 일제에 의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송병선은 고종을 알현하고 오적의 처단과 조약의 폐기를 주청한 뒤에 자결하였다. 송병순 역시 상소를 올려 오적의 처단과 전국 유림의 궐기, 그리고 조약의 파기를 주장하였다. 그는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여는 자결을 기도하였으나 제자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12년 ‘은사금’을 거부하며 자결 순국하였다.
송병선 송병순 형제의 순국은 그의 문인들에게 영향을 주어 일본에 항거하여 투쟁한 민족지사가 적지 않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로 스승과 같이 자결한 朴炳夏와 李柱煥이 있다. 鄭璣淵과 李柄運 등은 을사조약 폐기운동에 참여하고 향리에 은둔하였다. 안규용은 「殉義事實」를 편찬하여 안규홍의병의 활동상을 전하였으며, 문인들에게 항일사상을 고취한 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張基洪은 최익현 의병에 참여하였으며, 曺在學와 金容鎬, 宋柱憲 등은 1919년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하고 고초를 겪었다. 이외에도 趙鍾悳 등 많은 문인들은 일제강점기 은둔하여 스승의 정신을 이어 일제에 항거하였다. 이처럼 연재학파의 문인들은 스승의 뒤를 쫓아 自靖의 길 택했다. 그중에 자결을 택한 이도 있으나 대부분은 스승의 학문을 계승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은둔의 길을 택한 특성이 있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Yeonjae-school refers to the group of disciples of Song Byeong-seon(宋秉璿) and his brother Song Byeong-soon(宋秉珣). They cultivated many students through lectures in Chungcheong Province as well as Cholla and Kyungsang area. Song Byeong...
The Yeonjae-school refers to the group of disciples of Song Byeong-seon(宋秉璿) and his brother Song Byeong-soon(宋秉珣). They cultivated many students through lectures in Chungcheong Province as well as Cholla and Kyungsang area.
Song Byeong-seon criticized Buddhism and Catholicism as heresy. In addition, he proposed Wijeongcheoksaron(Thought of Defending Orthodoxy and Rejecting Heterodoxy) through several appeals to the king. He believed that the country would be ruined if Tao(道) was lost. He thus insisted on Wijeongcheoksaron to save the country. Song Byeong-soon distained himself from the bureaucracy and devoted himself to study, in particular, he highly praised Sojunghwaron(Sinocentrism) of Song Si-yeol(宋時烈) and strongly advocated the theory. He also argued that the Treaty of 1876, signed with Japan, marked the beginning of the invasion and objected to it.
Song Byung-seon and Song Byung-soon refused to accept ranks several times and lived as a Confucian scholar. When the Treaty was enforced by Japan in 1905, Song Byeong-seon met King Gojong and demanded for the execution of ‘Five Traitors’ and the abolition of the treaty. After knowing that his will would not be accepted, he committed suicide for the country.
Song Byung-soon also appealed to the king, asking for the execution of the ‘Five Traitors’, the uprising of Confucian scholars, and the abolition of the treaty. In 1910 when the country is annexed, he attempted to commit suicide, but he was restrained by his disciple, not to fulfill his desire, in 1912 he finally committed suicide after refusing Japan’s ‘Eunsageum’(‘恩賜金’).
Song Byung-soon Brother’s suicide for the country influenced on his disciples, and many of them fought against the Japanese imperialism. Among them, Park Byeong-ha and Lee Ju-whuan committed suicide like master, some of them participated in Righteous Army struggling against Japanese army, and most of them retreated to the countryside, carried on the teacher’s education and cultivated his students.
목차 (Table of Contents)
참고문헌 (Reference)
1 趙熙濟, "念齋野錄" 금강서원 1990
2 김봉곤, "蘆沙學說에 대한 淵齋學派의 批判" 한국사상사학회 (33) : 281-323, 2009
3 김상기, "호서유림의 사상과 민족운동" 지식산업사 2016
4 김상기, "한말 일제하 內浦지역 畿湖學脈의 형성" 한국사상사학회 (22) : 369-404,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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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박경목, "연재 송병선의 학맥과 민족운동" 39 : 2001
7 박경목, "연재 송병선의 위정척사운동" 27 : 1999
8 "승정원일기"
9 박민영, "박성수교수화갑기념논총" 1991
10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문충사소장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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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노관범, "19세기 후반 호서산림의 위상과 정학 운동" 38 :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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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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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20 | 학술지등록 | 한글명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외국어명 : JOURNAL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STUDIES | ![]() |
2005-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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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인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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