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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 외교독립운동 관련 조사 및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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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E1760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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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이 조사 및 연구는 해외 외교독립운동을 가능한 “있었던 그대로”(wie es eigentlich gewesen) 재조명하고, 지속적 조사 및 연구과제를 식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조사 및 연구는 국내가 아니라 해외, 그리고 외교독립운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외교독립운동은 무장독립운동과 교육문화독립운동과 함께 안창호가 제시했던 독립운동 “요령”(要領)들 중 하나였다. 독립이라는 공동 목표를 향한 요령들은 상호배타적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었다. 외교인력의 양성은 교육문화독립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무장독립운동은 국제사회에서 외교적 목소리를 높이는 데 필수적이었다. 외세와 비교해서 무장력이 압도적으로 열세에 있던 상황에서 다른 열강의 외교적, 군사적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서도 외교독립운동이 필수적이었다.
      독립운동은 민족해방운동과 등가적 의미로 사용되는 경향도 있지만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민족해방운동은 외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1차적 목적으로 하는 데 비해 독립문을 세운 독립협회 이후로 독립운동은 국가의 독립을 위협하는 외세에 반대한다는 의미와 함께 독립역량을 가진 독립국을 만들어간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 조사 및 연구에서는 그동안 간과되거나 저평가되었던 해외 외교독립운동 상의 인물들(외국인들 포함)과 사건들을 재조명하고, 추가적으로 발굴되어야 할 자료, 사건, 인물들을 탐색, 식별하였다. 외교독립운동사에 대한 정신사적 서술과 함께 외교독립운동이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도출해냈는 지를 가늠해보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조사 및 연구결과를 산출하였다.
      첫째, 일제에 의한 대한제국 외교권 피탈 이후 해외에서 만들어진 대한인국민회, 그리고 3.1운동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외교독립운동이 1945년 해방과 1948년 대한민국 독립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재조명하였다.
      둘째, 해외 외교독립운동의 민주적 기반을 형성했던 해외 이주에 주목하되 단순한 이주사나 이민사의 차원을 넘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조사, 연구하고, 추후의 과제들을 식별하였다. 해외 외교독립운동은 외국 정부 및 민주적 의회들을 상대로 전개되었지만, 외국 공중(公衆)을 상대로 하는 공공외교적 형식으로도 전개되었다. 해외 이주민들과 현지인들 간의 인적 관계와 문화적 교섭은 이러한 공공외교적 노력을 뒷받침했음을 파악하였다.
      이처럼 해외 대한인들은 공식외교가 단절된 이후 현지인들과의 우호적 조직을 통해 대한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고 도움을 구하는 활발한 공공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하와이에서는 현지인들과 함께 교회들을 세우면서 융화적인 조직을 만들었다. 1919년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분수령으로 해서 우호적 단체가 더욱 활발하게 조직되었다. 미국과 영국의 런던에서는 The 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 프랑스의 파리에서는 Les Amis de la Cor?e가 조직되었고, 중국의 후난, 후베이, 안후이, 구이저우, 쓰촨 등지에서는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결성이 추진되었다. 1917-18년 안창호의 멕시코 순방 이후 중남미 지역에서 대한인국민회 지방회 조직이 촉진되었다. 중남미 거주 대한인들은 현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렵게 생존하면서, 정체성 보전과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셋째,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가보훈을 받은 외국인들이나 그에 준하는 외국인들을 포함하여 조사, 연구하고, 추후의 연구과제들을 식별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가 수행했던 신문스크랩들을 조사하여 후속연구를 위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아울러 대한임정 구미위원부와 대한임정 주미외교위원부에서 실시한 연설활동에 대한 데이터도 구축하였다.
      넷째, 공공외교적 측면에서 중국이나 일본과 문화적으로 구별되는 대한의 문화정체성을 알리려고 했던 점, 그리고 해외에서의 외교독립운동을 매개로 한 구성주의적 상호작용을 통해 대한국민을 형성해왔던 외교독립운동의 역사를 재조명하였다.
      1910년 병합 이후 대한제국을 다시 “조선”이라고 부르면서 공식외교를 차단하고, 대한인들의 문화적 능력과 정체성을 부정하려는 일본의 공공외교에 맞서서 대한(大韓) 코리아의 독립의지와 정체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승인받기 위한 노력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처럼 대한(Korea)의 정치적, 문화적 정체성을 국제사회에 각인시키고, 국제정치적 역학관계를 활용하여 독립을 되찾고자 했던 해외 외교독립운동은 상호구성적 과정을 통해 대한인의 정치적, 문화적 정체성이 더욱 분명해지는 효과도 있었다.
      청제국의 영향권 아래 있던 조선이나 일본제국에 병합된 조선이 아니라 국제사회를 향해 대한(大韓)의 독립을 주장하는 외교적 노력과 함께 대한신민회, 대한인국민회,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인총대표회의, 대한인동지회, 대한인자유대회, 그리고 해방 이후 대한독립국민촉성회 등이 이어지면서 민주적 대한인의 독립적 정체성이 대외적으로 발현되는 동시에 대내적으로 형성, 발전하였던 것이다.
      다섯째, 1919년 상하이 프랑스조계에서 수립되어 항저우 등을 거쳐 충칭으로 이동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본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가 외교독립운동은 물론 무장독립운동을 위해서도 긴밀히 협력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조소앙, 민필호 등의 기여가 새롭게 조명되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하와이공습으로 시작된 아시아·태평양전쟁은 외교독립운동의 양상을 새롭게 바꾸어 놓았다. 당시 미국의 국력은 다른 국가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미국 다음으로는 큰 격차를 보이며 독일, 영국, 소련, 이탈리아, 일본, 그리고 프랑스 순이었다. 1919년 수립 이후 미국을 외교독립운동의 주요 대상으로 삼고 있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이후 미국에서의 외교독립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이 전망되던 1944년 6월 이후 충칭 대한임정이 중화민국 정부를 상대로 전개했던 「한국광복군 행동 9개 준승」철폐 외교가 성공을 거두고, 한국광복군의 대한임정 귀속이 결정되는 데는 대한임정의 대미외교가 지렛대 효과를 발휘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다른 열강에 비해 압도적 국력을 갖기 시작한 미국을 상대로 워싱턴, D.C.에서 전개되던 대한임정 주미외교위원부의 활동을 기반으로 대한임정은 근거지를 충칭에서 미주로 옮기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배수진을 치고 장제스 국민정부와 외교협상을 전개했던 것이다. 1944년 6월 말 미국 부통령 H. 월리스의 충칭 방문은 대미 외교를 통한 충칭 대한임정의 독자성 확보에 있어서 중요한 모멘텀을 제공했다.
      여섯째, 1940년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외교는 장제스 국민정부와 루즈벨트행정부를 상대로 전개되었다. 충칭 본부는 중화민국을 향한 승인외교에 주력했다. 1943년 11월 말 카이로에서 열린 미?중?영 삼국 최고지도자들 간의 회의, 곧 카이로회의에서 코리아 문제가 논의되었는데 장제스를 비롯한 중화민국 측에서는 전후 한국에 대한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하면서도 미국의 주장에 따라 일정 기간의 국제공관(國際共管), 즉 신탁통치를 묵인하는 입장을 취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코리아 문제 처리과정에서 최대의 쟁점이 된 신탁통치의 씨앗이 “적절한 절차를 통해서(in due course)”라는 카이로선언의 문구에 포함된 것은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영국의 입장과 더불어 장제스 국민정부의 대한임정에 대한 이중적 태도가 반영된 결과였다. 1945년 5월 샌프란시스코회의에 파견된 대한임정 대표단은 1945년 2월 얄타에서 미국의 F. 루즈벨트 대통령(4월 12일 별세)과 소련의 J. 스탈린 사이에 모종의 밀약이 있었는 지 여부를 확인받고자 얄타밀약설을 제기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그 결과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권으로 넘겨주는 밀약은 없다는 점을 공인받을 수 있었다.
      일곱째, 1945년 해방과 1948년 독립정부 수립이 대한인들의 주도적 군사역량을 통해 이룩된 것은 아니었지만 1943년 카이로선언 등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코리아의 독립을 인정받고, 1945년 샌프란시스코회의를 전후로 소련의 영향권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공약을 받아내는 데는 외교독립운동이 주효했다. 일본제국의 군사적, 외교적 압박 속에서 전개되었던 해외 외교독립운동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해방된 한반도에서 독립촉성 외교로 이어져 1948년 38선 이남에서나마 대한민국 독립정부가 수립되는데 기여했으며, 같은 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국제연합(UN) 총회에서 장면, 조병옥 등의 독립정부 승인외교로도 이어졌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환국과정에서 전개된 독립촉성 외교와 관련해서 민필호 관련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여 정리하였다.
      여덟째, 대한독립을 위한 해외 외교독립운동은 안창호 등이 주도한 대한인국민회,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경험에서 보여지듯이 민주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민주적 여론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아홉째, 해외외교독립운동의 중추였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헌법은 “대한민국의 강토는 구한제국의 판도”, 즉 간도를 포함한 대한제국의 강역(疆域)이라는 영토의식을 표방하고 있었다. 이러한 영토의식은 1948년 제헌 당시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약간 축소되었지만 현재의 헌법으로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자유로운 통일 한반도 구축을 위한 노력은 대한민국 국민의 헌법적 약속인 동시에 대한제국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이어졌던 독립정신의 계승이기도 하다.
      이러한 해외 외교독립운동사의 흐름이 좀 더 세밀하게 연구·교육된다면 해외 대한인 사회와 국내 다인종, 다문화 사회를 포괄하는 국민통합을 증대하고, 21세기 대한독립을 지켜나가고, 자유로운 통일 한반도를 이룩하기 위한 대한국민과 외교관 육성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대한외교독립운동에 도움을 주었던 외국 정부와 국민들과의 공공외교적 관계를 증대하여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자유로운 통일 한반도를 위한 국제적 연대를 확보하는 데도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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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조사 및 연구는 해외 외교독립운동을 가능한 “있었던 그대로”(wie es eigentlich gewesen) 재조명하고, 지속적 조사 및 연구과제를 식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조사 및 연구는 국내가 아...

      이 조사 및 연구는 해외 외교독립운동을 가능한 “있었던 그대로”(wie es eigentlich gewesen) 재조명하고, 지속적 조사 및 연구과제를 식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조사 및 연구는 국내가 아니라 해외, 그리고 외교독립운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외교독립운동은 무장독립운동과 교육문화독립운동과 함께 안창호가 제시했던 독립운동 “요령”(要領)들 중 하나였다. 독립이라는 공동 목표를 향한 요령들은 상호배타적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었다. 외교인력의 양성은 교육문화독립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무장독립운동은 국제사회에서 외교적 목소리를 높이는 데 필수적이었다. 외세와 비교해서 무장력이 압도적으로 열세에 있던 상황에서 다른 열강의 외교적, 군사적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서도 외교독립운동이 필수적이었다.
      독립운동은 민족해방운동과 등가적 의미로 사용되는 경향도 있지만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민족해방운동은 외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1차적 목적으로 하는 데 비해 독립문을 세운 독립협회 이후로 독립운동은 국가의 독립을 위협하는 외세에 반대한다는 의미와 함께 독립역량을 가진 독립국을 만들어간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 조사 및 연구에서는 그동안 간과되거나 저평가되었던 해외 외교독립운동 상의 인물들(외국인들 포함)과 사건들을 재조명하고, 추가적으로 발굴되어야 할 자료, 사건, 인물들을 탐색, 식별하였다. 외교독립운동사에 대한 정신사적 서술과 함께 외교독립운동이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도출해냈는 지를 가늠해보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조사 및 연구결과를 산출하였다.
      첫째, 일제에 의한 대한제국 외교권 피탈 이후 해외에서 만들어진 대한인국민회, 그리고 3.1운동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외교독립운동이 1945년 해방과 1948년 대한민국 독립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재조명하였다.
      둘째, 해외 외교독립운동의 민주적 기반을 형성했던 해외 이주에 주목하되 단순한 이주사나 이민사의 차원을 넘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조사, 연구하고, 추후의 과제들을 식별하였다. 해외 외교독립운동은 외국 정부 및 민주적 의회들을 상대로 전개되었지만, 외국 공중(公衆)을 상대로 하는 공공외교적 형식으로도 전개되었다. 해외 이주민들과 현지인들 간의 인적 관계와 문화적 교섭은 이러한 공공외교적 노력을 뒷받침했음을 파악하였다.
      이처럼 해외 대한인들은 공식외교가 단절된 이후 현지인들과의 우호적 조직을 통해 대한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고 도움을 구하는 활발한 공공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하와이에서는 현지인들과 함께 교회들을 세우면서 융화적인 조직을 만들었다. 1919년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분수령으로 해서 우호적 단체가 더욱 활발하게 조직되었다. 미국과 영국의 런던에서는 The 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 프랑스의 파리에서는 Les Amis de la Cor?e가 조직되었고, 중국의 후난, 후베이, 안후이, 구이저우, 쓰촨 등지에서는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결성이 추진되었다. 1917-18년 안창호의 멕시코 순방 이후 중남미 지역에서 대한인국민회 지방회 조직이 촉진되었다. 중남미 거주 대한인들은 현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렵게 생존하면서, 정체성 보전과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셋째,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가보훈을 받은 외국인들이나 그에 준하는 외국인들을 포함하여 조사, 연구하고, 추후의 연구과제들을 식별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가 수행했던 신문스크랩들을 조사하여 후속연구를 위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아울러 대한임정 구미위원부와 대한임정 주미외교위원부에서 실시한 연설활동에 대한 데이터도 구축하였다.
      넷째, 공공외교적 측면에서 중국이나 일본과 문화적으로 구별되는 대한의 문화정체성을 알리려고 했던 점, 그리고 해외에서의 외교독립운동을 매개로 한 구성주의적 상호작용을 통해 대한국민을 형성해왔던 외교독립운동의 역사를 재조명하였다.
      1910년 병합 이후 대한제국을 다시 “조선”이라고 부르면서 공식외교를 차단하고, 대한인들의 문화적 능력과 정체성을 부정하려는 일본의 공공외교에 맞서서 대한(大韓) 코리아의 독립의지와 정체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승인받기 위한 노력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처럼 대한(Korea)의 정치적, 문화적 정체성을 국제사회에 각인시키고, 국제정치적 역학관계를 활용하여 독립을 되찾고자 했던 해외 외교독립운동은 상호구성적 과정을 통해 대한인의 정치적, 문화적 정체성이 더욱 분명해지는 효과도 있었다.
      청제국의 영향권 아래 있던 조선이나 일본제국에 병합된 조선이 아니라 국제사회를 향해 대한(大韓)의 독립을 주장하는 외교적 노력과 함께 대한신민회, 대한인국민회,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인총대표회의, 대한인동지회, 대한인자유대회, 그리고 해방 이후 대한독립국민촉성회 등이 이어지면서 민주적 대한인의 독립적 정체성이 대외적으로 발현되는 동시에 대내적으로 형성, 발전하였던 것이다.
      다섯째, 1919년 상하이 프랑스조계에서 수립되어 항저우 등을 거쳐 충칭으로 이동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본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가 외교독립운동은 물론 무장독립운동을 위해서도 긴밀히 협력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조소앙, 민필호 등의 기여가 새롭게 조명되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하와이공습으로 시작된 아시아·태평양전쟁은 외교독립운동의 양상을 새롭게 바꾸어 놓았다. 당시 미국의 국력은 다른 국가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미국 다음으로는 큰 격차를 보이며 독일, 영국, 소련, 이탈리아, 일본, 그리고 프랑스 순이었다. 1919년 수립 이후 미국을 외교독립운동의 주요 대상으로 삼고 있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이후 미국에서의 외교독립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이 전망되던 1944년 6월 이후 충칭 대한임정이 중화민국 정부를 상대로 전개했던 「한국광복군 행동 9개 준승」철폐 외교가 성공을 거두고, 한국광복군의 대한임정 귀속이 결정되는 데는 대한임정의 대미외교가 지렛대 효과를 발휘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다른 열강에 비해 압도적 국력을 갖기 시작한 미국을 상대로 워싱턴, D.C.에서 전개되던 대한임정 주미외교위원부의 활동을 기반으로 대한임정은 근거지를 충칭에서 미주로 옮기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배수진을 치고 장제스 국민정부와 외교협상을 전개했던 것이다. 1944년 6월 말 미국 부통령 H. 월리스의 충칭 방문은 대미 외교를 통한 충칭 대한임정의 독자성 확보에 있어서 중요한 모멘텀을 제공했다.
      여섯째, 1940년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외교는 장제스 국민정부와 루즈벨트행정부를 상대로 전개되었다. 충칭 본부는 중화민국을 향한 승인외교에 주력했다. 1943년 11월 말 카이로에서 열린 미?중?영 삼국 최고지도자들 간의 회의, 곧 카이로회의에서 코리아 문제가 논의되었는데 장제스를 비롯한 중화민국 측에서는 전후 한국에 대한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하면서도 미국의 주장에 따라 일정 기간의 국제공관(國際共管), 즉 신탁통치를 묵인하는 입장을 취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코리아 문제 처리과정에서 최대의 쟁점이 된 신탁통치의 씨앗이 “적절한 절차를 통해서(in due course)”라는 카이로선언의 문구에 포함된 것은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영국의 입장과 더불어 장제스 국민정부의 대한임정에 대한 이중적 태도가 반영된 결과였다. 1945년 5월 샌프란시스코회의에 파견된 대한임정 대표단은 1945년 2월 얄타에서 미국의 F. 루즈벨트 대통령(4월 12일 별세)과 소련의 J. 스탈린 사이에 모종의 밀약이 있었는 지 여부를 확인받고자 얄타밀약설을 제기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그 결과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권으로 넘겨주는 밀약은 없다는 점을 공인받을 수 있었다.
      일곱째, 1945년 해방과 1948년 독립정부 수립이 대한인들의 주도적 군사역량을 통해 이룩된 것은 아니었지만 1943년 카이로선언 등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코리아의 독립을 인정받고, 1945년 샌프란시스코회의를 전후로 소련의 영향권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공약을 받아내는 데는 외교독립운동이 주효했다. 일본제국의 군사적, 외교적 압박 속에서 전개되었던 해외 외교독립운동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해방된 한반도에서 독립촉성 외교로 이어져 1948년 38선 이남에서나마 대한민국 독립정부가 수립되는데 기여했으며, 같은 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국제연합(UN) 총회에서 장면, 조병옥 등의 독립정부 승인외교로도 이어졌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환국과정에서 전개된 독립촉성 외교와 관련해서 민필호 관련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여 정리하였다.
      여덟째, 대한독립을 위한 해외 외교독립운동은 안창호 등이 주도한 대한인국민회,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경험에서 보여지듯이 민주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민주적 여론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아홉째, 해외외교독립운동의 중추였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헌법은 “대한민국의 강토는 구한제국의 판도”, 즉 간도를 포함한 대한제국의 강역(疆域)이라는 영토의식을 표방하고 있었다. 이러한 영토의식은 1948년 제헌 당시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약간 축소되었지만 현재의 헌법으로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자유로운 통일 한반도 구축을 위한 노력은 대한민국 국민의 헌법적 약속인 동시에 대한제국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이어졌던 독립정신의 계승이기도 하다.
      이러한 해외 외교독립운동사의 흐름이 좀 더 세밀하게 연구·교육된다면 해외 대한인 사회와 국내 다인종, 다문화 사회를 포괄하는 국민통합을 증대하고, 21세기 대한독립을 지켜나가고, 자유로운 통일 한반도를 이룩하기 위한 대한국민과 외교관 육성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대한외교독립운동에 도움을 주었던 외국 정부와 국민들과의 공공외교적 관계를 증대하여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자유로운 통일 한반도를 위한 국제적 연대를 확보하는 데도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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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I. 서론 8
      • 1. 조사 및 연구의 목적과 시공간적 범위 8
      • 2. 조사 및 연구의 분석틀과 방법 11
      • II . 대한제국의 주권 피탈과 해외 외교독립운동 22
      • I. 서론 8
      • 1. 조사 및 연구의 목적과 시공간적 범위 8
      • 2. 조사 및 연구의 분석틀과 방법 11
      • II . 대한제국의 주권 피탈과 해외 외교독립운동 22
      • 1. 해외 이민과 해외 외교독립운동 기지의 형성 22
      • 2.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 피탈과 외교독립운동 44
      • 3. 1907년 헤이그평화회의에서의 외교독립운동과 고종황제 퇴위 63
      • 4. 대한인 정체성의 형성과 대한인국민회의 탄생 70
      • 5. 하와이 대한인 사회와 외교독립운동의 기지 형성 86
      • 6. 멕시코 및 쿠바 대한인 사회의 형성과 외교독립운동 93
      • III. 신해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 시기 해외 외교독립운동 108
      • 1. 1911년 신해혁명 이후 대한인들의 중국 정치망명과 외교독립운동 108
      • 2. 1914년 세계대전 발발 전후 미주에서의 외교독립운동 115
      • 3. 1917-18년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안창호의 멕시코 순방과 영향 126
      • IV .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3.1운동 전후 해외 외교독립운동 134
      • 1. 1919년 파리평화회의와 외교독립운동의 재개 134
      • 2.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와 구미위원부의 조직과 활동 176
      • 3. 1921-22년 워싱턴회의와 외교독립운동 201
      • 4. 1920년대 대 중국 외교독립운동 228
      • 5. 1920년대 대 러시아·소련 외교독립운동 241
      • 6. 3.1운동 전후 멕시코 및 쿠바 대한인 사회의 동향과 활동 252
      • V . 일본의 전쟁 확대와 대한임정 외교독립운동의 고조 256
      • 1.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윤봉길 의거 전후의 외교독립운동 256
      • 2.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회의 시기 외교독립운동 270
      • 3. 1937년 중일전쟁,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후의 외교독립운동 280
      • VI.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 대한임정의 외교독립운동 299
      • 1. 1941년 미일전쟁 발발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일선전성명 299
      • 2.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중 군사외교와 승인외교 305
      • 3. 대한임정 주미외교위원부의 외교독립운동 309
      • 4. 한길수 등의 독립운동과 대한임정과의 갈등 369
      • 5. 1943년 카이로회의 전후의 충칭 대한임정과 주미외교위원부 398
      • 6. 1944년 애슐랜드 한국승인대회 이후 대한임정의 외교독립운동 408
      • 7.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 전후 대한임정의 외교독립운동 420
      • 8.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멕시코와 쿠바 대한인들의 외교독립운동 433
      • VII.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전후의 해외 외교독립운동 440
      • 1.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환국과 주화대표단의 대중외교 440
      • 2.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의 반탁독립운동과 독립촉성 외교 449
      • 3.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독립운동을 계승한 대한민국 독립정부 승인 외교 490
      • VIII. 결론 496
      • IX . 참고문헌 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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