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에 출판된 王平陵의 저서『中國婦女戀愛觀』의 서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1920년대 중반경이 되면 중국에서 “연애는 부녀문제 중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나아가 사랑과 성을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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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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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1926년에 출판된 王平陵의 저서『中國婦女戀愛觀』의 서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1920년대 중반경이 되면 중국에서 “연애는 부녀문제 중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나아가 사랑과 성을 개인...
1926년에 출판된 王平陵의 저서『中國婦女戀愛觀』의 서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1920년대 중반경이 되면 중국에서 “연애는 부녀문제 중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나아가 사랑과 성을 개인적인 문제 아닌 사회개조의 수단으로 생각하였던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다. 본 연구는 새로운 사료의 발굴과 구술자료를 적극 활용, 사회사와 사상사를 결합한 사회문화사의 각도에서 1920,30년대 중국인의 성과 사랑, 그 이상과 현실을 살펴 본다.
제1장 「전통시대 중국인의 성과 사랑」에서는 史書와 문학작품, 회화 등 미술작품을 통해 19세기 이전 중국인의 ‘성’관념과 성풍속을 그려내고자 한다.
제2장 「연애사건과 ‘신성도덕’론을 통해 본 1920년대 중국의 성문화」에서는 1920년대 중국을 풍미한 성도덕 논쟁과 새로운 성문화를 첫째, 陳淑君 · 譚熙鴻의 연애사건 및 그에 대한 당시 중국인들의 반응, 둘째, 章錫琛 주편의 『新女性』과 張競生 주편의 『新文化』라고 하는 당시 영향력 있는 두 잡지 사이의 논쟁을 통해 살펴 본다. 나아가 陳淑君 · 譚熙鴻의 연애사건 을 비롯하여 ‘羅金사건’ 등 당시 대표적인 연애사건과 관련한 몇 가지 사례연구를 통해 연애와 성담론이 당시 중국인의 현실생활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실천되었는지 고찰해 본다.
본 연구의 핵심이 될 제3장 「쾌락의 권리- 張競生의 『性史』(1926)와 ‘性愛’논쟁」에서는 진숙군사건으로 인해 ‘연애박사’가 된 장경생이 1926년 자신이 운영하던 ‘美的書店’을 통해 편집 출판한 책, 『性史』와 그것이 야기한 '성애'논쟁을 살펴 본다.『性史』는 장경생이 북경대 풍속조사회 주임으로 있을 때 전국에서 수집한 성풍속도를 기초로 하여 펴낸 본격적인 성문화 연구였다.장경생은 성을 학문으로 체계화하고 보급하는 데 노력했고 여성의 성욕과 관련된 문제, 예컨대 피임, 임신과 오르가즘의 관계 등에 대해 많이 연구했는데 그 목적은 일반 남녀들로 하여금 건전한 성애의 쾌락을 누릴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특히 『 신문화』 1927년2월호에「第三種水與卵珠及生機的電和優種的關係-又名‘美的性慾’」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 원만한 성생활은 단순한 쾌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민족의 진보에 크게 기여할 수 있있다고 성토했다. 그에 따르면 성적으로 만족한 여성은 성교시에 ‘제3의 액체’를 분출하며 그 때 잉태된 태아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우수한 아이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이는 확실히 1920·30년대 중국 지식인을 사로잡은 우생학적 발상이다. 나아가 그는 여성적 가치를 찬미했고 성교시 여성의 주도권을 강조했다. 이 글은 엄청난 논쟁을 야기하는데 여성들 중에는 그의 견해에 동의하는 자도 많이 있었다. 이 때를 전후해 중국에는 성과 관련한 책들이 봇물처럼 쏟아져나온다. 물론 그 중에는 외설적인 것도 있지만 『性與婚姻』『性愛與結婚』『性慾與性愛』『性慾衛生』『性論』『性學ABC』『性敎育』등 과학적으로 성욕과 성애를 연구한 책들도 많았다.
결론에 해당하는 제 4장에서는 제2, 3장의 내용을 토대로 '성과 사랑을 통해 본 1920년대 중국의 사회문화사'를 재구성해볼 것이다.1920년대는 신사상과 구도덕이 혼재한 ‘과도기’였다. 많은 사람들이 노라를 모방해 집을 나가 자유연애를 실천하기도 했지만 魯迅의 소설『傷逝』의 여주인공처럼 경제적 난관에 봉착하면서 좌절하다가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 당시의 대표적인 ‘才子佳人’, 徐志摩와 林徽因의 연애도 결국은 비극으로 끝났다. 1920년대 중국의 지식인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대부분 ‘자유연애’에 찬동하기는 했지만 관념의 제창과 행동의 실천은 쉽게 일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관념상 혁명과 연애를 일치할 수 있게 만드는 사이비과학, 즉 우생학의 영향으로 인해 1930년대까지도 자유연애와 산아제한, 여성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성선택권과 모성선택권은 여전히 관심의 대상이었다. 비록 너무 과격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장경생이 주장한 “여성은 쾌락의 주체가 될 수 있으며 성교시 주동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하는 메시지는 여성들로 하여금 더 이상 수동적 객체 아닌 적극적 주체로서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을 것이다. 여성의 성욕을 인정하는 것은 가부장제에 대한 소극적 전복이자 적극적으로는 여성 자주적인 이상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張競生의 ‘情人制’(혹은 ‘자유연애’‘자유모성’)은 비록 결국 혼인제도를 전복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양성관계의 새로운 정립을 위한 상상의 공간을 확대할 수 있었다. 1930년대에 신문과 잡지를 통해 급증하는 등장하는 이혼, 자살, 폭력, 기타 情死 등 사회문제는 1920년대가 낳은 신사상과 1930년대가 강요한 구도덕 사이의 갈등이 빚어낸 사건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