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한일의 이념과 문화의 특징 제1편 일본의 이념과 문화의 특징 제1장 고대 일본의 역사 제1절 도래인의 정체와 일본의 고대문명 제2절 율령제의 성립과 붕괴과정, 그리고 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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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Korean
지배이념 ; 문화 ; 신화 ; 주술 ; 무력 ; 호색적요소 ; 유교 ; 주자학 ; 무격신앙 ; 신불습합 ; 샤만 ; 동아시아 국제사회 ; 열녀 ; 강상 ; 해학 ; 감계 ; 이본전개 ; 신분제도 ; 천민교육 ; 형상화 ; 후지와라 ; 섭관 ; 무가 ; 문화관리 ; 판소리 등 [The Characteristics of Ideologies and Cultures of Korea and Japan]shamanism ; myth ; incantation ; military power ; sexuality ; ideologies ; cultures ; comparision between Korea and Japan ; ruler's ideology ; a virtuous woman ; moral principles ; humor ; paragon ; development of variations ; a status system ; education of lowly people ; Hujiwara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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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한일의 이념과 문화의 특징 제1편 일본의 이념과 문화의 특징 제1장 고대 일본의 역사 제1절 도래인의 정체와 일본의 고대문명 제2절 율령제의 성립과 붕괴과정, 그리고 섭관...
서론 한일의 이념과 문화의 특징
제1편 일본의 이념과 문화의 특징
제1장 고대 일본의 역사
제1절 도래인의 정체와 일본의 고대문명
제2절 율령제의 성립과 붕괴과정, 그리고 섭관가의 대두
제2장 고대 일본의 이념과 문화
제1절 섭관가 후지와라씨의 문학관리의 가능성
제2절 고대문학에 나타난 원령 및 진혼사상
1. 신화에 나타난 영웅의 형상화
2. 헤이안시대의 뇨보(女房)문학
3. 왕생설화군의 실태와 그 성립배경
제3절 고대 원령(怨靈)사상의 대두와 그 배경
제4절 고대불교의 실태
제5절 고대문학에 나타난 호색, 주술, 신화적 요소
1. 호색적 요소
2. 주술적 요소
3. 신화적 요소
제3장 중세일본의 역사
제4장 중세 일본의 이념과 문화
제1절 중세 이념의 정립자 덴다이 자스 지엔(天台宗 座主 慈円) - 구칸쇼(愚管抄)의 집필의도와 그 영향-
제2절 중세 문화에 나타난 원령사상
1 중세 설화집의 죽음의 양상과 논리
2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의 죽음의 양상과 논리
3 중세 예능 노(能) 가부키(歌舞伎)의 성립과 권진흥행
4 다이헤이키(太平記)의 죽음의 양상과 논리
제3절 중세문학에 나타난 신화적 요소(미완)
제4절 중세 문학의 사상적 배경에 관한 재검토
제5절 중세문학에 나타난 주술적, 호색적요소
제5장 근세 일본의 역사
제6장 근세 일본의 이념과 문화
제1절 일본 근세의 의미
-통일 권력자의 동아시아 국제사회 편입노력을 중심으로-
제2절 근세문화에 나타난 신화적 요소
제3절 근세문화에 나타난 원령, 주술, 호색적요소
제7장 근대 일본의 전쟁수행과 여론창출의 배경 (예정)
제2편 조선조의 이념과 문화의 특징
제1장 춘향전을 통해서 본 조선조의 문학관리
제2장 춘향전 이본전개의 동인과 해학의 이면
제3장 임진록군 및 군담소설의 구조론 (예정)
제4장 판소리에 나타난 인물의 형상화와 유교이념
-흥부가, 심청가, 변강쇠가를 중심으로-
제5장 이상의 날개를 통해서 본 조선조 후예의 충격과 고뇌
결론
한일간 갈등의 문화적 배경에 관한 고찰
국문 초록 (Abstract)
한일간 갈등의 가장 큰 원인은 과거 양국지배자의 지배이념이 서로 너무 달랐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즉 동아시아 국제사회의 일원이었던 한반도에서는 중화정책에 따라 문치를 지향하고 효...
한일간 갈등의 가장 큰 원인은 과거 양국지배자의 지배이념이 서로 너무 달랐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즉 동아시아 국제사회의 일원이었던 한반도에서는 중화정책에 따라 문치를 지향하고 효와 열을 扶植시키고자, 인간의 마음을 현혹시킬 수 있는 무력과 원령, 호색, 신화, 주술적요소 등을 사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말살, 배제해왔다. 그에 반해, 동아시아 국제사회에 편입되지 않은 일본에서는 샤만적 문화 풍토 하에서, 우리나라에서 고대적 문화요소로 치부되어온 위의 요소들이 후세에도 오히려 크게 발전하며 통시적으로 이어져 왔다. 일본의 역사, 문화를 통시적으로 조망해보면, 신화적 요소는 최초로 율령국가가 탄생되어 신화가 생성된 고대에 뿐만 아니라, 武家와 천황가와의 패권다툼으로 시작된 전란시대인 중세에도, 그리고 천황신앙을 밑천삼아 세계침략을 감행하였던 근대에도 많이 증보되었고, 지배자는 신화교육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고 무력이 두드러지지 않은 평화 시, 즉 중고와 근세에는 호색문학이 성행하는 현상을 보인다. 즉 무력이 성행할 때에는 신화적 요소가 성하고, 평화시에는 호색적 요소가 성하여, 결과적으로 호색적 요소와 무력 및 신화적 요소가 반복되며 강화되는 면모를 보이며, 원령 및 주술적요소는 그 기반을 이루고 있다. 이런 식으로 고대적 문화요소가 후세에도 배척되기는커녕, 그러한 문헌이 귀히 보존되어 올 수 있었다. 일본은 근세에 평화 정착을 위해 한반도로부터 유교이념을 이식하려 하였으나, 결국 깊이 침투되지는 못하고 국학으로 변용, 발전되었으며, 메이지 이후 유교이념은 번복되었으므로, 고대적 문화유산은 현재까지 부정되거나 말살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고대국가 및 문명은 한반도를 통해 이주한 도래인에 의해 단계적으로 발전된 것일 뿐 아니라, 도래의 시기도 동북아 및 한반도 정세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1단계는 진한의 통일여파로, 2단계에서는 삼국이 중화질서에 편입되는 단계에서 권력에서 소외되기를 원치 않았던 청동기문명의 호족들이, 그리고 3단계에서는 위기를 맞아 재기를 꾀하던 백제왕가가 일본 천황으로 진출하는 단계에서 광대한 단위의 이주가 이루어졌다는 견해가 고고학계 연구결과와도 일치된다는 점을 고찰하였다. 그리고, 열도는 중화질서에 편입되지 않았기에 우리와는 거의 상반된 방향으로 제도와 문화가 관리될 수 있었음을 고찰하였다. 한반도는 종주국이었던 중국과 호흡을 같이 하며 발전을 거듭하는 가운데, 고대 문화적 요소는 유교적 가치척도에 의해 미개한 것으로 규정되어 정리되고 말살되어 갔다. 삼국시대 불교채택 후 샤만의 호족들은 권력의 핵심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송조가 주자학을 받아들인 후 그러한 성격은 더욱 강해져, 고려 후기 및 조선 초에 문화의 격변기를 맞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후기에 성립된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 이어, 조선시대에 들어 관서사서 편찬사업이 더욱 왕성하게 행해졌다. 그 이유는, 조선조가 주자학을 정치이념으로 채택한 후, 주자학적 코드에 맞지 않는 전대문헌을 수거하여 민간의 유통을 막는 한편, 전대문헌에 실려 있는 비주자학적인 이야기에서 그 화소만을 살려 주자학적 鑑戒에 맞는 내용으로 개작하려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주자학적 감계의 정신은 그 이후의 문학에서도 낭만성 상실의 시대를 초래하게 한다. 효와 열과 청빈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은 조선 시대에는 이러한 이념에 눌려 낭만적 연애란 문학에서도 실생활에서도 존재할 수 없어 졌다. 그러나 임진, 병자 양난 이후의 정치, 사회적 혼란 속에서 시작된 천민 광대의 예능 판소리 춘향가 및 한글소설의 성행은, 낭만성 회귀의 시대를 열어간다. 그런데 이러한 진전은 결코 민중에 의해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즉 가혹한 연좌제 하에서 강상확립의 책임을 져야 했던 지방 관리들과 문사들이 하층민의 효열담을 산출하여, 이를 감계의 소재로 삼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조 말기에는, 잉여생산물의 축적으로 사회가 무섭게 변모해가는 심각한 위기에 처하여 조선왕조는 사회 전체의 양반화를 감수하고라도 이념과 체제의 유지에 힘써야 했던 점을, 흥부와 놀부의 형상화 등을 분석하며 살펴보았다. 조선 후기 민의 괄목할만한 성장이 있었으나, 이를 극복할 만한 지배자의 관리도 그 만큼 치밀하게 유지 발전해왔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유교적 문화이념에 순치된 조선조의 후예가 이와는 상반된 문화이념으로 운용되는 일제 식민통치를 만났을 때의 문화적 충격은 실로 컸을 것이며, 이를 이상의 날개를 재해석함으로써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