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이와 루이코는 『요로즈쵸호』의 사장이자 메이지기의 유명한 번안소설가였다. 자신의 번안소설을 『요로즈쵸호』에 연재했는데 이 신문은 그 덕분에 당대 최고의 판매부수를 올릴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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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 인하대학교 대학원, 2014
학위논문(박사) -- 인하대학교 대학원 일반대학원 , 한국학과 , 2014. 8
2014
한국어
811.3609 판사항(21)
인천
The Acceptance of Kuroiwa Ruiko and Korean Adapted Novels in 1910's
97 p. ; 26cm
인하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지도교수:최원식
참고문헌 : p.9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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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이와 루이코는 『요로즈쵸호』의 사장이자 메이지기의 유명한 번안소설가였다. 자신의 번안소설을 『요로즈쵸호』에 연재했는데 이 신문은 그 덕분에 당대 최고의 판매부수를 올릴 정...
구로이와 루이코는 『요로즈쵸호』의 사장이자 메이지기의 유명한 번안소설가였다. 자신의 번안소설을 『요로즈쵸호』에 연재했는데 이 신문은 그 덕분에 당대 최고의 판매부수를 올릴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조선에서도 그의 번안소설은 인기였고 동양서원의 민준호, 박문서관의 노익형, 보급서관의 이해조 그리고 『매일신보』의 기자들인 조중환, 이상협, 민태원 등 당대의 굵직한 작가들이 구로이와 루이코를 중개자로 한 소설들을 번안했다.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 중 한명인 쓰루미 슌스케에 의하면 구로이와 루이코는 자유민권운동가이자, 메이지 전 기간을 통해 국권주의자 이토 히로부미를 공격한 자유주의자였다. 또한 『소설신수』 이래 일본의 문예 사상이었던 자연주의에 반대하고 예술미 외에도 윤리미가 있다는 것을 호소하며 자신의 소설이 대중들의 교훈에 이바지함을 강조한다.
『불여귀』(1912년), 『쌍옥루』(1912년), 『장한몽』(1913년) 등의 가정소설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릴 무렵 『지환당』(1912년), 『도리원(상)』(1913년), 『누구의 죄』(1913년) 역시 출판되었다. 이 세 텍스트들은 모두 정탐소설이란 공통점을 지니고 있고, 따라서 신문관에서 나온 아동문학을 제외하면 이 시기 번안소설을 가정소설/ 정탐소설의 두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다. 조중환은 ‘조선화’와 ‘인정’을 그리는 것을 번안의 목표로 삼았고 그의 번안 전략은 성공해 인기의 최고점을 누렸다. 조중환의 성공을 보면서도 세 텍스트의 번안자들은 하나같이 그의 번안전략, 즉 ‘조선화’를 택하지 않았다. 장소는 모두 프랑스 파리이며 인명 역시 한국적이라고 할 수 없는 이름들이다. 세 텍스트는 공통적으로 서양의 민주적 제도, 만민의 평등을 구현하는 재판, 과학적인 정탐수사 등을 묘사하고 있고 이것들은 당시 조선의 상황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들이기 때문에 서양소설 그대로의 전략을 채택했다고 생각된다. 과부가 된 여성들의 재가를 당연하게 여기고 자유나 평등, 자유연애를 스스럼없이 얘기할 수 있는 것도 서양을 배경으로 할 때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조선이 배워야 할 것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계몽적 입장은 정탐소설이 채택될 때 의도적으로 개입되었다고 보인다.
다음으로 구로이와 루이코의 번안소설을 선택한 이는 이상협이었다. 『정부원』을 연재하기 전에 쓴 글을 통해 우리는 그의 번안관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서양소설은 서양소설’대로 번역해야 하며 ‘소설 가운데의 지명과 인명을 우리의 입으로 옮기기 쉽고 우리의 귀에 익도록 고쳤으나’ 허물이 적지 않다는 생각이다. 근대적인 번역관을 최초로 피력한 경우일 것이다. ‘서양소설을 서양소설 같이’는 정탐소설의 성격이었다. 이상협은 이 모토를 통해 번안소설에 대한 자신의 지향이 조중환과 같은 ‘조선화’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는 서양이 우리와 물정 풍속은 좀 달라도 인정은 우리와 다를 것이 없다는 ‘인정’에 대한 언급이다.
조중환이 조선화’를 바탕으로 ‘인정’을 그린 『장한몽』을 썼다면 이상협은 ‘서양소설대로’를 바탕으로 ‘인정’을 그리고자 한다. 이상협의 말대로라면 인명을 조선식으로 바꿀 필요가 없다. 서양과 조선의 ‘인정’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원』의 인물들은 서양 무대에 서양의 옷을 입고 있는 조선인들이다. ‘지명과 인명’을 바꾼 것을 자신의 ‘허물’이라고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이상협 역시 『장한몽』의 성공을 무시할 수 없었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정탐소설을 잇고 있으면서도 가정소설의 인기를 무시할 수 없었던 이상협의 번안소설에 대한 모색이 『정부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상협은 『해왕성』에서 근대적 의미로서의 ‘번안’이란 단어를 최초로 썼다. 더 나아가 가정소설과 분리의 선을 긋는다. 자신 역시 전례에 벗어나지 못해 두세 번 가정소설을 게재한 적이 있으며 『해왕성』이 가정소설이 아니어서 많이 주저했다고 밝힌다. 이런 점에서 『해왕성』은 이상협의 말처럼 “대담한 시험”이다. 『해왕성』을 연재한지 근 6개월 만에 이상협은 反 가정소설의 번안관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정부원』은 가정소설과 정탐소설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었고, 이상협은 『정부원』이란 과도적 모색을 통해 『해왕성』이란 번안소설의 길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알렉산드르 뒤마의 세계명작 『몬테크리스토 백작』이었다. 또한 『해왕성』의 시간적·공간적 배경은 구로이와 루이코의 『暗窟王』과 완전히 다르다. 주무대는 중국이고 때는 1894년 청일전쟁 즈음이며 루이 18세는 서태후로, 나폴레옹은 손문으로 바꿔놓았는데 『해왕성』의 배경을 조선의 상황과 좀 더 가깝게 치환하고자 했던 이상협의 계산으로 보인다. 주인공 장준봉이 복수할 대상인 양보천, 황대팔, 양운 등이 서태후와 권력을 나누고 있는 지배계층이란 점, 또한 서태후와의 대립 구도가 손문이라는 것은 일본을 포함한 조선의 지배층 역시 언젠가는 복수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상협이 보여주고자 했다고 생각된다.
민태원의 『애사』는 1918년 7월 28일부터 1919년 2월 8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다. 1918년은 매우 다사다난했던 시기였다. 아미앵 전투로 제1차 세계대전의 전선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고 일본에서는 1918년에 쌀폭동이 일어났다. 같은 해 일본은 조선에 ‘곡류수용령’을 공포했는데 조선쌀의 일본 반출로 굶어죽는 조선인들이 많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같은 해에 세계적인 인플루엔자가 유행했다. 당시 조선총독부 연감에 따르면 국내에서 14만 518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상황에서 『레 미제라블』을 번안한다는 것 자체가 그 밑바탕에 계몽적 태도가 깔려있음은 자명할 것이다.
이해조나 이상협은 직역에 가까운 완역을 했지만 민태원은 조금 다른 방식, 즉 조선식 표현이나 조선식 관용어로 번안하기 시작한다. “화수분”, “털찝”, “총냥
이” 등의 조선식 어휘에서부터 “여편네 꼴이 박히어서”, “월궁의 선녀 같고 물 찬 제비같이” 등의 관용적인 표현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조선식 표현으로의 변용은 인물들에게 생동감을 부여하기도 하는 등 소설에 윤기와 재미를 부여한다. 조선식 표현의 변용과 토속어의 발견을 통해 순한글문장은 질적 비약을 이루며 『애사』의 인물들은 때로는 고뇌하며 때로는 생동하며 근대적 인물로 거듭난다.
민태원은 이상협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이란 세계명작을 이어받아 『레 미제라블』을 선택했다. 세계명작을 번안한다는 것은 1915년경 성립한 문예주의적 태도를 바탕에 두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길을 조금 더 가다보면 창작소설/번역소설로 나뉠 수밖에 없으며 거기에 번안소설이 낄 틈은 없다. 다시 말해 세계명작의 길은 번안소설의 최고점이면서 종착점이란 의미이다.
민태원은 이상협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이란 세계명작을 이어받아 『레 미제라블』을 선택했다. 세계명작을 번안한다는 것은 1915년경 성립한 문예주의적 태도를 바탕에 두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길을 조금 더 가다보면 창작소설/번역소설로 나뉠 수밖에 없으며 거기에 번안소설이 낄 틈은 없다. 다시 말해 세계명작의 길은 번안소설의 최고점이면서 종착점이란 의미이다.
한일 병합 이전의 번역·번안 서사는 대체로 애국계몽적 입장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1910년대 초기 민준호, 노익형, 이해조 등은 병합 이전의 계몽적 입장을 이어받아 구로이와 루이코를 번안했고 이상협과 민태원 역시 한편으로는 이들의 계몽적 입장을 받아들였고, 다른 한편으로 이상협은 근대적 번안 개념을, 민태원은 조선식 표현 등을 통해 순한글문장의 질적 비약을 이뤄냈다. 다시 말하자면 조중환으로 대표되는 『장한몽』 등의 가정소설과는 다른 번안소설의 흐름이 1910년대에 있었고 그 중심에 구로이와 루이코의 번안소설이 있었던 것이다.
핵심어: 구로이와 루이코, 번안소설, 번역소설, 매일신보, 요로즈쵸호, 번안개념, 애국계몽, 민족개량주의, 정탐소설, 순한글문장, 레미제라블, 세계명작, 문예주의, 조선식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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