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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조대 조선과 명(明)의 건주여진(建州女眞) 협공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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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G3715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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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연구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하였다.
      첫째, 明의 建州衛 협공 요청 이전 조선의 건주위 征伐計劃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元明交替期 혼란한 틈을 이용, 여진세력들은 지금의 만주와 요동일대에 南下하였고, 명의 여진 招撫로 명의 衛所를 개설 받았다. 그 대표적인 것인 바로 鴨綠江 유역에 거주하던 李滿住의 建州衛와 豆滿江 유역에 거주하던 童猛哥帖木兒의 建州左衛 등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6鎭 개척으로 말미암아 건주좌위는 압록강유역의 건주위로 이동하면서 추장들의 衛印爭奪이 일어나 건주좌위와 建州右衛로 분화되고, 소위 '建州三衛'의 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이만주의 건주위는 조선 세종대 압록강의 지류인 婆猪江으로 이동하여 온 이래 조선과 계속된 분쟁으로 두 차례에 걸친 정벌을 받았다. 명과 조선을 통한 무역관계가 건주여진의 사회경제의 발전을 촉진하고 있었지만, 당시 여진사회는 半農半牧의 사회경제체제에서 빠르게 農耕化하면서 많은 勞動力과 농경에 필요한 物化 등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진사회는 이러한 노동력 등을 주로 명과 조선을 침입하여 끌고 간 사람들로 충당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건주위는 명과 조선 양측으로부터 通交에 대한 제한을 당하면서 명과 조선에 대한 침입이 격화되고 있었다. 당시 건주위가 요동지역을 침입한 것이 1년 동안 1백여 회나 거듭되고, 조선의 명으로의 使行路인 東八站 지역이 차단되기도 하였으며, 마침내 조선의 관문인 義州가 兀良哈 1천여 인에게 포위당하여 약탈당하면서 조선은 압록강 유역을 위협하는 건주위에 대한 정벌을 계획하고 있었다. 따라서 건주위를 비롯한 여진사회의 발전 상황과 건주위의 요동침입, 사행로 차단, 조선의 의주지역을 위시한 조선 변경침입 상황들을 살펴봄으로서 조선의 독자적인 건주위 정벌계획을 고찰할 것이다.
      둘째, 명의 협공 요청과 조선의 출병 상황을 상세히 그려보고자 한다. 명의 건주위 협공 요청 과정에서부터 조선의 출병 준비와 朝鮮軍이 활약하여 이만주가 척살되고 성공적인 건주위에 대한 조선과 명의 협공이 이루어진 과정을 소상히 밝혀보고자 한다. 사실 明軍과 조선군은 서로 遭遇하지 않고 건주위에 대한 지역을 나누어 공격하였는데, 명군과 조선군의 활동에 대해 각각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만주을 척살함으로써 건주위를 궤멸시킨 것은 조선군의 활약이었는데, 이것은 명나라보다 조선이 건주위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과 보다 적극적인 건주위에 대한 정벌계획을 이미 구체적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에 대한 것을 보다 면밀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더불어 당시 이루어진 조선과 명의 여진 협공은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에 대한 역사적 의의를 살펴볼 것이다. 왜냐하면 세조대 여진 협공에 대한 성공은 이후 성종대 다시 한번 조선과 명의 건주위 협공의 배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셋째, 조선과 명의 건주위 협공의 결과와 영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건주위 협공의 성격을 조선과 명의 여진정책 속에서 분석하여 조망해 볼 생각이다. 성공적인 여진협공에도 불구하고 건주위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명과 조선 사이에서 성장을 거듭하면서 성종대 다시 한번 조선과 명의 협공을 당하기까지 하였다. 결국 조선과 명은 각각 변경의 안정을 위해 여진에 대한 여러 정책 중 정벌이라는 극단의 선택까지도 포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과 명의 이러한 여진 統制策들은 오히려 여진사회의 발전과 集中化를 자극하는 것이었으며, 실제 이러한 과정에서 이후 누루하치(Nurhaci, 努爾哈赤)가 성장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편 조선과 명의 여진 협공은 명 중기 이후 요동을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 여진사회가 이제는 조선의 독자적인, 그리고 명의 독자적인 정벌이라는 차원을 넘어 통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중심으로 조선과 명, 여진관계를 다각적으로 분석하는 동시에 조선과 명의 건주위 협공에 대한 영향과 결과를 종합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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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하였다. 첫째, 明의 建州衛 협공 요청 이전 조선의 건주위 征伐計劃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元明交替期 혼란한 틈을 이용, 여진세력들은 지금의 만주와 요...

      연구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하였다.
      첫째, 明의 建州衛 협공 요청 이전 조선의 건주위 征伐計劃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元明交替期 혼란한 틈을 이용, 여진세력들은 지금의 만주와 요동일대에 南下하였고, 명의 여진 招撫로 명의 衛所를 개설 받았다. 그 대표적인 것인 바로 鴨綠江 유역에 거주하던 李滿住의 建州衛와 豆滿江 유역에 거주하던 童猛哥帖木兒의 建州左衛 등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6鎭 개척으로 말미암아 건주좌위는 압록강유역의 건주위로 이동하면서 추장들의 衛印爭奪이 일어나 건주좌위와 建州右衛로 분화되고, 소위 '建州三衛'의 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이만주의 건주위는 조선 세종대 압록강의 지류인 婆猪江으로 이동하여 온 이래 조선과 계속된 분쟁으로 두 차례에 걸친 정벌을 받았다. 명과 조선을 통한 무역관계가 건주여진의 사회경제의 발전을 촉진하고 있었지만, 당시 여진사회는 半農半牧의 사회경제체제에서 빠르게 農耕化하면서 많은 勞動力과 농경에 필요한 物化 등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진사회는 이러한 노동력 등을 주로 명과 조선을 침입하여 끌고 간 사람들로 충당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건주위는 명과 조선 양측으로부터 通交에 대한 제한을 당하면서 명과 조선에 대한 침입이 격화되고 있었다. 당시 건주위가 요동지역을 침입한 것이 1년 동안 1백여 회나 거듭되고, 조선의 명으로의 使行路인 東八站 지역이 차단되기도 하였으며, 마침내 조선의 관문인 義州가 兀良哈 1천여 인에게 포위당하여 약탈당하면서 조선은 압록강 유역을 위협하는 건주위에 대한 정벌을 계획하고 있었다. 따라서 건주위를 비롯한 여진사회의 발전 상황과 건주위의 요동침입, 사행로 차단, 조선의 의주지역을 위시한 조선 변경침입 상황들을 살펴봄으로서 조선의 독자적인 건주위 정벌계획을 고찰할 것이다.
      둘째, 명의 협공 요청과 조선의 출병 상황을 상세히 그려보고자 한다. 명의 건주위 협공 요청 과정에서부터 조선의 출병 준비와 朝鮮軍이 활약하여 이만주가 척살되고 성공적인 건주위에 대한 조선과 명의 협공이 이루어진 과정을 소상히 밝혀보고자 한다. 사실 明軍과 조선군은 서로 遭遇하지 않고 건주위에 대한 지역을 나누어 공격하였는데, 명군과 조선군의 활동에 대해 각각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만주을 척살함으로써 건주위를 궤멸시킨 것은 조선군의 활약이었는데, 이것은 명나라보다 조선이 건주위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과 보다 적극적인 건주위에 대한 정벌계획을 이미 구체적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에 대한 것을 보다 면밀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더불어 당시 이루어진 조선과 명의 여진 협공은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에 대한 역사적 의의를 살펴볼 것이다. 왜냐하면 세조대 여진 협공에 대한 성공은 이후 성종대 다시 한번 조선과 명의 건주위 협공의 배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셋째, 조선과 명의 건주위 협공의 결과와 영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건주위 협공의 성격을 조선과 명의 여진정책 속에서 분석하여 조망해 볼 생각이다. 성공적인 여진협공에도 불구하고 건주위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명과 조선 사이에서 성장을 거듭하면서 성종대 다시 한번 조선과 명의 협공을 당하기까지 하였다. 결국 조선과 명은 각각 변경의 안정을 위해 여진에 대한 여러 정책 중 정벌이라는 극단의 선택까지도 포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과 명의 이러한 여진 統制策들은 오히려 여진사회의 발전과 集中化를 자극하는 것이었으며, 실제 이러한 과정에서 이후 누루하치(Nurhaci, 努爾哈赤)가 성장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편 조선과 명의 여진 협공은 명 중기 이후 요동을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 여진사회가 이제는 조선의 독자적인, 그리고 명의 독자적인 정벌이라는 차원을 넘어 통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중심으로 조선과 명, 여진관계를 다각적으로 분석하는 동시에 조선과 명의 건주위 협공에 대한 영향과 결과를 종합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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